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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교육의 역할 : 의사소통과 경험의 성장

인간의 학습과정에 대한 성찰, 그리고 경험이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대한 논의를 했던 지난 3장의 맥락을 이어받아 4장에서는 경험을 “자신이 환경을 선택하고 구성하며 자신과의 구조접속을 이루어 낸 결과”라고 정의한다(p92). 학습자는 환경과의 조응과정 속에서 객관적인 대상을 나와 환경의 ‘인격적이고 총체적인 만남’속에서 나의 삶 속으로 통합하는 과정을 거친다. 따라서 경험 안에서 자기와 환경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환경이 곧 자기의 일부이며, 그러한 자신이 곧 환경이 된다.

교육과정이 교수자와 학습자 사이의 의사소통과정으로 정의된다면, 이 사이에서의 의사소통은 두 사람 모두를 변화시킨다(p98). 이런 맥락에서 사회조직이 교육적 효능을 잃어버리는 때는 오직 틀에 부은 듯이 고정된 방식으로 학습자와 환경이 조응하는 경우이다. 의사소통은 누군가 누구에게 정보를 주고받고 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에서 서로의 경험이 공동소유가 될 때까지 경험에 참여하고 경험을 변화시킴으로써 관계를 소통시키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의사소통 과정에서 교육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양자의 생각의 구조가 동일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의사소통의 과정에서 서로의 경험과 가치관의 차이를 확인한 후, 서로 타협하고 협상하는 과정을 거쳐 공존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 세상에 ‘완벽한’ 의사소통은 오로지 군대에서만 일어난다.

학습만을 놓고 보자면 이는 매우 사적인 과정이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 행동의 어떤 부분도 완전하게 사적인 것은 없으며 그 의미는 사회적 맥락과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p104). “교육은 바로 사적인 과정으로서의 학습이 공적 과정과 연계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며, 개인의 사적 변화를 사회적 의미구조 안으로 인도함으로써 그가 사회적 맥락에서 숨쉬며 의미 있는 소통을 통하여 단계적으로 자신을 성장시켜 가도록 지원하는 과정이다.”(p105) 이런 맥락에서 학교 교육과정의 핵심인 ‘교과’는, 총체적이면서 맥락적이며 또한 개인적이기도 한 아이들의 삶(학습)의 과정을 자신의 경험과 괴리시키는 역할을 한다. 보편타당한 기준을 바탕으로 분절화되고 탈맥락화∙비일상화의 과정을 거친 ‘교과’라는 경험은 오히려 아이들의 학습력을 저해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평생교육은 교육과 학습이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한 도구적 수단으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이전의 외재적 가치를 넘어서서 인간의 한 가지 중요한 삶의 방식(way of life)으로서의 의사소통적 학습이 제자리를 잡게 하는 삶의 기초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p109) 평생교육론 역시 교육을 보는 나름의 ‘색안경’이라고 했을 때, 평생교육이라는 색안경을 쓰게 되면 지금까지 교육을 독점하던 학교의 모습이 새롭게 보이게 된다. 지금껏 교육이라고 믿어왔던 행위들이 교육이 아닌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혼란과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새로운 ‘교육’을 구성하는 언어를 만들어 내는 것, 새로운 ‘교육’을 구성하는 실천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어렵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대안교육은 학교에서 삶의 활력을 잃어버린 아이들의 욕구를 다시 자극하고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다. 정희진의 표현처럼,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며, 새로운 교육과정을 고민하고 교육을 규정하는 새로운 언어를 알게 되는 과정 역시 상처를 보듬어 안아나가는 과정일 것이다. 이 ‘상처’를 나의 경험으로 통합할 수 있는 ‘학습력’을 갖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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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평생학습 : 학습의 생명력

 

이번에 읽은 제3장에서는 ‘학습’의 의미 그리고 평생교육학에서 다루는 ‘평생학습’의 의미규정에 대한 서술이 주요하게 다루어졌다. 학습 그리고 평생학습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개념정의들을 접하면서 나의 인식의 지평이 넓어짐과 동시에 마음 한 구석이 풍족해짐을 느꼈다.(독서를 통한 ‘학습’!)

생물학이나 물리학 영역에서 인간에 대한 탐구를 하면서 ‘학습’개념을 도출해 낸다든지, 사회과학 분야에서 ‘학습 심리학’이라는 영역을 통해서 넓은 차원의 학습개념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데에 반해, 여전히 기존의 교육학 연구에서는 ‘학습’을 학교 교실에 앉아서 하는 ‘공부’에 한정지어 왔다. 여타 학문 분야에 비하여 교육학은 상대적으로 ‘가르치는 방법과 제도’연구에 치중해 왔던 만큼 ‘배우는 행동’, 즉 학습자체에 대한 연구성과물을 충분하게 산출해 내는 데에 실패하였다.(p68)

언제 어디서건, 배우고자 하는 습성은 인간의 본질적 특성에 해당한다.(p69) 학습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이를 자신의 경험으로 축적하는 과정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학습은 감각과 인지과정을 통하여 자신만의 인지구조 혹은 스키마(scheme)를 만들어 내는 것, 즉 “익숙함의 확장”의 과정인 것이다. 한편, 학습의 개념은 다음처럼 서술될 수도 있다. “학습이란 주체가 환경을 경험 안에 내면화함으로써 나와 ‘관계 맺게’하는 과정이다.(p73)”

저자는 학습을 지적 호흡이라는 말로 비유를 하면서, 지식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서는 강한 ‘학습 심폐력’으로서의 학습력이 요구된다고 말한다.(p71) 여기서 언급되는 학습력은 학습자가 ‘학습방법의 학습’을 습득할 수 있는지의 여부와 관계된다. 학습방법의 학습은 다시 자기주도 학습능력으로 이어지는데, 나는 이 개념망을 한번 더 확장하여서 학습력의 강화는 곧 자기 안의 가능성의 영역을 인식하고 이를 개척해나갈 수 있는 능력으로 해석하였다. 근대 교육은 계몽된 이성을 바탕으로 각 개인으로 하여금 주체적인 사고를 가질 수 있도록 의도했지만 결과적으로 수많은 ‘전도된 불구자’를 양산해 내었다. 정신과 육체의 분리, 도구주의적 이성관은 자신의 삶과 괴리된 피상적인 학습으로 이어졌으며, 근대의 분절화된 교과들은 전체로서의 삶(자연)과 분리되어 자신의 영역밖에 모르는 ‘전문가’들의 출현을 불러왔다.

“학습은 끊임없는 자기변화와 사회변화를 동시에 가능하게 해 주는 촉발기제이어야 한다.(p79)” 자신에게 주어지는 감각에 대한 자신만의 적응방식을 획득해 나가는 것이 학습의 과정이라면, 현재 자신에게 주어지는 자극 자체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고 이를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자신의 습성(habitus)이 알게 모르게 자본주의 혹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인간의 가치관이라는 것은 “학습을 통해 형성된,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결정(p80)”이기 때문에 인간만이 가진 ‘반성적 능력’을 통하여 자신의 현재 삶에 대해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서 계속해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이 과정이 곧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면서 ‘학습’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풍부하게 가꿀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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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역할?

#1. 교사의 전문성은 ‘교과교육’에만 한정되어야 하는가?


교사의 전문성을 수업내용과 수업방법과 같은 구체적인 교과교육에 한정지어야 한다는 주장의 배경에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교사에게 주어지는 과도한 업무부담을 줄여보고자 하는 문제의식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숱한 ‘다른’ 업무에 치이느라 정작 ‘중요한’ 교과교육에 힘을 쏟지 못하게 되는 것은 해결해야할 중요한 문제이지만, 한편으로는 “교사의 전문성은 교과교육영역에서 드러난다”라는 명제가 교사의 자율성을 오히려 침해하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작년 여름 “국기 경례를 거부한” 이용석 교사가 국가공무원법에 따라 경기도교육청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정직 3개월 조치를 받았던 사례나, 전교조 교사들의 연가투쟁에 대한 보수세력들의 반응(“교사는 자신의 주관적(‘정치적’) 견해에 따라 행동을 해서는 안 되며 오로지 학생들을 위해 (중립적으로) 교과수업에 충실히 임해야 한다”)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듯이, 교사의 역할과 전문성을 수업교과영역으로 한정시키는 것은 정치적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다.

교육은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가치편향적인 행위이며, 서로의 인격적 만남과 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교육활동이 한정된 수업과 교과라는 틀 안에 구속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2. 교사를 어떠한 존재로 볼 것인가?


모든 군인은 군인이기 이전에 인간이기 때문에, 혹은 모든 여성이 여성(어머니)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듯이, 모든 교사는 교사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보편적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다른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임금노동자인 교사들만 유독 특수한 존재로 여기면서 교사의 노동3권 중 단체행동권을 보장하지 않는 이유 중 가장 전형적인 것이 “교사는 성직자(스승)이다”라는 말이다.

교원평가제 도입을 반대하며 연가투쟁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표출한 교사들도 “아이들의 교육”을 위함이었고, 반대쪽에서는 또한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교원평가제를 도입해야하고 연가투쟁을 한 교사들을 엄중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분명히 “진짜 교육”이 있고 동시에 “가짜 교육”이 있다는 것인데, 이 논란 역시 “교사상”에 대한 상반된 가치관에서 비롯한 것이다.

예전 군부독재정권에 의한 ‘반(反)중립적’ 교육과정에 대한 반성에서 도출된 ‘교육의 중립성’이라는 테제는 여전히 유의미하지만, 한편 교육은 궁극적으로 ‘탈(脫)중립적이고 가치지향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 현실에서 교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객관성과 중립성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교육관을 구속받지 않고 실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율성과 이에 대한 지원이 아닐까? ‘진정한 교육’, ‘참교육’은 절대로 존재할 수 없으며, 교육의 질은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학생들의 판단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3. 변화하는 시대에 교사의 역할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


근대적 ‘국민 만들기’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던 학교교육은 시간이 흐를수록 동네북 신세가 되어만 가고 있다. 이념의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지금은 누구나 학교교육에 대해서 비판을 하고 있지만, 학교 교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갈수록 많아지는 어찌보면 아이러닉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후기 근대(post-modernism)는 거대한 명분에 의해 움직이는 시대가 아니라 작은 행복에 의해 움직이는 시대이다. ‘소품종 대량생산’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탈근대적 생산방식으로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이에 따라 아이들 역시 날이 갈수록 ‘개인주의적’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가는 상황에서 여전히 ‘집단적 사고’를 고수하고 ‘공부’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교사는 아이들과 소통의 가능성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미 탈근대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을 근대적인, 실증적 합리주의를 기반으로 한 교과들이 가르쳐지는 획일적인 학교에 붙들어 매려는 것은 아이들에게 행하는 어른들의 폭력이며,1) 이것이 곧 ‘공교육 붕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내일 학교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 아니라면, 학교 교사들에 대한 역할기대는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

기성의 보편타당한 지식을 선험적으로 상정하고 이것을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존재로서의 교사와 아직 미성숙하고 어른들의 보호를 받아야하는 존재로서의 학생(청소년)을 상정하는 도식은 더 이상 매력이 없다. 입시에서의 성공, 더 나아가 인생에서의 성공이라는 획일적인 가치관으로 잠식된 학교현장에서 교사는 학생들 각자가 내면의 욕구와 꿈을 찾을 수 있도록 관계를 맺어야 한다. 중립성이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학생에 대한 쿨함(무관심)과 사랑이라는 명분 속에 행해지는 구속 사이의 긴장 관계 속에서, 교사는 학생들을 동등한 인격적 주체로 바라보고 기꺼이 그들과 삶을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교사의 사명이며, 전문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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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의 삶에서의 교육, 학습, 메타학습

 

여기까지 현재 나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역사적 맥락을 쭉 훑어보았다. 한 5년쯤, 아니 10년 쯤 뒤에 내가 다시 교육생애사를 써본다면 여기서 어떠한 내용이 어떻게 추가될지 자뭇 궁금하다. 지금 이전의 나의 삶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면 어떻게 달라질 지도 역시나 궁금하다.

부모님은 지금도 여전히 내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가치관을 못마땅해 여기시고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기를 바라신다. 생각해보면, 나의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스스로 궁금해진다. 분명히 나는 ‘변화’하였는데 그 변화의 동인은 무엇인지 과정은 무엇인지에 대해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현재의 나(이렇게 말하고 있는 순간에도 조금씩 ‘변태’하고 있는 나)의 정체성에 이르도록 만든 외부의 자극이 어느 특정한 순간에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나를 둘러싼 환경과 접촉하면서 그것을 인식하고 나름의 판단을 내리는 과정을 겪어왔지만, 특정한 시점에 나는 특정한 자극들을 예전과 다르게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이 자극에 대해 좀 더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된 것이다. 여기서 만일 한 인간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과 과정들을 일컬어 ‘교육이 일어났다’라는 말로 표현을 한다면, 교육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내 몸 안의 변화과정들에 대해서는 ‘학습’이라는 말로 지칭을 해보고자 한다.

사실 나의 외양은 계속해서 ‘변화’해왔지만, 내가 태어나서부터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삶은 ‘변화’가 없는 삶이었다. 실존에 대한 고민과 관련해서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자극을 한정적이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했다는 점에서 ‘변화’가 없는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위에서 서술했던 것처럼, 나는 어느 특정한 순간에 나에게 주어지는 자극들에 대해서 성찰적인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고, 내 삶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인간은 끊임없는 ‘학습’을 통해서 환경과 조응하며 ‘변화’한다는 점에서 ‘교육’은 일정 부분 ‘사회화’ 혹은 ‘인식의 적응’이라는 의미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단순히 인간의 변화가 곧 ‘진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수’적인 사람도 생존의 차원에서 끊임없이 감각을 인지하고 반응하면서 자신의 스키마를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내 삶에서 급격한 변화가 있었고, 지금의 내가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 것은 곧 내 스키마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 급격한 전환의 계기는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독서의 경험일 수도 있고, 내 스스로의 성찰일 수도 있다. 혹은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삶과 관련한 모든 자극과 변화들에 대해 ‘교육’ 또는 ‘학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여기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특정한 자극들을 예민하게 포착해내고 이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해주는 섬세한 언어이다. 지금 이 순간 나의 고민을 바탕으로 나는 ‘교육’을 “한 개인이 자신의 ‘학습’과정에 대한 메타 학습이 가능한 상태”라고 명명한다. 의식(인식)의 변화와 몸의 변화는 결코 분리될 수가 없는데, 몸의 총체적인 변태가 일어나지 않는 한 나의 메타학습은 여전히 한정적일 것이며 행여 새로운 자극에 대한 학습과정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로써 변화한 내 스키마는 내 몸과 괴리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의 머릿속 생각을 말로 글로 언어화하는 과정에서도 나의 학습은 이루어지고 있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영원한 것은 저 푸른 나무이다.”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언어(색안경)을 가지고 세상을 인식하며 자신의 색안경의 질에 따라 세상과 나를 바라보는 관점은 상이해진다. 교육을 고민하는 것은 그래서 현재 내 삶을 성찰하는 언어를 고민하는 것이며, 이 과정은 늘 고통스럽다. 고통을 수반하지 않은 쉬운 언어라는 것은 ‘익숙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익숙하다는 것은 곧 내 학습과정에 대한 메타학습이 중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희진씨의 말처럼 “안다는 것은 상처를 받는 일”이지만 고통 후에 찾아오는 새로운 깨달음과 내 몸의 ‘변태’를 느끼는 순간의 희열은 무엇과도 맞바꿀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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