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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은 계속된다: 학내 페미니즘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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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리 (페미니스트 연구자, 번역가)

 

대학 정문 담벼락에 <FEMINISM!>이라고 커다랗게 오려붙여두었던 여름날이 기억난다. 노랗고 빨간 글씨는 멀리서도 눈에 띄었고 가로수의 초록빛 잎사귀와 대비되어 어쩐지 아름다웠다. <FEMINISM!> 아래에는 조그마한 글씨로 ‘여성주의 교지 편집위 녹지’라고 쓰고는 전화번호를 적어두었다. 전화는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다른 포스터로 뒤덮이기 전, 일주일은 볼 때마다 행복했다. 2004년 여름, 나와 편집위원들은 ‘페미니즘 영화 상영회’를 열었고, 함께 책을 읽었으며 페미니즘 강좌를 들으러 다녔다. 교지를 인쇄하러 충무로에 가거나 학교 축제에 조그마한 부스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는 곰팡내는 어두컴컴한 편집실에 모여 수다를 떨었다. 여름은 그렇게 조용히 흘러갔다. 일은 그해 겨울에 일어났다.

 

“콘돔이나 뿌려대고 섹스에 관련된 이야기들로 일색된 당신들의 이야기는 여성주의라기 보다는 마치 섹스에 굶주린 인간들이나 아니면 여성은 무조건 피해자라는 피해망상적인 사고에 젖은 그런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중략) 여학우 권리신장이라는 측면을 살펴볼 때에 오히려 지금의 총여학생회가 없어지는 것이 낫지 않을까.”

 

11월, 학생회관에 대자보가 붙었다. 전 총여학생회장이었던 여학우가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한다는 소식이 들려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축제에서 나눠준 콘돔이 총학생회장 후보로 나선 여학우의 자질을 검토하는 일과 관련이 있는 걸까.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웠다. 언제부터 그렇게 대자보에 관심이 많았고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았던 걸까? 대자보가 붙어있는 며칠 동안 그 앞에서 사람들은 수군거리고 하고 웃기도 했다. 갑자기 페미니즘은 인기 있는 화제거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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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마저도 며칠가지 않았다. 자보가 떼어진 뒤 화제거리는 사라졌고, 해당 여학우는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지 못했다. 다시 학내는 조용해졌다. 평화롭고 모든 것이 느릿느릿했던 여름처럼. 개인적으로 만나 물으면 사람들은 페미니즘에 대해 별다른 이견이 없어보였다. 어찌 보면 옹호하는 듯 했다. 축제부스에서 젠더 감수성 테스트를 홍보하고, 빈 강의실에서 페미니즘 영화를 틀고 교지를 낼 때에도 사람들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지나쳤다. 지나고 보니 ‘그들’은 ‘그들’의 역치를 넘기기 전까지는 나와 우리에게, 페미니스트에게,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언제나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대와 역할에 맞춰 행동하고 타인에게도 그럴 것을 기대하는 ‘그들’은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자신의 자리와 이익을 넘본다고 생각할 때에만 반응했다. ‘그들’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편협함과 남성우월주의를 관용이라는 보다 세련된 형태로 베풀었던 것이다.

 

이제 나는 그 역치가 매우 낮아진 사회를 본다. 여성주의 소모임의 이름을 어지러운 물결이자 난교파티의 줄임말인 ‘난파’라고 지었다고 해서 소모임을 해체시키고, 여성으로서 차별받은 경험을 적었다고 해서 대자보를 찢는 일들이 벌어졌다. 페미니즘에 관한 강연이 열릴 예정이었다가도 안전을 이유로 취소되기도 했다. 이제 학내에서 페미니즘을 입에 담는 것은 두려운 일이 되었다. 학내에서 페미니스트로 커밍아웃 하는 일도 어려워지고 있다. 낮아진 역치를 보며, 그만큼 오래도록 페미니즘이 사회의 이슈가 되는 모습을 보며 놀랍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감사하기도 하다.

 

2017년 한국에서 헬페미, 영영페미, 뉴페미 등으로 불리는 새 세대 페미니즘 운동은 과거 여느 페미니즘 운동과도 다르다고들 말한다. 물론 다르기도 하다. 내가 대학생이던 2004년의 무관심으로 점철되었던 여름과 과도한 관심으로 시끌벅적했던 2017년의 여름이 다르듯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싸움의 장소와 무기가 달라진 것 또한 과거와의 차이에 보다 더 주목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현재 많은 젊은 여성들은 SNS를 통해 페미니즘을 접하고 온라인에서 활동하고 있다. 페이스북, 트위터, 여초 커뮤니티, 포털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이들에겐 ‘좌표’찍고 달려드는 게시글과 댓글이야말로 치열한 싸움터이고 해시태그와 ‘좋아요’는 든든한 무기이자 연대의 표시다. 그러나 나는 영영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에서 단절보다는 연속을 본다. 이들이 벌이고 있는 싸움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메갈리아든 강남역 사건이든 어떠한 계기를 통해 사회에 만연한 젠더 위계에 눈뜬 젊은 여성들은 자신들이 생활하는 공간에서 불평등과 혐오에 대항해 목소리를 내고 있는 중이다. 가정과 대학은 이들의 중요한 싸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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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이고 당연해보였던 과내 군대문화에 반기를 들고, 감히 나서서 말하지 못했던 교·강사의 성차별적 발언을 문제 삼고, 대자보를 쓰고, 공동행동을 조직하고, 축제를 기획하는 일. 나의 경험에 비춰보아도 대학공간은 단순히 공부하고 수업을 들으러 가는 곳만은 아니었다. 그곳은 사람들과 만나 논쟁하고 협상을 벌이고 일을 꾸미는 곳이었다. 제대로 싸우는 법을 익혔던 곳이기도 했다. 나는 그곳에서 언어를 새로 배웠고, 사람들과 만나는 법을 새로 배웠다. 정희진의 말처럼 “여성주의뿐만 아니라 기존의 지배 규범, ‘상식’에 도전하는 모든 새로운 언어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지지해준다.” 지금까지도 나의 삶을 의미 있게 하고 지지해주는 것은 대학 안팎에서 만난 페미니스트들과 책과 가르침이었다. 지금 내가 영영 페미니스트들의 학내 활동에 주목하고 이들의 안전과 자유로운 활동을 응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학 내 페미니스트들의 활동보장과 안전 문제에 주목하는 데에는 나의 개인적인 경험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지금 한국의 대학교 진학은 의무교육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70%에 육박하는 진학률을 자랑한다. 이에 비춰볼 때 한국사회에서 대학생이라는 지위는 전혀 특권적이지 않으며, 원하는 누구나 거쳐갈 수 있는 일종의 포스트-고등학교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한국의 청년들은 비로소 처음으로 입시의 압박에서 벗어나 새롭게 사회화를 겪는다. 동아리와 소모임을 결성해 공동체를 세우고 협의를 통해 공동체의 규칙을 정하거나 하는 경험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들은 수동적인 학생을 능동적인 시민으로 거듭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때 대학은 “사회로 나가기 전 성 평등 인식을 바로 세울 수 있는 마지막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전공이나 나이와 상관없이 남녀가 함께 대화와 토론을 통해 젠더 감수성을 키울 기회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 온라인 공간에서 페미니즘을 주제로 발화하는 방식이 갖는 한계는 학내 페미니즘 활동에 보다 더 많은 기대를 걸게 한다. 온라인 커뮤니티가 페미니즘 이슈에 관해 공론장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입장이 서로 다른 이들이 상호 존중하며 대화를 한다기보다는 차단과 블락을 통해 일방적으로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거나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시작점이 온라인이었다고 해서 계속해서 온라인 내의 활동과 키배(키보드 배틀)만이 페미니즘 활동일 필요는 없다. 온라인을 넘어 서로의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과 장소가 중요하다면 오프라인 학내 활동이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학내 페미니즘은 후속세대 페미니스트들을 키워낼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이다. 90년대 말 영 페미니스트들의 학내 활동이 한국 페미니즘 역사의 중요한 일부로 자리 잡았듯이, 영영 페미니스트들의 활동 또한 한국 페미니즘 역사의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과 단톡방 내의 언어 성폭력과 데이트 폭력을 고발하고, 새터와 MT를 비롯해 강의실과 축제, 술자리까지 일상을 파고드는 각종 성차별을 고민하는 일, 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불편과 불평등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일은 모든 페미니스트들의 일이 그렇듯,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발언하고, 행동하는 일이다. 역사를 고쳐 적는 일이다.

 

따라서 학내 페미니스트들의 안전과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일은 무엇보다 시급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대학에서조차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는 일이 부담스럽다거나 인신공격을 걱정해야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대학은 사회에 비해 비교적 자유롭고 안전한 환경에서 하고 싶은 운동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하지 사회의 축소판이 되어서는 안된다. 여성주의 뿐 아니라 사회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다양한 사고와 실험을 모색할 수 있는 공간이 우리의 대학이었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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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지>는 2010년에 없어질 뻔 했었다. 교지를 만들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산을 두고 압박했던 재단과 본부의 검열, 그에 항의하는 시위, 호소, 협상….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리한 싸움이 이어졌다. 안 그래도 한줌밖에 되지 않던 편집위가 공중분해 됐다. 여기서 접자는 말이 나왔다. 1967년에 창간된 여성주의 교지지만, 이어나갈 학부생이 없었다. 비슷한 이유로 성균관대의 <정정헌>이 나오지 않았고, 고려대의 <석순>도 발행되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서 끝낼 순 없다고 생각했다. 일 년에 두 번 꼬박꼬박 나오던 여성주의 교지로는 당시 <녹지>가 유일했다. 그런 <녹지>의 생사를 우리 손으로, 특히 내 손으로 결정지을 수는 없었다. 폐간에 반대했던 선배는 내가 유일했으므로, 대학원생 신분이지만 학부생 강의실에 들어가 <녹지>를 홍보했다. 다행히 찾아와준 10학번 학생 몇몇과 설득에 넘어간 후배 한 명과 함께 여름방학 내내 세미나를 했고, 가을에 교지를 낼 수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책이 나온 것은 2010년 44호가 유일하다. 이후로 <녹지>는 지금껏 꾸준히 일 년에 두 번씩 나오고 있다.

 

여전히 <녹지>를 생각하면 2004년의 여름, 그 시시콜콜했던 일상이 떠오른다. 한낮에도 어두컴컴했던 반 지하 같은 편집실에 널브러져 있던 라꾸라꾸 침대와 자주 시켜먹던 중국집 배달쿠폰, 잿빛 벽에 붙여둔 선명한 붉은 보지-꽃 포스터와 쌓여있던 <이프>까지. 그때 만난 사람들과 수다들. 나를 설명하고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할 언어를 얻었던 시간.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던 공간. 지금의 영영 페미니스트들에게도 그러한 시공간이 함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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