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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포인트> 특별호를 내며 ‘광장의 언어’가 새로운 정치로 구성되는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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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포인트> 특별호를 내며

‘광장의 언어’가 새로운 정치로 구성되는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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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글로컬포인트> 기획편집팀

 

 

흔히들 ‘87년 체제’를 이야기한다. 대한민국의 ‘87년’은 이전의 군부/독재정권과 ‘민주공화국’ 시대를 가르는 표상이다. 하지만 87년 이후의 대한민국은 과연 ‘민주공화국’이었는가. 이명박, 박근혜 정부 이전에도 “ 87년 체제를 넘어서야 한다”는 이야기는 끊임없이 나왔다. 그러나 그러한 성찰과 제안들조차도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나 경제 민주화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 이후 2016년, 우리는 여전히 ‘개발’과 ‘성장’, ‘가부장적 통치’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 정치사회의 총체적 파탄을 목도하고 있다. ‘87년 체제’의 담론들 속에서 많은 이들은 여전히 ‘우리’가 같다고 믿었다. 제도를 정비하면, 우리가 “공화국”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최근, 다시 ‘공화국’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했다. 대체 이들에게 ‘이상적인 정치의 무엇’으로 상정되는 ‘공화국’이란 무엇일까.

 

한 교수는 최근의 칼럼에서 “공화국의 최후 골간”은 “공공성”이며 이것은 “군인과 음부를 뜻했다”고 썼다.1 “그것이 없다면 인간과 국가 생명은 죽기 때문”이란다. 그런가하면, 민중총궐기 집회 무대에 선 김제동 씨는 “국가는 모두의 어머니여야 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4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박정희 개발독재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사회를 보며, 아마도 이제는 ‘죽이는 아버지’가 아니라 ‘돌보는 어머니’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강인한 표정으로 세상을 주시하면서 한 손엔 공화국의 깃발을 들고, 두 가슴으로는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며, 발치에서는 책을 읽는 다른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의 모습은 프랑스 혁명 이후 공화국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죽이는 것’이 아버지의 속성이거나, ‘돌보는 것’이 어머니의 속성인 것은 아니다. ‘깨끗하고 순결하며 희생적이면서도 강한‘ ‘어머니 공화국’이란, 또 다시 가부장적 가족모델의 체제가 기대하는 여성의 상을 강화하는 것 이상의 무엇도 아니다. 어쩌면 공화국을 공화국답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여전히 국가에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상을 덧입히고, 그 보호나 돌봄을 받아 마땅한 ‘국민’의 자격을 끊임없이 갈라 온 이 사회의 익숙한 ‘습’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웹진 <글로컬포인트>의 특별호는 광장에 나온 수백만의 ‘우리’들 사이를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기로 했다. 광장에서는 많은 이들을 만난다. 서울말을 쓰는 이도, 전라도 말을 쓰는 이도 있다. 수어를 쓰는 이들, 외국어를 쓰는 이들도 있다. 서로 다른 말들이 서로 다른 내용들을 담고 광장을 떠돈다. 하지만 그 사이를 채우고 있을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직 부족하다. 기왕에 박근혜 정권을 끝낼 시기가 왔다면, 이제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광장의 언어들”을 알 때에야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작점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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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서

 

흔히들 하는 말로 본론을 시작하자. 공화국을 뜻하는 영어 단어 republic의 어원은 ‘공공의 것’을 뜻하는 라틴어 res publica이다. 국어대사전은 “공공”을 “국가나 사회의 구성원에게 두루 관계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국가의 체제와 제도가 누구 하나에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에게 두루 관계될 수 있는 것, 그것이 공화국이다. 이런 말로 풀어 쓴 사람도 있다.

 

공화국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운용, 유지되는가? 간단하게 말해 공화국이란 사회적 갈등이 제도 정치의 영역에서 말과 협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체제가 아닌가? 말로 하자는 것, 제도권의 영역에서 말로 타협하여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체제, 그것이 바로 공화국이다. 그래서 공화주의자 안에는 사회주의자도 있고, 자유주의자도 있고, 보수주의자들도 있을 수 있다. 공화주의는 철저하게 제도의 운용에 대한 형식적 문제이지 정책 내용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2

 

그런 점에서 한국은 공화국이 아니고, 아니었다. ― 저 글을 쓴 이는 공화국이었던 시기가 있다고 믿는 것 같지만 말이다. 단순히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혹은 그 이전의 정권들이 여론을 무시하고 소수의 뜻대로 권력을 휘둘렀음을 지적하려는 것은 아니다. 지역적으로는 호남과 강원을, 사상적으로는 진보주의자들을, 성적으로는 여성과 성소수자들을, 또한 장애인들을, 비-성인들을, 언제나 배제해 온 것이 한국의 역사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들은 여지껏 “두루 관계되지” 못했던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다. 그러나 이들이야 말로, 모두가 ‘우리’ 안에 안주하고 있을 때, 무엇이 문제인지를 끊임없이 제기해 온 주체들이었으며 ‘우리’를 구성하는 전제와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함을 이야기해 온 이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를 빼고 나면 우리는 ‘박근혜 이후’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기가 어렵다. 박근혜를 하나의 오점으로 생각하는 한, 그 오점을 지우면 그 이전으로 돌아갈 뿐이다. ‘포스트-박근혜 시대’가 저절로 열리는 것은 아니다.

 

다른 무언가를 상상할 줄 모르는 한, 남는 것은 여전히 죽어 있는 공화국 뿐이다. 앞에서 인용한 대로 ‘공화주의는 철저하게 제도의 운용에 대한 형식적 문제’라면, 공화국은 영원한 거짓말이다. 제도에 누가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 누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않는 한 말이다. “박근혜 이후”를 말하는 사람은 많다. 기득권 정치인들에게 어떤 처세를 권하는 이도, 새로운 경제 정책 기조를 제안하는 이도 있다. 언론에 한 줄 글이나마 실을 수 있는 이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그러나 여전히 형식 민주주의 제도의 보완, 경제 양극화 완화 같은 선에 머문다.그럴수록 우리는 더 많은 광장의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박근혜라는 오점을 지우는 걸레질이 아니라, 박근혜 이후를 그리는 붓질을, 박근혜 이후를 조각하는 망치질을 해야 한다. 하야해야 할 것은 박근혜라는 한 명의 권력자가 아니다. 그 권력을 유지하는 모든 것들 ― 권위주의, 군사주의, 가부장주의, 개발주의, 지역주의, 반공주의 등등을 함께 허물 언어를 우리는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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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광장의 언어

 

시위는 축제다. 그러나 그저 구경하면 되는 축제는 아니어야 한다. 구경거리가 많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구경꾼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연자 자신을 위해서여야 한다.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해야 한다는 뜻이다. 박근혜 퇴진이라는 텅 빈 말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박근혜 이후를 고민하는 꽉 찬 말을 내어 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승만의 시대에, 박정희의 시대에 머물러 있다. 어느 것 하나 청산되지 않은 역사에서, 우리의 상상력은 어쩌면 빈곤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더욱 말하려는 것이다. 상상해야 함을, 미래를 구상해야 함을.

혹자는 말한다. “광장은 앙시앵 레짐을 해체할 수 있지만, 새로운 제도를 설계하지는 않는다"고. 그는 그래서 직업 정치인들에게 지혜를 요구한다. 그러나 새로운 제도를 설계하지 않고 - 비록 그것이 법적인 용어들로 정제된 것은 아니라 해도 - 어떻게 앙시앵 레짐을 해체할 것인가? 프랑스의 군중은 왕을 처형했다. 그것은 단순히 구시대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왕이 없는 새 시대를 여는 행동이었다.

장애인 혐오 없이, 여성 혐오 없이 박근혜를 내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장애인 혐오 없고 여성 혐오 없는 새로운 체제를 여는 일이다. 혐오 없는 언어로 말한다는 것은 그 언어가 통용되는 하나의 세계를 여는 일이다. 그 시작은 광장 한 구석의 작은 무리일지언정, 그것이 무대에 전해지고 시위에 참여한 ‘동료’들에게 전해질 때,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체제를 여는 언어가 될 것이다.

그래서, 광장의 언어를 이야기하기로 했다. 침묵하며 무대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이따금 텅 빈 구호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언어로 이야기하기를, 각자의 새 시대 구상을 내어 놓기를, 그래서 토론하기를 바랐다. 박근혜 이후의 시대를 또 다른 구세력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 자신이 새로운 세력이 되어, 새 시대를 맡아야 한다. 우리의 언어로, 더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살아 정치가 되는 새로운 ‘광장의 시대’를 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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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명림, 「민주공화국의 부활은 광장에서…사실상의 하야와 헌법적 하야」, 《한겨레》 , 2016.11.11.텍스트로 돌아가기
  2. 엄기호, 「공화국의 죽음과 새로운 시민의 탄생」, 《프레시안》, 2009.06.05.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