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12월, <노나메기> 기고글

 

국어사전에 '스승'이란 '자기를 가르쳐 주는 사람. 사부(師傅). 선생. 함장(丈)'이라고 나와있다.

나를 가르쳐 준 '스승'에 대해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니 막막해졌다. 도대체 아무도 떠오르지를 않는다. 내 삶이 길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30년 넘게 살아오면서 떠오르는 '스승'이 없는 것을 보니 '내가 참 복이 없나보다'라는 어리석은 생각까지 든다.

그러나, 어찌 내가 스승 없이 이만큼 자랐겠는가. 돌이켜보니, 내 주위에는 진정한 올바름에 대해 가르쳐주고, 또 나를 일깨워주는 스승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내가 스스로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아닐까. 배우기보다 가르치려들고, 받아들이기보다 내치고, 따라하기보다 헐뜯고, 그러다 보니 나이 서른이 넘도록 나의 정서와 의식이 풍성하지 못하고 이처럼 앙상한 것은 아닐까.

덜컥 겁이 난다. 온전치 못하고 앙상하나마 지금껏 평탄하게 세상을 살아올 수 있었고, 이후로도 나를 풍성하게 가꿔나갈 수 있는 지혜를 나에게 가르쳐 준 사람들을 나는 잊고 살아왔던 것이다.

 

내 가까이 있는 사람들, 그들은 모두 나의 스승들이다.

 

내가 일하는 사무실 옆에 해장국집이 있다. 지금은 그만두었지만 몇 달 전까지 그 밥집에서 일하는 청년이 있었다. 내가 그 집에서 몇 차례 밥을 먹으며 그와는 얼굴을 알아볼 사이가 됐다. 밥 먹을 때 어깨 넘어 듣자하니 그는 낮에는 해장국집에서 밤에는 PC방에서 일을 한다고 한다. 그때는 '젊은 나이에 참 고될텐데 표정은 늘 밝구나'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사무실 근처를 오가며 철가방을 실은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다니는 그를 종종 보게 됐다. 그는 그때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누나, 안녕하세요"라고 아는 체를 했다. 언젠가는 어두운 표정으로 혼자 앉아서 해장국을 퍼먹고 있는 내게 와서 "누나 일하는 곳은 많이 힘든 데죠?"라고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의 표정은 너무도 밝고 화사해서 난 문득문득 놀라기까지 했다.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하고, 그는 나를 잘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로부터 '따사로움'을 배웠다.

 

버스를 타고 다섯 시간 정도 가면 우리 집이 있다. 아니, 부모님의 집이 있다. 서울에서 사는 나는 바쁘다는 이유로 시골집에 1년에 한두 번 명절때나 찾아간다. 집에 가면, 난 서울에서 무척 힘들었다는 듯이 두 다리 죽 뻗고 누워서 책을 들춰보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잠을 잘 뿐이다. 엄마가 밥상을 내오면 자연스레 일어나 먹고, 다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잠을 자고, 다시 엄마가 깨우면 일어나 밥을 먹는다. 행여 밖에서 아빠가 같이 고추를 따자고 부를라치며 "이따가요~"라는 한마디만 내던진 채 다시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모니터에 눈을 처박는다. 다시 서울로 올라올 때, 부모님은 '전화 자주 하라'는 다짐을 몇 번이나 받지만, 서울행 차를 타고나면 다 잊어버리고 만다. 결국 부모님이 전화를 걸고, 난 "지금 바빠요. 다시 전화할게요"라고 한다. 그렇지만 엄마, 아빠는 서울 나들이를 할 일이 생기면 내가 무거워서 싫다고 두고 온 김치며, 고추장이며, 집에서 딴 호박 따위를 싸고 지고 올라오신다. 그런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배웠노라고, 말만 뇌까리는 것이 얼마나 싸가지 없는 짓인 지 안다. 그렇지만, 나는 엄마 아빠한테 '사랑'을 배웠다. 그러나, 아직 나는 그 '사랑'을 부모님께 되돌려드리지 못하고 있다.

 

몇 달 째 싸우고 있지만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도리어 경찰이며 깡패들한테 잡혀가거나 두드려 맞을 뿐인 장기투쟁을 벌이는 노동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지치지 않는다. 아니, 지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쳤다고 해서 그만두거나 흩어지지 않는 것이다. 길게는 서너 달, 더 길게 삼사 년이 넘도록 투쟁을 벌이지만 결코 포기하거나 배반하지 않는다. 그런 동지들이 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해서도 굳센 팔뚝을 번쩍번쩍 들어올리며 목청껏 구호를 외친다. 농성하느라 한겨울 차가운 길바닥에서 한데 잠을 자도, 쓴 소주로 허허로이 몸을 덥힐 뿐 슬쩍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나지는 않는다. 나는 그 동지들로부터 '노동자'를 배운다. 나는 그들에게 모름지기 노동자의 진정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배운다. 그들의 삶에 계급이 있고, 전투가 있고, 민주주의가 있고, 그리고 동지가 있다.

 

경기도 마석에는 모란공원이라는 묘지가 있다. 그곳에는 많은 동지들이 있다. 평범한 노동자들을 노동운동의 길로 이끌어낸 노동자 전태일도 있고, 파업투쟁을 벌이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동지들 곁을 떠났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회보험노조 최진욱 동지가 있다. 민주노총 건설을 위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하다 병을 얻어서 숨을 거둔 동지들은 유구영, 최명아, 정성범, 한경석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자신이 속한 현장에 충실했고, 어찌 보면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르렀고, 그러나 지금도 우리 곁에서 어깨 걸고 있는 그들로부터 나는 '긴장'을 배운다.

 

그리고 마석에는 또 한 동지가 있다. 덩치가 컸고, 손이 컸던 만큼 배포도 컸고, 가슴이 넓었던 그는 주위 동지들을 일깨우는 힘도 컸다. 백기완 선생이 "여기, 원통한 종배가 눈을 뜨고 누웠구나"라고 했던 것은 그의 떠난 빈자리가 그만큼 컸고, 또 그의 떠남이 그만큼 원통했기 때문이리라. 두 눈 부릅뜨고 노동현장이 좁다고 돌아다녔던 그는 늘 일을 짊어지고 살았지만, 일에 찌들어 힘든 표정이 아니라, 살아있는 눈과 생기 있는 낯빛을 가진 사람이었다. 늘 새로운 일을 만들어냈고, 즐겼고, 실패하면 좌절하는 게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다시 했다. 그래서 그와 눈을 한번이라도 맞춰봤거나, 그의 일하는 모습을 한번이라도 눈여겨봤거나, 그와 소주라도 한잔 같이 마셔본 사람들은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노동해방'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그의 '육체'를 늘 피로하게 했고, 어처구니 없게도 피로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나태하지 않았던 그의 '건강'한 품성이 그를 느닷없는 사고로 몰아넣었다. 지금 그의 육신은 썩어서 마석에 누워있지만, 여전히 나는 그로부터 진지하고 경직되지 않고, 여유롭지만 타협하지 않는 '노동운동'을 배운다.

 

나의 스승들은 어딘가에 또 있을 것이다. 그 많은 스승들은 나에게 그 많은 것들을 가르쳐줬다. 그런데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나는 아직도 여기 이 곳에서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그 스승들의 가르침은 그치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잠시 어깨가 스쳤던 스승도, 나와 함께 같은 일을 하며 같은 길을 가는 스승도, 육신은 비록 먼저 떠났지만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스승도, 모두 내 곁에 있는 스승들이다. 그 스승들이 아직 내 곁에 있는 이유는 내 '배움'이 모자라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내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려 할 때, 나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주고, 또 그 길을 똑바로 걷는 법을 가르쳐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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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5 01:03 2005/06/05 01:03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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