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3월, <텍스트> 기고글

 

이거 너무 유식(遊識)한거 아니야?

 

텍스트를 읽다보면 주눅이 든다. 창간준비호에서 텍스트는 분명히 자기네들이 ‘지식이나 인식의 깊이란 것도 한낱 평범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고 의뭉을 떨었었다. 거, 사람들 참 겸손하네, 나 자신은 평범에서 많이 떨어지는 수준이라는 점을 일찌감치 자각한 터인데도, 텍스트의 말만 믿고 “음, 가히 같이 읽고 같이 고민할 만 하겠군”이라 믿었다.

 

어느덧, 창간호하고도 벌써 두 권의 텍스트가 점점 불어나는 두께를 자랑하며 내 책꽂이에 꽂혔다. 텍스트가 책꽂이에 늘어갈수록 나 자신의 ‘지식이나 인식’이 평범보다 얕아도 한참 얕다는 점만 분명하게 확인해갈 뿐이다.

 

빌어먹을~ 기자들이 미워진다. 그 많은 책들을 다 읽었다는 것도 얄미워 죽을 지경인데, 그것을 읽고 소화도 마쳤는지, 그럴듯하게 ‘리뷰’하고 있다. 추켜올리는 듯 하다 메다꽂고, 한없이 쓰린 감수성을 따라가다 느닷없이 현란한 수식어들이 춤을 춘다. 차라리 단순하게 ‘주장’만 하고 물러난다면 좋으련만. 그토록 난해하다면, 재미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제목이나 편집에 이끌려 이쪽 저쪽 펴봐도, 내용으로 들어갈라치면, 또다시 느껴지는 ‘지식이나 인식’의 얕음.

 

‘영화매거진’은 ‘영화’라는 게 당초 재미있기 때문에 절로 재미있는 걸까? ‘북’이 재미없어서 ‘북 매거진’도 절로 재미없는 걸까? 아니, 이게 정말 ‘재미’만의 문제일까? 영화잡지를 보고 어떤 영화를 영화관 가서 혼자 볼지, 누군가와 같이 볼지, 비디오로 빌려다 볼지, DVD가 나오기 기다릴지 따위를 정리한다.

 

책이 있다. 그리고 가끔 지면을 조금 나누어 그럴듯하게 소개해주는 신문이나 잡지가 있다. 그렇지만 이거야 원, 기갈스러워서. 책을 사볼지, 빌려볼지, 밑줄 쳐가며 볼지, 친구랑 강독이라도 할지, 아니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딴 사람들도 못 보게 말릴지, 그런 것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북 매거진’의 위상을 너무 천박하게 이해하고 있나?

 

건 그렇고, ‘짧은 리뷰’는 제일 속 편한 꼭지다. 그런데 궁금해진다. 기자들은 원고지 두 장도 안될 이 ‘짧은’ 리뷰 쓰려고 그 책들을 다 읽었을까? 또, 출판을 둘러싼 상품, 유통, 시장, 그 모든 것에 대한 불만으로 똘똘 뭉친 듯 보이는 ‘텍스트’도 ‘짧은 리뷰’를 보면 다 칭찬(?)인데, 진짜로 좋은 책들일까. 좋은 책만 골라서 쓰는 것인지, 아니면 ‘짧으니까’ 딱 한번 눈감고 추켜주는 것인지. 난 사실 그 ‘짧은 리뷰’로는 텍스트의 속내를 짐작할 수 없다.

 

텍스트는 언젠가 ‘연애든 소설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컴퓨터 게임이든’ ‘팽팽한 지적긴장’을 오래도록 같이 즐기자며 노골적으로 독자를 유혹했다. 좋다. 그렇다면 질문 있다. 지금 마지막 권을 읽고 있는 장편소설을 끝내고 나면 난 그 다음에 어떤 책을 집어들어야 하는가. 아니, 내가 집어들어야 할 책의 제목은 무엇인가.

 

이황미/<노동과 세계>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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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5 00:43 2005/06/05 00:43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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