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렀다. 3월21일이면 벌써 박현정동지 49재란다.

때를 맞추어 박현정동지 추모사업회 발족식도 한다고 한다.

그날 울산에 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추모글로 대신한다.

 

"좋은 사람, 이제는 편안하세요"

 

“도옹지요오~” 문득문득 멀리 울산에서 전화가 걸려온 날은 박현정 동지가 술 한 잔 얼콰하게 걸친 날이었습니다. 나도 여기 서울서 한 잔 하던 날이면 전화기 붙들고 서로 허공으로 술기운 날리며 수다를 떨었습니다. 때론 바쁘다는 이유로 “다음에 전화할게요” 하며 그의 목소리를 ‘툭’ 끊어버린 날도 있습니다. 나중에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고 “또 술 드셨으려니~” 넘겨버린 날도 많았습니다.

박현정 동지의 목소리를 한 달에 한 번, 두 번 정도 들었을까요. 늘 저의 안부를 챙겨줬던 동지입니다. 아니지요. 박 동지는 저의 안부를 챙겼던 동지가 아니라 ‘모든 동지’들의 안부를 챙기던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난해 11월, 내가 노동해방선봉대원으로 울산을 찾았을 때 박현정 동지는 어김없이 투쟁에 결합해 있었습니다. 뒤풀이까지 모든 일정이 끝난 뒤 “밖에 나가서 한잔 더 하자”고 전화가 걸려왔는데, 안된다며 또 ‘툭’ 끊었네요. 다음날 눈을 흘기며 “와~, 나를 씹었다 이 말이재”라고 농을 걸었었죠. 그 뒤로도 현대차비정규투쟁 때문에 울산에 족히 네댓 번은 더 내려갔었나 봅니다. 그때마다 박 동지는 투쟁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아, 왜 그때 손 흔들며 웃기만 했을까요. 왜 깃발을 걸려고 엉거주춤하고 있는 저에게 내미는 청테이프를 답삭 받기만 했을까요. 왜 쪼르르 좇아가서 지난번 못 마신 술, 오늘 한잔 하자고 매달리지 않았을까요.

처음엔 몰랐습니다. 박현정 동지가 그렇게 ‘좋은 사람’인 걸 몰랐습니다.

2004년 민주노총 조직실에 있을 때 장투사업장 투쟁을 담당하면서 박현정 동지를 만났습니다. 회의에 온 박현정 동지는 길어지는 회의를 지루해 하는 인상 험하고 까칠한 경상도 동지였을 뿐입니다. 회의에서 서울역 농성을 결정했죠. 몇 년째 투쟁하고 있는 사업장 동지들이 모여서 딱히 성과가 있을까 싶은 투쟁을 이어가던 힘든 농성이었습니다. 종로에서 쇠사슬 걸고 1인 시위 하다가 경찰이랑 몸싸움도 했고, 연대대오가 아무도 없어서 광화문에서 20여명 앉아 재미없는 집회를 하기도 했고, 곳곳에 흩어져서 선전전을 하기도 했습니다. 박현정 동지는 늘 마땅찮다는 표정으로 꾀를 부리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죠. 그런데, 실천에서는 절대 그렇지가 않더라는 겁니다. 그가 움직이는 손과, 발, 몸은 절대 꾀를 부리지 않더라는 겁니다. 어느 비 내리던 주말, 선전전 가지 말고 소주나 한잔 하자는 그의 넉살좋은 ‘투정’ 덕에 천막에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 들으면서 막걸리에 오뎅국물 퍼먹으며 웃음꽃을 피웠던 추억까지 만들었네요.

그를 처음 만난 그 투쟁에서 알게 됐습니다. 늘 장난스러운 표정이지만, 그 얼굴 뒤에 세심함, 치열함, 고민, 동지에 대한 배려, 그 모든 것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긴 농성을 끝내고 울산으로 내려가던 날, 박 동지는 환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효성해복투 방송차에 올랐습니다. 성과는 없이 고생만 지지리 하다 떠나는 그 발걸음이 뭐 그리 가벼웠겠습니까. 이번에도 그 표정 뒤에 설움과 결기를 숨겨두었던 게죠.

그때부터, 박현정 동지는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빼놓지 않고 저에게 전화를 합니다. 저도 울산에 내려가면 연락을 했죠. 박일수열사투쟁 때, 일머리를 몰라서 병원 영안실에 박혀있는 나를 불러내 삼계탕을 사주며 격려해주던 사람도 그였고, 다른 일정으로 들른 울산에서 전화받자마다 득달같이 달려 나와 매운 닭볶음 권하던 사람도 박 동지입니다. 아, 구구절절 이야기해봤자 그의 웃음만 떠오를 뿐입니다. 더 이상 전화는 걸려오지 않습니다.

전 멍청하고 게을렀습니다. 늘 박현정 동지가 안부를 물어오면 그제야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박 동지의 ‘사람다운’, ‘사람을 챙기는’ 천성을 일찍 눈치 채지 못한 저는 멍청합니다. 다른 사람을 챙기느라 정작 자신을 챙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저는 멍청이입니다. 천성이 게으른 저는 동지에게도 게을렀습니다. 게을러서 동지를 챙길 줄도 몰랐습니다.

지난 1월, 간만에 울산에 눈이 많이 내렸다지요. 박현정 동지한테 이른바 ‘멀티메일’이라는 게 왔습니다. 눈 쌓인 동네를 찍은 동영상이었습니다. 동지를 넉넉하게 챙길 줄 알고, 세상을 따스한 눈길로 둘러볼 줄 아는 박 동지는 가슴 속에 동지들과 세상을 향한 사랑만 가득 채운 채 아픔도 설움도 애써 외면했나 봅니다. 그가 외면한 아픔과 설움을 우리가 봤어야 하는 거였는데... 이제는 늦었습니다. 그런데도 박현정 동지는 아직도 다른 동지들이 밥은 먹고 다니는지 걱정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부질없는 다짐을 해봅니다. 박현정 동지에게 못 건넸던 따스한 손길과 눈길을 이제 남은 우리라도 꼭 나누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런 모습 보면 박현정 동지가 “야야, 철들었나보네~”라면서 또 입가를 약간 올리며 눈을 흘기듯 웃을지 모르겠네요.

박현정 동지가 남긴 것을 다 쓸어안기엔 내 품이 너무 비좁기만 합니다. 소주한잔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려서 서럽기만 합니다.

그래도, 그래도 박현정 동지! 이제 편안하세요. 세상이 더러워도, 꽃 같은 아내가 눈에 밟히고 아들놈 속살에 찬바람 스며들어도, 철없는 동지들이 여전히 정신 못 차려도, 제발, 이제는 편안하세요.

멍청하고 게으른 저는 아직도 이렇게 동지에게 ‘부탁’ 말고는 해드릴 게 없네요.

 

2011년 3월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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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6 16:48 2011/03/16 16:48
Posted by 흐린날

<미디어충청(7/23)에 쓴 글>

                      


촛불에 휩쓸려 오늘도 간다, 즐기자! 싸우자!

촛불시위를 보면서

 

촛불시위가 시작된 것은 이미 봄부터였다. 벌써 한 계절을 보내고 석 달째 접어든다. 서울시청은 물론이려니와 전국 곳곳에서 촛불시위가 한창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촛불분석’도 한창이다. 고명하신 비평가들과 활동가들이 너도나도 ‘촛불이란~’ 화두를 주장자처럼 들고 나섰다. 나는 사실 분석에는 젬병이다. 나는 분석은 그만두고, 그냥 촛불에 휩쓸리련다.

 

5월, 촛불이 모이기 시작됐다. 그러려니 했는데, 촛불은 거리로 나섰다. 난 그제야 스르륵 대열에 합류했다. 고백컨대, ‘한낱 촛불로 무슨?’이라는 과격한 운동권다운 촌스러움과 조급함, 그리고 오만함이 없었다고 말 못한다. 세종로와 을지로, 종로와 안국동에 넘쳐나는 촛불을 내 눈으로 보니, 아! 내 짐작 범위를 넘어서는 진짜 데모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매일 행진방향도 기조도 다른, 시위 참가자도 시위를 막아야 하는 경찰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가두투쟁. 나는 흥분했다.

 

나는 솔직히 광우병쇠고기 수입을 막아내겠다는 의지보다는, 그리고 의제를 확장해야 한다는 책임감보다는, 그 겪어보지 못한 데모질의 ‘재미’에 중독돼서 광장을 쏘다닌다. 이미 신자유주의가 다 집어삼켜버린 줄로만 알았던 한국 땅에 아직, 심지어 그토록 거대한 반동의 물결이 구비치고 있다는 ‘감동’ 때문에 광장으로 간다. 반동의 물줄기가 끊겨서는 안 되는데, 끝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에 내 몸뚱이 한 점 더 광장에 꽂아 넣는다.

 

이유는 그렇고, 광장에 가서는? 신비롭고, 재미나고 자유롭다.

촛불의 경건함이 신비롭다. ‘붉은 것만 보면 가슴이 뛰는’ 나에게 그것이 횃불이나 꽃이 아니더라도, 규모에서 밀려오는 감동 때문에 아직은 ‘촛불’이라도 좋다.

촛불들의 기발한 ‘조롱’은 너무 재미난다. ‘규탄한다!’ 정도가 최고의 규탄인 것으로 알았던 나에게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고’ ‘냉큼 물러가시오’라고 호통 치는 기발함이 재미있다.

자유롭다. 늘 ‘지침’을 묻고, ‘지침’대로 갔다가, ‘지침’대로 해산했던 나에게 주어지는 신선한 자유! 내가 떠난다 해도 남아있는 나를 대신할 수십만 수백만 개의 촛불이 있고, 다 떠난다 해도 떠난 촛불들을 대신해 고작 백여 명과 함께 신호등을 따라 건너면 그것이 바로 ‘투쟁’이다.

그 어떤 종류의 촛불 찬양에도 동의한다. 무조건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가끔, 아니, 자주 불편하다.

나는 왜 불편한가. 광장에서 매번 터져 나오는 ‘비폭력’을 호소하는 구호 때문에 편치 않다. 그 ‘비폭력’ 구호가 경찰병력을 향하든, 시위대를 향하든 불편하다.

대중적 저항이 폭발하는 상황에서 정권이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다. 대중에게 굴복하든가, 아니면 제압하든가. 이명박 정권은 작심하고 제압에 나섰다. 무엇으로? 폭력으로. 그 폭력에 굴복하지 않고 버티고자 한다면 충돌은 불가피하다. 비폭력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방법이 있다. 굴복하면 된다. 촛불시위를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폭력은 일어나지 않는다. 왜? 제압된 뒤에 폭력은 필요 없다. ‘평화’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값싸고 질 좋은 미국에서 건너온 쇠고기를 실컷 먹으면 된다. 아이들은 눈 비비며 0교시 수업을 듣고 일류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밤새 코피 터지게 공부하면 된다. 물, 가스, 전기 다 돈 많은 자들에게 팔아치우고, 산동네에서는 등잔불을 밝히고 장작을 때면 그뿐이다. 많이 아플지라도 엄감생신 병원 따위 꿈꾸지 말고 조용히 삶을 정리하면 ‘평화’롭지 않은가.

 

그렇지만 나는 ‘비폭력’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할 생각은 없다. ‘비폭력’을 외치는 그들도 역시 나에게는 촛불을 들고 나온 ‘광장에서의 동지’ 들이다. 다만, ‘비폭력’을 강요하지 말라. 비폭력과 폭력의 공존! 그것 역시 촛불시위의 매력 아닌가. 우리가 휘두르지 않아도 충분히 이명박은 ‘폭력’을 휘두르고 있으니까.

 

양쪽 다 폭력을 쓰지 말라고? 그건 반칙이다. 운동경기에도 규칙이 있고, 화투판에도 룰은 있다. 제각기 곤봉과 방패, 사진기, 소화기로 무장하고, 집단적으로는 물대포와 우리를 경찰서로 실어갈 닭장차까지 갖추고 나온 저들과 달랑 촛불 하나 들고 나선 우리. 양쪽에 똑같이 ‘비폭력’을 요구하는 것은 애당초 반칙이다. 저들이 소화기를 뿌려댄다면 우리에게는 분말을 걸러줄 마스크 정도는 필요하다. 그러나 마스크로는 소화기 분말의 0.1%도 걸러지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도 소화기 분말로 되갚아야 한다. 방패와 곤봉으로 찍어댄다면 우리 몸을 보호할 각목 정도는 있어야 한다. 물론 쇠파이프가 더 안전하지만. 저들이 물대포를, 그것도 색소와 최루액까지 섞어서 뿌려댄다면, 우리는 소화전이라도 뽑아 들어야 맞다. 저들에게 지휘체계가 있다면 우리에겐 ‘신념과 의리로 뭉친 죽음도 함께하는 동지’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차바퀴에다 고작 밧줄 한 가닥 묶은 것을 보고 ‘위험하다’고 오버하지 말자. 저들이 와이어철근으로 버스 뒤쪽을 단단히 묶어둔 것을 다 보지 않았나. 그 밧줄은 폭력이 아니라 우리를 흩어지지 않게 얽어주는 연대의 끈이다. 경찰차 유리창 조금 부셨다고 ‘하지 말라’고 고함치지 말자. 저들은 우리의 머리통도 박살내지 않던가. 그 유리를 깨뜨린 망치는 이명박 정권의 방자함을 깨뜨릴 민중의 주먹이다.

그 답답한 차벽, 뚫고 청와대로 달려가 이명박에게 한껏 되갚아주고 싶은 심정, 모두 알지 않은가. 똑같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정말 없어져야 할 폭력은 따로 있다.

연행된 사람들을 되찾겠노라고 경찰병력을 밀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비폭력’을 들이대며 뜯어말리는 폭력, 울분을 참을 수 없지만 용기가 없어서 쓴 소주 한잔 마신 뒤에야 차벽에 올라가 고함 한 번 쳐보는 사람에게 ‘내려와’를 외치는 폭력, 명박산성을 조롱하며 스티로폼 위로 올라서는 사람들에게 위험하니 지켜주겠노라고 끌어내리는 예비군의 폭력, 청와대로 가는 대열을 향해 ‘동대문으로 가자’고 선동하는 마이크의 폭력, 살수가 시작되자마자 물대포의 사정거리 밖으로 한참 벗어나 안전지대에서 깃발을 휘날리는 민주노총과 광우병국민대책회의 지도부의 폭력,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촛불을 들고 나왔다는 어른들이 되레 아이들에게 ‘밤이 늦었으니 돌아가라’고 타이르는 폭력, 대치상황에서 위험하니 여자들은 뒤로 빠지라고 고함치는 폭력, 남자들이 뭐하는 거냐며 빨리 나와서 몸싸움을 하라고 다그치는 폭력.

 

노동자들을 때려잡는 데는 애써 외면하던 우리가 왜 갑자기 ‘평화주의자’가 됐는가.

코스콤에서 일하는 비정규직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쫓겨났다. 그들은 일터로 돌아가고 싶다며 일하던 회사가 있는 증권거래소 앞에 천막을 쳤다. 여섯 달을 넘기던 지난 3월11일 새벽, 경찰병력과 용역깡패 수백 명이 천막을 부수고, 농성 중이던 노동자들을 마구잡이로 두들겨 패며 몰아냈다. 천막을 지키려고 쇠사슬을 묶고 저항하는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폭력적인가?

버스도 지하철도 택시도 자유롭게 탈 수 없고, 그나마 맘먹고 길을 나서려면 따가운 눈총 아니면 측은해하는 동정을 받아내야 하는 중증장애인들, 장애인의 날 하루라도 그런 사정을 널리 알리겠다며 강변북로를 점거한 장애인들은 폭력적인가?

깨끗한 서울을 만들겠다며 오세훈 서울시장이 엎어버리고 깨버린 좌판을 다시 추슬러서 거리에 나와 밥값을 벌겠다는 노점상들은 몹쓸 폭력배인가.

그들이 폭력적이라고 한다면, 나는 차라리 촛불을 끄겠다고 쏘아대는 물대포와 촛불을 향해 휘두르는 방패가 ‘평화’라고 말하겠다.

 

그러나 나는 내가 촛불시위에 참가하면서 느끼는 이런 불편함을 대중에게 호소할 생각은 없다. 왜? 나 같은 부류 때문에 불편할 사람들이 역시 있을 테니까. 나의 불편함 때문에 그 촛불시위를 그만두고 싶지 않으니까. 난 나의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촛불시위가 계속 이어졌으면 하니까. 언제까지? 이 사회를 말아먹은 정권을 말아먹을 때까지.

 

난 믿는다. ‘비폭력’을 외치는 나의 동지들이, 나 같은 자에게는 한 움큼 폭력성을 쥐어줬노라고. 모두의 생각이 같을 수도 없고, 같을 필요도 없다. 요구와 전술이 모두 같을 수도 없고 같을 필요도 없다. 한 가지만 같으면 우리는 광장에서 만날 수 있다. 비폭력이라고? 그럼 비폭력으로 하라! 나는 폭력적으로 하겠다. 그러나 나를 ‘평화’의 길로 인도하지 말라. 동지의 비폭력과 나의 폭력이 광장에서 만나 이명박 정권을 깨뜨릴 것이다.

 

아, 내가 촛불에 미쳐버린 이유를 하나 빼놓았다. 내가 역사 속에 있다. 내일이면 역사가 될 ‘오늘’ 촛불시위에 내가 있다. 내가 드디어 역사 속에 제대로 풍덩 빠져버렸다. 흘러내린 촛농이 쌓이고 쌓여 내 몸뚱이를 광장에 굳혀 버렸다.

오늘도 간다. 즐기자! 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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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4 14:16 2008/07/24 14:16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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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긴 썼는데,,,

2007/11/22 02:20

철폐연대로부터 원고를 써달라는 말을 아주 정신없을 때 들었다.

난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원래 동지가 쓰는 걸로 돼 있었어요~ 잊어먹고 말을 못했지만~"이라고 한다.

참 당황스러운 상황이지만, 일단 알았다고 전화는 끊었다.

마감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뭘 쓰랬더라? 더듬어보니,

"나에게 전태일은?"이라는 것 외에는 들은 기억도 없다.

정해준 마감을 며칠 넘기고, 더 이상 미루면 안될 것 같아서

코스콤비정규 동지들 동조단식 가기 전, '날림(?)'으로 써서 원고를 넘겼다.

원고도 날림으로 넘기고, 동조단식투쟁 출정식도 20분이나 지각했다.

구지 위로하자면, "시간이 더 있었다고 잘썼겠느냐"는 거~

 

아직 질라라비가 활자로 나오기 전이지만, 일단 여기 복사해둔다. 



내 옆에 있는 동지가 '전태일'입니다


나는 밝은 얼굴의 여성노동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게 참 좋다. 그녀와 함께 가고 있는 그 곳이 투쟁 현장이라면 그와 관련한 이야기를 해도 좋고, 관계없는 수다를 떨어도 좋고, 그녀가 말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냥 걷기만 해도 좋다. 그녀가 내 팔짱을 끼고 앞서가면 끌려가듯 걸어가도 좋다.
나는 작업복 입은 남성노동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것도 참 좋다. 역시 그와 수다를 떨어도 좋고, 그냥 비실비실 웃기만 하며 걸어도 좋다. 그의 걸음걸이가 커서 성큼성큼 앞서 가더라도, 그가 입은 작업복 뒤의 반짝이는 안전띠를 보며 종종걸음으로 뒤따라가는 것도 좋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늘 또는 가끔 내 바로 옆에 있는, 그냥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쉽게 분노하고, 쉽게 좌절하고, 때론 얄밉고, 때론 존경스럽고, 가끔 날 짜증나게 하거나 또는 가끔 나를 감동시키는 그런 사람들이다.
한번도 직접 만나보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고, 눈인사만 하고 지나치는 사람일 수도 있고, 함께 밤새워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일 수도 있다.
그들은 내 자랑스러운 ‘동지’들이다.

지난 11월10일 오전10시, 노동해방선봉대와 함께 건설노조 인천지부 전기원분과 동지들이 집회를 하는 경인지방노동청 앞에 갔다. 정해진열사 영정과 함께 천막이 쳐져있는데, 동지들 표정이 어두웠다. 열사의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채 이제껏 어렵사리 싸워왔는데, 새벽에 잠정합의를 했다는 것이다. “유해성을 구속하라”며 제 몸에 불을 붙인 동지의 뜻을 이루겠다고, 추운 날씨 아랑곳없이 버텼는데 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곧 터질듯이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떨구는 그 동지들! 정해진열사 돌아가시던 날 한강성심병원 앞에서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 내 눈에서도 흐른다. 슬퍼서가 아니다. 분해서 눈물이 흐른다.

정해진열사는 지난 10월27일, '유해성을 구속하라'며 몸에 불을 붙였다. 그렇지만 열사가 목숨을 내놓고 원했던 그 뜻은 이뤄지지지 않은 채 결국 11월14일 장례를 치렀다. 2003년, 노동자들을 옭아매는 손배 가압류를 철회하라며 김주익열사가 목을 맸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찬 아스팔트바닥에서 투쟁하고 있는 동지들의 목을 바로 그 손배 가압류가 옥죄고 있다. 비정규직 철폐하라고 이용석열사가 몸에 불을 붙였지만, 지금도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철폐하라”고 외치고 또 외쳐야 한다. 나에게는 정해진열사가, 이용석열사가, 김주익열사가, 그리고 많은 내 동지들이 전태일열사다.

지금으로부터 37년 전, 전태일은 몸에 불을 붙이고, 온 몸이 타들어가면서도 이렇게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어느것 하나 해결된 것 없는 구호들. 전태일열사의 죽음을 헛되이하지 않으려고, 지금도 투쟁하고 있는 동지들이 있다. 가슴에 분노를 품은 그들이 바로 전태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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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2 02:20 2007/11/22 02:20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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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라라비 41호(2006년 8월호)에 쓴 글>

어렸을 적부터 이야기를 좋아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다 있었던 난 꽤나 유복했다. 심지어 외증조할머니한테까지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옛날 이야기나 옛 말들을 들려주셨던 그 분들은 다 돌아가셨고, 지금은 외할아버지만 살아계신다. 할아버지는 화투로 하는 표떼기를 가르쳐주셨다. 화투패에 담긴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운세 떼기는 물론 귀신같이 숫자계산을 해서 갑오표까지 떼는 것을 보고 동네 어른들은 나더러 '화투신동'이라며 놀리기도 했다.
한글을 깨치고 난 뒤부터는 이야기책을 끼고 살았다. 만화도 재미있었다. 내가 읽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한테 해주는 것도 신났다. 학기 초에 교과서를 받으면 그 날로 국어책은 다 읽어버렸다. 전과에 나오는 다른 이야기들까지 다 읽었다. 더 읽고싶었고, 머리가 커지면서 소설책을 읽었다.
불행히도(?) 지금은 드라마를 본다.
결혼도 안한 처지에 이상하게도 KBS2에서 하는 '부부클리닉-사랑과 전쟁'이 너무 재미있다. MBC에서 일요일 낮12시10분에 하는 '출발!비디오 여행'과 함께 방영시간을 외우는 딱 두개의 프로그램이다. 지금은 별로 시들하지만 전창걸이 '영화대영화'를 진행하던 때에 '출발~'은 참말로 재미났었다.
요즘은 사실 드라마 방영시간을 외울 필요도 없다. 언제라도 TV를 켜면 어디서든 드라마는 하고 있다. 특히 나처럼 저녁 늦게 들어가서 TV 전원을 켜면 50여개의 채널 가운데 어디서든 공중파에서 방영중인, 아니면 예전에 방영했던 드라마를 볼 수 있다. 처음 켰을 때 드라마를 하고 있으면, 난 날을 꼬박 새워 채널 돌려가며 볼 수 있고, 또 본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다들 알겠지만, 한국 드라마는 처음이든 중간이든 5~10분만 보면, 대강의 스토리라인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이른바 '안봐도 비디오'다. 그런데도 뚫어져라 본다. 욕하면서 보고, 키득거리면서 보고, 울면서 보고.
울면서 본 프로그램은 '명동백작'이 있다. 교육방송(EBS)에서 2004년 가을쯤 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한국전쟁 직후 예술가들이 몰려다녔던 명동의 정취를 참으로 맛깔스럽게 다뤘다. 난 '안식휴가' 중이었고 다행히 EBS는 인터넷으로 '다시보기'가 무료여서 보고 또 봤다. 담배와 술로 한평생을 살다간 공초 이상순 선생이 자신의 뒷모습을 그윽하게 쳐다보는 명동백작 이봉구를 돌아보며 "사람의 뒷모습을 그렇게 쳐다보는 게 아니야"라고 말한뒤 다시 고개를 돌려 가던 길을 쓸쓸히 걸어가는 장면에서 나는 너무도 서럽게 울었다.
혼자 낄낄거리며 본 것도 있다. 얼마 전에 종용한 '연애시대'를 보며 난 끊임없이 낄낄거렸다. 손예진을 '재발견'했고, '역시' 감우성이였으며, 공형진은 '짱'이었고, 이하나를 '발견'한 드라마였다. 그들의 대사 하나하나에 난 낄낄거리다가 훌쩍거렸다. 감우성이 손예진에게 프로포즈를 했다는 바닷가를 다시 찾은 네 사람. 손예진은 감우성이 기억하지 못하는 그 때를 떠올리며 이야기한다. 너무 추웠던 겨울에 그는 "내~ 따당을...바다에 맹데해...부더디는...파더에 맹데해..."라고 했노라고. 감우성은 민망해 어쩔 줄 모르고, 자지러지던 이하나. 공형진은 한술 더 떠서 "너! 평소에 맹세잘해?" 난 또 자지러졌다.
김수현이 썼다는 드라마는 주로 욕을 하며 본다. 하긴, '보고 또 보고' '인어아가씨' '왕꽃선녀님'에 이어 임성한이 섰다는 '하늘이시여'를 보면서도 욕 무지하게 했다. 그래도 김수현은 못 따라간다. 언젠가 김수현 인터뷰기사를 본 적이 있다. "왜 김작가님 드라마에는 잘난 사람들만 나오나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김수현은 "난 잘난사람이 좋다"고 했다. 그 기억이 너무 컸는지, 난 '잘난' 김수현이 너무 싫다.
20년 전, 나 고등학교 2학년때 '사랑과 야망'을 했었다. 그때의 태준이었던 남성훈은 죽었고, 미자였던 차화연은 뭐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그때의 태수 이덕화는 여전히 TV에서 볼 수 있다. 과수원여인 김청은 요즘도 '속청' 광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 때 '사랑과 야망'의 인기는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일요일날 자율학습하러 학교에 나가면 '사랑과 야망' 토요일분을 본 아이들 중심으로 그룹이 형성됐다. 50분짜리 드라마를 거의 50분동안 이야기했고, 그 주변에 10여명이 둘러앉았다. 말똥 굴러가는 것만 봐도 우습던 시절의 소녀들은 깔깔거리면서도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는 이덕화와 김청의 사랑이 이루어지기까지 얼마나 가슴아팠던가. 과수원에서 김청과 이덕화가 함께 빨래 한쪽씩을 부여잡고 짜는 모습을 볼 땐 가슴이 찡하기까지 했다. 엉뚱하게 끼어있는 정자가 정말 미웠다. 지금 보는 '사랑과 야망'은 어째 가슴이 아프지 않다. 도리어 정자가 얄밉다가도 불쌍하단 생각이 설핏 들 뿐이다. 과수원여자는 솔직히 재수없다. 남의 자식 둘 키우면서 어쩌면 그렇게 천사같은 표정인지. 정자 딸인 수경이가 ‘계모’에게 반항하는 걸 보면 문득, "하긴 누가 뭐래도 지 엄마가 좋겠지..."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야 간다'라는 드라마가 있다. 김미숙과 정보석의 애틋한 사랑이야기이던가. 김미숙의 동생 정선경은 아들, 오대규는 딸이 있는데 각각 이혼한 뒤 결혼했다. 두 아이를 같이 키우는 이 집에 정선경의 전 남편이 찾아와 초인종을 눌러대며 "내 아들 내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당황한 정선경이 남편을 쳐다보며 "어떻게 해..."라고 하니 남편이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당신 일인데"라고 한다. 처음엔 그걸 보며, ‘으휴, 한심해. 저걸 믿고 어찌 사나~’싶다가 가슴에 확 와닿았다. '그렇지. 대개 저렇겠지. 나라도 같이사는 남자의 전 부인이 찾아와 지 딸 내놓으라고 하면 내일 아니다 싶겠군~' 하는 생각이 든다. 간만의 리얼한 드라마 장면이었다.
그런가 하면 리얼하지도 않고 재수도 없었던 장면이 있다. 역시 김수현드라마 2006년판 '사랑과 야망'. 태준이 있는 공장에서 17명의 여성노동자들이 월급이 적다며 다른 공장으로 옮기려고 한다. 당장 생산량 맞추기가 힘들어진 태준은 다른 여성노동자 3명을 타일러서(?) 17명을 데리고 돌아오라고 한다. 여성노동자 3명은 17명 중 15명을 설득해서 데리고 돌아온다. 한낱 '월급 몇 푼' 때문에 오락가락하던 그녀들이 돌아오자, 공장을 지키고 있던 다른 노동자들이 다같이 달려나와 서로 부둥켜안으며 운다. 아~ 감동의 도가니. 태준은 그 전 방영분에서도 한 밥맛 했다. 청춘을 바쳐서 일한 회사에서 강등된 태준을 위로한답시고 덩달아 회장 욕을 해대는 부하직원에게 "그 분이 주시는 월급 받아서 가족 먹여살리면서 그 분을 욕할 수 있나? 계속 일하려면 침묵하고, 존경할 수 없다면 존경할 수 있는 사장이 있는데로 옮겨"라고 한다.
하긴, 한국 드라마에서는 징계절차 없는 '해고'가 언제든 가능하다. 그 사유라는 것도 보잘것없어서, 자기 남자(또는 여자)를 빼앗아간 사람, 가업을 이어받아야 할 딸(또는 아들)이 사랑하는 별볼일없는 사람에겐 “너 해고얏!”하면 바로 해고다.
요즘 101번째 프로포즈란 드라마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배우 이문식이 이 드라마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난 그 배우가 싫어졌다. 극 중 박달재는 방송국 비정규직 세트맨이다. 아나운서 한수정(박선영 분)을 너무 사랑해서 그녀를 위해선 뭐든 할 수 있을뿐더러 너무 착한 사람인데, 방송국에서는 정규직을 뽑는다고 한다. 박달재는 수정을 위해 정규직이 되고자 한다. 드라마에서는 수십명의 비정규직들로부터 근무평가를 받아 가장 좋은 점수를 받은 비정규직 딱 한명을 정규직으로 뽑아준단다.
콩쥐처럼 착한 비정규직은 정규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팥쥐같이 못된 것들은 평생 비정규직? 비정규직이 이젠 ‘천형’인가 보다. 콩쥐, 신데렐라도 모자라 이제는 착한 비정규직 타령이다.
리모콘 부여잡고 채널 돌려가며 이런 드라마들 꼬박꼬박 찾아보면서 깔깔거리고 흐느끼고 기암하는 내가 참말로 한심하다. '보고 또 보고'란 드라마도 있었는데, 난 '씹고 또 보고'다.
현실성 없다며 드라마들을 씹지만, 어쩌면 그런 드라마들이 제대로 현실적인지도 모른다. 말도 안되는 설정들! 말도 안되는 세상 아닌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가는 설정들! 상식 지키다간 지 한 몸 지키기 힘든 세상 아닌가.
그런 노래가 있다. “산타할아버지는 알고계신데 누가 착한앤지 나쁜앤지 오늘밤에 다녀가신데 잠잘때나 일어날때 짜증낼때 장난할때도 산타할아버지는 모든것을 알고계신데”
산타가 어린이들을 감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협박하는 것도 같아서 영 찜짐한 노래였는데, 이젠 비정규직노동자들도 감시당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 현실이 드라마에 반영된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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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30 21:38 2006/08/30 21:38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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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라라비...

2005/08/16 14:14

질라라비 2005년 7월호에..

책 첫머리에 들어갈 글을 썼는데,,,

(2005년 7월4일)

 

6월20일부터 시작된 국회 상임위는 비정규법안 처리를 둘러싸고 몸살을 앓았다.
당일 민주노총 투본대표자회의는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법안이 통과되면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이후 열흘동안 국회와 민주노총은 모두 혼돈이었다. 국회는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대표자들이 법안심사소위 회의실을 점거하는 바람에 회의를 열지 못했다. 날마다 회의가 몇시에 잡혔다가 몇시로 연기됐다더라, 다시 몇시로 잡혔다더라는 따위의 소식만 분주하게 전해졌다. 어쨌든 국회는 법안심사소위를 열지 못했고, 당연히 비정규법안도 처리하지 못했다.
그 시간 민주노총은 어떠했는가. '대기'중이었다. 예전에는 정문 들어가기도 쉽지 않던 바로 그 국회의 번드르한 회의실을 민주노총이 점거하고 있다고도 하고, 회의를 기어이 하겠다며 국회의원들이 들이닥쳤다고도 하고, 열린우리당이 강행처리를 하려 한다하고, '긴박'과 '비상'이 춤을 추었다. 그 와중에 민주노총 지도부는 정당 대표를 만나고 이목희를 만나러 다니느라 더욱 분주했다. 어떻게든 비정규법안이 정부와 자본가 입맛대로 통과되는 것을 막기 위한 대응이었다고 하니, 나름대로 입이 바작바작 탔을게다.
그런데 현장은? 현장은 몰랐다. 법안처리가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총파업 대기' 지침만 알았다. 내용을 모르니 간부들은 총파업을 조직해야 할지, 총파업 조직을 대기해야 할지 헷갈렸다. 그리도 비상하니 '대기'하라 했지만 그 흔한 국회 앞 집회 한번 없었다.
구지 속편하게 평가하자면, 파렴치한 비정규법안은 국회의원과 지도부가 막아냈고, 현장은 그냥 앉아서 '정부법안 철회'를 쟁취한 것인가. 민주노총은 줄곧 '비정규 권리보장 입법 쟁취'를 외쳤는데, 인권위원회 덕분에 뜽금없이 '수정안'을 갖게 된 민주노총 입장에서 보면, 정부 법안을 막아냈다는 것만으로도 자축해야 하는 것인가.
어차피 정부의 비정규법안은 9월 국회에 다시 상정된다. 그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난 6월14일, 충주지역 레미콘 노동자들의 노동3권을 보장하라는 집회 현장에서 한국노총 김태환 충주지부장은 경찰의 조장과 방조아래 회사가 고용한 대체 차량에 깔려 살해당했다. 김태환열사의 머리가 처참하게 깨졌을 때도, 정부가 국회에서 비정규법안을 마음대로 처리하려한 때에도, 부자들이 산다는 강남땅에서 우리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이 정해지던 때에도 민주노총 지도부는 '파업명령'이 아니라 '노사정 대화'를 요구했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인내력과 점잖음에는 박수를 보내지만, 그 인내와 점잖은 요구가 길어질수록 현장 조합원들은 하나 둘, 수십, 수백명씩 죽어나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더 이상 노동자들을 '지침'의 대상으로 만들지 말고 '파업투쟁'의 주체로 받들어야 한다.
정부와 자본가가 9월 국회에서 또 비정규법안을 가지고 흥정하다 처리해 버리면, 8백만 비정규노동자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정규직노동자들을 또 그 비정규노동자로 몰아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오로지 국회의원 탓으로 돌릴 것인가.
제발, 이제 요행을 바라지 말고 '투쟁'을 조직하자. 김태환열사의 명복만 빌지 말고 열사 정신을 계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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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16 14:14 2005/08/16 14:14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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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사람

2005/06/05 01:06

### 2004년 봄, 어딘가로부터 글을 부탁받고 쓴 글인데, 우여곡절 끝에 활자화되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 어떤 선생이 이런 말을 했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하지 말라.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다만 열심히 해라”

그때는 참 이상한 선생이라고 생각했다. 모두 최선을 다하라는 세상에, 최선을 다하지 말라니.

그런데, 최선을 다하는 건 정말 무서운 것이었다. 한 사람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떠났다. 아주 멀리.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버렸다. 그가 조금만 더 나태했더라면, 그가 조금만 요령을 피웠더라면,,, 가슴 쥐어뜯으며 억울해하지만, 그것은 내가 억울해 할 일이 아니다. 그가 떠나기 전에도, 그가 떠난 뒤인 지금도, 다른 사람들이 후회하며 되돌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는 떠나도록 되어있었나 보다. 왜? 그는 늘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지금은 번쩍거리는 통유리로 감싸인 건물들이 으리으리하게 들어선 서울 창신동 언덕배기. 1995년 11월말, 그곳에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사무실이 있다. 그곳에 김종배도 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전노협 마지막 대의원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정종을 좋아하는 그는 동원빌딩 5층 넓은 사무실 한가운데 놓인 난로 위 물이 보글보글 끓는 주전자 속에 정종 댓병을 박아두고, 틈틈이 홀짝거리며 회의자료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벌써 두병째다. 사무실 온기라고는 그 난로에서 나오는 미지근한 기운 뿐인데, 따뜻한 정종으로 추위를 견디며 전노협 해산대의원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마지막이고, 이젠 해산할 조직. 무에 그리 날밤 새우며 할 일이 있었냐고 묻지 마라. 1995년 겨울, 그는 그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모두들 새로 태어나는 조직 ‘민주노총’ 일구기에 여념이 없을 때, 그는 이제 사라질 조직 ‘전노협’에 파묻혀 있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다른 동지들은 이미 민주노총에서 새 보직을 받은 뒤였고, 일부는 벌써부터 민주노총으로 출근하는 때였다. 그래서 사무실은 더욱 넓어 보였고, 그는 남아서 전노협 해산대의원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누군들 사그러지는 조직 뒤치다꺼리가 내켰을까. 그러나 그는 다시 정종 한 잔…, 일이 지겨워서 들이키는 술이 아니었다. 술이 좋아 마신 술도 아니었다. 그가 전노협을 정리하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너무도 허접스러워 지금은 고물상에서도 받아줄 것 같지 않은 철제의자, 철제책상 따위의 개수 등을 헤아리며 전노협의 자산목록을 정리했다. 또 사업보고 한 자 한 자를 꼼꼼히 훑어봤고, 자료집도 그 어느때보다 폼나게 편집했다. 평가 내용 역시 어느 한 대목 대충 넘기지 않았다.

1995년 12월3일. 전노협 해산 대의원대회. 전노협 마지막 위원장 양규헌은 조합원들이 반듯하게 접어서 눈물 삼키며 전해준 푸른색 전노협 깃발을 가슴에 품었다. 연세대학교 강당은 살아 움직이고 실천하는 노동자들의 회한에 찬 슬픔으로 가득찼다. 전노협의 역사를 되새기니 서럽고, 박창수열사를 생각하니 억울하고, 지난 투쟁 한 꺼풀 한 꺼풀 모조리 목숨 건 일들이었다.

지나온 전노협의 역사에 김종배가 있었고, 그 김종배 역시 강당 한 구석에서 소도둑같이 큰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런 전노협과 김종배다. 함부러 전노협을, 그리고 김종배를 입에 올리지 마라. 그것은 역사다.

 


민주노총은 출범했고, 전노협은 해산했다.

모두 새로운 민주노총, 또는 산별연맹으로 발빠르게 자신의 운동 전망을 세워내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남았다. 물론 김종배동지가 남기를 원했는지는 알 수 없다.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는 일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림을 그려보려 해도 엄두조차 나지 않는 일, 그 일을 김종배가 시작했다. 전노협 자료를 정리하고, 전노협 백서를 쓰는 일이었다.

한때 전국의 주요한 투쟁을 지휘하며 책임졌고, 노동운동의 중심이었던 창신동 전노협 사무실, 이미 그 중심은 명륜동 민주노총 사무실로 옮겨간 뒤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갈 때는 짐짓 활기찼던 그곳이, 이제는 무척이나 을씨년스럽다. 구석에 박혀 쌓아진 자료는 수백상자였다. 그나마 상자라도 차지하고 있는 자료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 필사한 자료 낱장들이 흩어져 있고, 천장에서는 물이 새서 사무실을 눅눅하게 했고, 자료를 들추면 쥐들이 발빠르게 도망갔다. 옛날 책 곳곳에는 곰팡이가 번져있었고, 너무 방치되서 글씨가 뭉개진 자료들이 허다했다.

김종배는 그것을 치우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떠난 사람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아무도 돕지 않은 것을 섭섭해하지도 않았다. 아니, 혹여 원망하고 섭섭해 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그런 마음을 겉으로 드러낸 적이 없다. 남겨진 자료를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을 때, 그는 전국을 돌며 지노협과 단체 자료들을 모았다. 그리고 역설했다. 자료의 소중함과 기록의 중요함을 말하고 또 말했다. 그리고, 실제 종이쪽지 하나 소홀히 하지 않음으로써 보는 이들을 숙연케했다.

전노협 백서를 쓰고 운동사를 쓰자고 해산대의원대회 때 결의는 했지만, 주요한 지도부는 감옥에 있거나 새 조직 건설 때문에 바빴다. 자연스레 전노협 백서발간위원회는 조직적 지원과,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그래도 김종배는 묵묵히 함께 일할 활동가들을 모아냈다. 돈이 필요하면 돈도 끌어댔고, 자기 온 몸을 바쳤음은 물론이다.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그가 편안하게 등을 뜨신 방 바닥에 맡기고 잠들었던 날이 며칠이나 됐을까.

게다가 김종배는 그 빌어먹을 돈을 아끼기 위해 또 일을 벌였다.

 


뻔한 사업기금에 책장에 드는 비용 아끼겠다고 널빤지를 사다가 한쪽에서는 사포질을 해 나무먼지가 뿌옇게 일고, 한쪽 방에서는 페인트칠이 끝난 널빤지를 말리고 있었다. 그 일이 끝나면 못질을 하여 책장을 짤 모양이었다. 타자기나 지금은 사라진 전용워드프로세서로 작성된 문서는 파일이 없어 일일이 컴퓨터에 타이핑해야 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그 많은 자료들을 아둔하게도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본 끔찍한 장면 중의 하나였다. 분류가 끝난 자료는 달아나지 않도록 묶어야 하는데 그는 아교풀을 사다가 손수 떡제본을 하고 있었다. 그전에 기획사를 운영해본 경험이 있다지만 이 또한 끔찍했다.(차남호, 김종배 추모집 「꼭 필요한 사람은 늘 먼저 떠나는가」, “그리움 대신에 ‘긴장’을 남기는” 중에서)

 


우리는 미처 지나간 자료들의 가치를 몰랐고, 기록의 중요함을 몰랐던 때, 그는 그것들을 제 몸보다 귀히 돌보았다. 그리고 결국 일년 반 남짓해 전화번호부 책만큼이나 두꺼운 책 열 세권짜리 ‘전노협 백서’가 우리 눈 앞에 탄생했다.

 


백서팀이 쓴 발간사는 1980~90년대 동지들을 “불굴의 투지로 삶 전체를 부딪쳐감으로써, 자기를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자유롭고자 했던 인간들…”이라고 불렀다. 어쩌면 이 말은 바로 그 자신을 향해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헌사를 통해 밝힌 전노협이라는 시대의 역사적 진실은 다름 아닌 ‘인간미’ 그 자체였던 것이다. “전노협 백서는 바로 역사 속의 그들에게 바친다. 설사 그들이 지금은 탕아가 되고, 적이 되고, 자신들이 경멸했던 산업전사의 쓰레기가 되고, 노동귀족이 되었다 할지라도, 망설임 없이 그들의 1980~90년대 삶에 바친다.”

그가 인류의 보편적인 진실과 가치에 의거해서 더 크고 길고 넓은 안목으로 인간과 삶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임을 이보다 더 잘 나타내는 문구는 없을 것이다. 절망과 배신, 나약함과 비굴함까지도 껴안아 주고싶어 했던 사람, 이런 사람을 활동가로 가질 수 있었던 시대는 분명 행복한 시대다. 그리고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우리 역시 시대의 행운아들이다. (김하경, 김종배 추모집 「꼭 필요한 사람은 늘 먼저 떠나는가」, “새벽에 떠난 사람” 중에서)

 


1997년 7월. 많이 덥지 않았던 날, 전노협백서 출판기념식이 열렸다. 김종배는 해내고 말았다. 절대로 가능하지 않아 보이던 일을 그는 해냈다. 그랬다. 책장 수십개도 그 큰 손으로 다 만들어냈고(전노협 백서팀이 문을 닫으며 그 책장들을 처치할 수 없어서 결국 동원빌딩 건물 뒤편에 버려야 했을 때, 종배형이 얼마나 안타까워했던가. 탐욕스러운 내가 버리기 아깝다는 핑계로 그 책장 두 개를 갖겠다고 했을 때, 종배형은 또 페인트를 사다가 책장 칠을 다시 해줬다. 아! 난 얼마나 욕심많고 철없는 후배였던가), 그 많은 책장들에 그 많은 자료를 다 정리해서 채워냈고, 드디어는 믿기지 않게도 전노협백서를 만들어낸 것이다.

다들 이렇게 이야기했다. “김종배가 했기 때문에 나왔다”라고.

우리는 비겁하게도 입에 발린 감탄만 했을 뿐이다. 백서가 나올때까지 그가 했을 온갖 마음고생, 몸고생은 비켜갔다. 만들어질 책의 두께와 깊이만큼 몹쓸 병 때문에 자꾸만 튀어나오던 그의 눈알은 점점 그 큰 안경알에 가까워졌고, 그가 매일 먹어야할 알약의 개수도 늘어만 갔는데…, 우리는 정작 그런 사실은 외면했다.

우리가 목전에 닥친 일조차 칭얼대며 내일로 미루고 있을 때, 그는 한겨울엔 냉수마찰로 잠을 쫓으며, 한여름엔 쏟아지는 땀에 몸을 적시며 그 일을 해낸 것이다.

그때 자원활동을 했던 고계형동지는 그를 “사철나무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남들이 뭐라 해도, 상황이 아무리 자신한테 불리해도, 항상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 과거에 머물지 않고 항상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면서 살았던 사람. 남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준 사람 (중략) 형은 몸 안에 보조 동력기 같은 게 하나 더 있는 것 같았다 (중략) 아무리 몸이 안 좋고, 발간 작업이 난관에 부딪쳐도 항상 묵묵히 일하며, 새로운 힘을 찾고 새로운 시도를 끊임없이 하곤 했다. 그래서 우리도 힘을 잃지 않고 끝까지 함께할 수 있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때일수록 종배형을 추억하는 이유일 것이다. 남은 사람들끼리 서로에게 종배형이 되어줘야 하지 않을까? (고계형, 김종배동지 4주기 추모집 「질그릇의 투박함으로」, “기억” 중에서)

 


고계형동지는 또 “종배형을 잊기엔 그가 남긴 자욱이 너무 깊고 푸르다”고 했다. 그렇다. 그 자욱이 너무 깊고 푸르러서 우리는 그를 잊지 못한다.

 


그가 마치 인생의 목표처럼 매달렸던 전노협백서가 나온 뒤에도 그는 여전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도 그런 큰 일을 해낸 뒤라면 크게 앓거나 긴장을 놓아버리거나 이제는 좀 쉬어야겠다고 생색을 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어느 틈엔가 공공부문노동조합대표자회의(공노대)라는 곳에서 이미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어찌보면 당췌 그가 정들 것 같지 않던 그곳 공노대에서 그는 또 날밤새며 자료집을 내고, 밤새 소주잔 기울이며 사람들을 모아냈고, 조직 안에 민주적이지 않은 것이 발견되면 치열하게 싸워서 바꿔냈다. 그는 왜 언제나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 것인가. 도대체 왜.

공노대는 다시 공공연맹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그 공공연맹과 민철노련, 공익노련이 함께 1999년 지금의 공공연맹으로 출범했다. 옛 공공연맹을 만들며, 다시 공공 3조직 통합을 하며, 그가 편안히 보낸 날이 과연 며칠이나 됐을까.

공공부문 노조가 그런 발전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는 누구보다 헌신적이었다.

그는 무슨 일을 시작하면 그 속에 온 몸을 담궈버렸다. 그래서 투쟁을 같이 해본 사람들은 그의 따스함과 사랑을 금새 눈치챌 수밖에 없다. 서울지하철 동지들은 유난히 그를 ‘형’이나 ‘아우’처럼 챙기고 찾았고 의지했다. 1994년 6.24 파업에서부터 1998년 4.19 파업에 이르기까지 서울지하철 파업투쟁에는 늘 그가 함께했다. 공공부문 파업은 마치 첩보전을 방불케하는 비밀스러운 전술 운영이 필요한 터다. 그는 전장의 참모처럼 대오의 일진일퇴를 고민하고 함께 움직였다.

또 조폐공사 구조조정 반대투쟁은 어떠했는가. 조폐창을 통폐합하겠다고 난리를 떨었고, 노조가 막아내기 위해 파업을 벌인 투쟁이었다. 게다가 나중에는 무리한 구조조정이 파업을 유발시켜서 노조를 깨기 위한 공작이었음이 드러났다. 김종배가 빠질 리 없다. 어렵고 전망이 안 보이는 싸움이었지만 그는 늘 나섰고, 조폐공사 동지들은 김종배를 ‘우리 조합원’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사무치게 서러운 투쟁을 벌여냈지만, 결국 옥천창이 폐쇄되고 조합원들이 경산으로 떠나던날 저녁 그는 “조합원들이 탄 버스가 떠나는데 낯익은 여성조합원이 버스 창문 너머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는거야. 알아들을 수 없어 입모양으로 ‘뭐라구요’라고 물었더니 손가락으로 창문에다 ‘고생했어요’라고 쓰더라”라며, 특유의 웃음을 짓는데, 그의 눈을 들여다보니 눈물이 고여 있었다.

 


조직이건 개인이건 어려움이 닥칠 때 진정으로 필요한 사람이 있고 도움받고 싶은 사람이 있다. 내 자신이 혼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 정말 보고픈 동지가 있다. 보통사람과 좀 다른 면이 있는, 큰 덩치에 모든 일에 여유와 믿음이 있는 행동, 때론 싱겁기도 한 언제나 나의 머릿속에서 그리움과 보고픔이 떠나지 않는 김종배동지 (중략) 나이는 적지만 모든 일에서 정신적 지주였고, 옆에 없으면 왠지 불안하고, 옆에 있으면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기게 하는 동지 (강승회, 김종배 추모집 「꼭 필요한 사람은 늘 먼저 떠나는가」,“편지” 중에서)

 


때로 그는 과감한 추진력 때문에 적잖은 오해와 견제도 받았다. 어떤 큰 사업장은 의무금을 무기로 그를 자르려고까지 했다. 사업장의 크고작음에 연연하지 않았기에, 자랑거리라고는 사업장 규모밖에는 없었던 큰 사업장 입장에서는 같잖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작은 사업장의 이해를 먼저 헤아렸고, 잘못된 일은 절대로 좋은 게 좋은 식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이런 그의 강직한 성격 탓에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정작 주위 사람들의 걱정과 달리 그 자신은 여유로웠다. 허허로이 웃으며, “그렇게 하면 안되지”라며 장난스레 입을 삐죽거리거나, 사람좋게 웃었다.

그는 다른 동지 혹은 다른 조직이 자신을 괴롭게 할 때 "도대체 왜들 그러는거야?"라는 말을 혹여 했더라도 많이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그럼 우리 이렇게 해보자"라는 말을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옛 공공연맹 사무처장을 맡아 그와 함께 일했던 강승회 동지는 추모집에서 “거대조직에서 종배 너 사퇴시키면 연맹비 내고 참여하겠다고 했을 때 거대조직보다 네가 더 필요해 거절했었지. 결국 너는 그 조직의 역사적 파업을 이끌어 냈다. 그것이 네가 가진 힘이다”라고 회고했다.

 


아! 그는 또 따뜻한 사람이었다.

조폐공사와 만도기계의 구조조정 반대투쟁 선두에 섰던 지도부가 명동성당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할 때, 그는 단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명동성당에 들렀다. 전국이 다 제 집인 양 부지런히 돌아다니던 그였지만, 틈나는대로, 시간이 없을 땐 새벽녘이라도 농성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투박한 손으로 캘리포니아 김밥을 싸오고, 누런 주전자에 생맥주를 담아오고, 농성장에서는 찾기 힘든 먹을거리들을 양손에 들고 나타나서 이빨을 드러내고 씨익 웃던 그를 누가 잊을 수 있을까.

 


시골에 계신 어머니를 보고싶을 때마다 봐야겠다며 그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은 자주색 프라이드 왜건을 장만했다. 어머니가 계신 진부보다 투쟁 현장에 더 자주 오가야했던 그 프라이드. 그는 그 차를 ‘엔터프라이드’라 칭하며 전국 투쟁현장을 누볐다.

그런 그의 마음 속에는 항상 어머니가 계셨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일을 그리 열심히 했다 하니, 얼마나 어머니 속을 썩였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니다. 그가 징역에 있을 때 어머니에게 쓴 엽서에는 어머니를 향한 그의 사랑이 그대로 묻어난다. “항상 건강하세요. 엄마 곁에서 숨쉬고, 웃고 싶어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바꾸지 않을 그래서 언제나 보고 싶은 엄마”

그는 또 “번개와 천둥이 심한 날, 바람이 거센 날, 눈보라치는 날, 멀리 떨어진 곳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선 안됩니다. 헛된 기다림이 쉬울까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근심과 걱정 속에 빠지기 때문이지요. 겨울엔 먼길 떠나지 마세요. 언제나 제 의견을 존중하시는 어머니! 겨울에, 언땅 위로 달리는 저 위태로운 기계들을 믿을 수 없어요. 겨울엔 절대로 먼길 떠나오지 마세요.”라고 썼다. 머나먼 도시 감옥에 갇힌 그는 어머니가 먼 곳까지 아들을 면회하러 찾아오는 것이 못내 걱정스러워 이런 편지글을 쓴 것이다.

그는 참으로 따뜻한 사람이었다.

 


빌어먹을,,, 그에 대해 쓰자니 욕만 나온다.

그는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서 있다. 그의 왕성했던 활동, 그 활동의 강직함, 그리고 그의 맑고 깨끗함. 나는 도저히 그것들을 다 쓸 수 없다. 내가 조금만 더 감성적이라면, 그게 안된다면 천박하더라도 현란한 글재주라도 있었다면. 아니 내가 조금만 더 그를 잘 안다면…

 


“그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타협을 하지 않았다. 그럴 때의 그는 정말 도발적이다. 그는 정치적 견해로 고립되어도 일로써 그 난관을 넘어서곤 했다. 그래서 그는 남들보다 아니 나보다 두 배는 바쁘게 살았다. 전국을 누비고 사람들과 만나 술을 기울이다가도 사무실에 들어와서는 자료집을 만들다 쪼그려 자곤 했었다. 체력이 정말 좋구나 생각을 했는데, 그 때 그런 그의 쉼없는 활동을 말리지 못했던 것은 사고 이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이종회, 김종배동지 3주기 추모집 「늦은 나를 질책할 수 있다면」 “지금도 함께하는 종배를 생각하며” 중에서)

 


그런데, 참 이상하기도 하다. 그렇게 일을 짊어지고 살았다면, 그는 늘 일에 찌들어 힘든 표정이었어야 하는데, 왜 그의 눈빛은 늘 살아있고, 얼굴에는 늘 생기가 돌았을까. 우리는 겨우 하룻밤 일하면서도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단 채 짜증스럽다는 것을 표현하지 못해 안달인데 말이다.

김종배는 그런 사람이었다.

일에 치이거나 매인 사람이 아니라, 늘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고, 즐기고, 실패하면 좌절하는게 아니라 다른 방안을 마련하며 해나가는, 진지하지만 경직되지 않은 진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눈을 한번이라도 맞추고, 그의 일하는 모습을 한번이라도 눈여겨 본 사람이라면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소주라도 한잔 나눠 마셨다면, 도저히 잊지 못하게 되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도 좋은 김종배는 터무니없이 멍청했다. 왜 쉬어야 할 때를 몰랐을까. 왜 늘 열정적이었고, 그 열정은 멈추지 않았을까.

'노동해방'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그의 '육체'를 늘 피로하게 했고, 어처구니 없게도 피로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나태하지 않았던 그의 '건강'한 품성이 그를 느닷없는 사고로 몰아넣었으니 말이다.

그가 조금만 영악했더라면 하고 생각해보지만, 그랬더라면 우리의 기억 속의 그는 아주 딴 사람이 되버렸을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멍청했던 그가 미워 죽겠다.

 


지금도 나는 많지 않은 일을 가지고 "하기 싫어 죽겠다"고 징징거리며 그를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는 이런 철없는 후배들한테 결코 화를 내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좀 쉬었다가 다시 해봐. 금방 끝낼 수 있을거야"라고 말하며 웃을 뿐이었다. 그래도 징징거리면 "그럼 나가서 소주 한잔 하고 들어와서 할래?"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러면 철없는 후배는 남아있는 일을 금새 끝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으로 마음이 여유로와지곤 했다. 그와 함께 기울이는 소주 잔이 너무도 가벼웠다.

 


“꼭 필요한 사람은 늘 먼저 떠나는가”

그가 떠난 1년 뒤 그를 아는 사람들이 엮어 낸 추모집의 제목이다. 한국감정원노조 위원장을 지낸 공재호동지가 쓴 추모글의 제목을 땄다. 김종배동지에 대한 글에서 빠지지 않는 말이 아마도 그가 꼭 필요했다는 말일 게다. 이 세상 누군들 필요치 않은 사람이 있을까 만은, 그를 아는 사람들은 꼭 그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마도, 그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제 몸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동지들! 최선을 다하지 말라. 최선을 다하면 맑고 깨끗한 사람으로 기억되리라,,, 그러나 그것뿐이다. 마석에 먼지묻은 조화와 함께 1년에 한번 추모될 뿐이다. 그 추모 행렬은 어느덧 잦아지리라. 그리고, 그 맑고 깨끗한 사람을 기억하는 자들 역시 모두 떠나게 되리라.

 


누구를 추모하며 썼을까. 그가 남긴 이 시(詩)를 보며 우리는 늦여름에 떠난 그를 기억한다.

 


당신을 떠나 보내고

 


늦가을,

당신을 떠나 보내고

낯선 영안실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당신을 지우기 위해

모진 애를 씁니다.

포도에 떨어지는 젖은 낙엽을 밟으며

아무도 서로를 위로하지 못하는

서로의 슬픔을 싸안고

이제 아주 떠나버린 당신을,

애쓰지 않아도 시간속에 퇴색할

당신을 향한 슬픔을 잊기 위하여

모진 애를 씁니다.

 


그대는,

이미 추억이 되어서

슬픈 빛살처럼 머물 뿐인데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겠다며

몰려가는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지는 날이기도 합니다.

맹세한다고 했지만

번번히 우리들의 맹세는 되풀이됩니다.

그대가

떠나며 남긴 교훈보다는

떠나버린 빈 자리에서

우리의 가슴은 더욱 절실해집니다.

 


(김종배, 김종배유고집 「어머니, 겨울엔 먼길 떠나지 마세요」“당신을 떠나 보내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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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5 01:06 2005/06/05 01:06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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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12월, <노나메기> 기고글

 

국어사전에 '스승'이란 '자기를 가르쳐 주는 사람. 사부(師傅). 선생. 함장(丈)'이라고 나와있다.

나를 가르쳐 준 '스승'에 대해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니 막막해졌다. 도대체 아무도 떠오르지를 않는다. 내 삶이 길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30년 넘게 살아오면서 떠오르는 '스승'이 없는 것을 보니 '내가 참 복이 없나보다'라는 어리석은 생각까지 든다.

그러나, 어찌 내가 스승 없이 이만큼 자랐겠는가. 돌이켜보니, 내 주위에는 진정한 올바름에 대해 가르쳐주고, 또 나를 일깨워주는 스승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내가 스스로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아닐까. 배우기보다 가르치려들고, 받아들이기보다 내치고, 따라하기보다 헐뜯고, 그러다 보니 나이 서른이 넘도록 나의 정서와 의식이 풍성하지 못하고 이처럼 앙상한 것은 아닐까.

덜컥 겁이 난다. 온전치 못하고 앙상하나마 지금껏 평탄하게 세상을 살아올 수 있었고, 이후로도 나를 풍성하게 가꿔나갈 수 있는 지혜를 나에게 가르쳐 준 사람들을 나는 잊고 살아왔던 것이다.

 

내 가까이 있는 사람들, 그들은 모두 나의 스승들이다.

 

내가 일하는 사무실 옆에 해장국집이 있다. 지금은 그만두었지만 몇 달 전까지 그 밥집에서 일하는 청년이 있었다. 내가 그 집에서 몇 차례 밥을 먹으며 그와는 얼굴을 알아볼 사이가 됐다. 밥 먹을 때 어깨 넘어 듣자하니 그는 낮에는 해장국집에서 밤에는 PC방에서 일을 한다고 한다. 그때는 '젊은 나이에 참 고될텐데 표정은 늘 밝구나'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사무실 근처를 오가며 철가방을 실은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다니는 그를 종종 보게 됐다. 그는 그때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누나, 안녕하세요"라고 아는 체를 했다. 언젠가는 어두운 표정으로 혼자 앉아서 해장국을 퍼먹고 있는 내게 와서 "누나 일하는 곳은 많이 힘든 데죠?"라고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의 표정은 너무도 밝고 화사해서 난 문득문득 놀라기까지 했다.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하고, 그는 나를 잘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로부터 '따사로움'을 배웠다.

 

버스를 타고 다섯 시간 정도 가면 우리 집이 있다. 아니, 부모님의 집이 있다. 서울에서 사는 나는 바쁘다는 이유로 시골집에 1년에 한두 번 명절때나 찾아간다. 집에 가면, 난 서울에서 무척 힘들었다는 듯이 두 다리 죽 뻗고 누워서 책을 들춰보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잠을 잘 뿐이다. 엄마가 밥상을 내오면 자연스레 일어나 먹고, 다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잠을 자고, 다시 엄마가 깨우면 일어나 밥을 먹는다. 행여 밖에서 아빠가 같이 고추를 따자고 부를라치며 "이따가요~"라는 한마디만 내던진 채 다시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모니터에 눈을 처박는다. 다시 서울로 올라올 때, 부모님은 '전화 자주 하라'는 다짐을 몇 번이나 받지만, 서울행 차를 타고나면 다 잊어버리고 만다. 결국 부모님이 전화를 걸고, 난 "지금 바빠요. 다시 전화할게요"라고 한다. 그렇지만 엄마, 아빠는 서울 나들이를 할 일이 생기면 내가 무거워서 싫다고 두고 온 김치며, 고추장이며, 집에서 딴 호박 따위를 싸고 지고 올라오신다. 그런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배웠노라고, 말만 뇌까리는 것이 얼마나 싸가지 없는 짓인 지 안다. 그렇지만, 나는 엄마 아빠한테 '사랑'을 배웠다. 그러나, 아직 나는 그 '사랑'을 부모님께 되돌려드리지 못하고 있다.

 

몇 달 째 싸우고 있지만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도리어 경찰이며 깡패들한테 잡혀가거나 두드려 맞을 뿐인 장기투쟁을 벌이는 노동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지치지 않는다. 아니, 지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쳤다고 해서 그만두거나 흩어지지 않는 것이다. 길게는 서너 달, 더 길게 삼사 년이 넘도록 투쟁을 벌이지만 결코 포기하거나 배반하지 않는다. 그런 동지들이 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해서도 굳센 팔뚝을 번쩍번쩍 들어올리며 목청껏 구호를 외친다. 농성하느라 한겨울 차가운 길바닥에서 한데 잠을 자도, 쓴 소주로 허허로이 몸을 덥힐 뿐 슬쩍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나지는 않는다. 나는 그 동지들로부터 '노동자'를 배운다. 나는 그들에게 모름지기 노동자의 진정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배운다. 그들의 삶에 계급이 있고, 전투가 있고, 민주주의가 있고, 그리고 동지가 있다.

 

경기도 마석에는 모란공원이라는 묘지가 있다. 그곳에는 많은 동지들이 있다. 평범한 노동자들을 노동운동의 길로 이끌어낸 노동자 전태일도 있고, 파업투쟁을 벌이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동지들 곁을 떠났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회보험노조 최진욱 동지가 있다. 민주노총 건설을 위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하다 병을 얻어서 숨을 거둔 동지들은 유구영, 최명아, 정성범, 한경석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자신이 속한 현장에 충실했고, 어찌 보면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르렀고, 그러나 지금도 우리 곁에서 어깨 걸고 있는 그들로부터 나는 '긴장'을 배운다.

 

그리고 마석에는 또 한 동지가 있다. 덩치가 컸고, 손이 컸던 만큼 배포도 컸고, 가슴이 넓었던 그는 주위 동지들을 일깨우는 힘도 컸다. 백기완 선생이 "여기, 원통한 종배가 눈을 뜨고 누웠구나"라고 했던 것은 그의 떠난 빈자리가 그만큼 컸고, 또 그의 떠남이 그만큼 원통했기 때문이리라. 두 눈 부릅뜨고 노동현장이 좁다고 돌아다녔던 그는 늘 일을 짊어지고 살았지만, 일에 찌들어 힘든 표정이 아니라, 살아있는 눈과 생기 있는 낯빛을 가진 사람이었다. 늘 새로운 일을 만들어냈고, 즐겼고, 실패하면 좌절하는 게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다시 했다. 그래서 그와 눈을 한번이라도 맞춰봤거나, 그의 일하는 모습을 한번이라도 눈여겨봤거나, 그와 소주라도 한잔 같이 마셔본 사람들은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노동해방'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그의 '육체'를 늘 피로하게 했고, 어처구니 없게도 피로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나태하지 않았던 그의 '건강'한 품성이 그를 느닷없는 사고로 몰아넣었다. 지금 그의 육신은 썩어서 마석에 누워있지만, 여전히 나는 그로부터 진지하고 경직되지 않고, 여유롭지만 타협하지 않는 '노동운동'을 배운다.

 

나의 스승들은 어딘가에 또 있을 것이다. 그 많은 스승들은 나에게 그 많은 것들을 가르쳐줬다. 그런데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나는 아직도 여기 이 곳에서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그 스승들의 가르침은 그치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잠시 어깨가 스쳤던 스승도, 나와 함께 같은 일을 하며 같은 길을 가는 스승도, 육신은 비록 먼저 떠났지만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스승도, 모두 내 곁에 있는 스승들이다. 그 스승들이 아직 내 곁에 있는 이유는 내 '배움'이 모자라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내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려 할 때, 나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주고, 또 그 길을 똑바로 걷는 법을 가르쳐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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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5 01:03 2005/06/05 01:03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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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 창간 2주년을 맞으며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왜 ‘축하’가 아니고 ‘위로’냐고 발끈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2년 동안 <진보정치>가 겪어온 날들을 돌이켜보면 어찌 물색 없이 ‘축하’만 할 수 있겠는가. 보수와 진보를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는 (그렇게 구분하는 세력이 득세하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이 사회에서 <진보정치>를 만들어 내기란 모르긴 몰라도 쉽지는 않았을 게다.

 

그럼에도 ‘축하’ 또한 아니할 수 없겠다. 어찌어찌 <진보정치>가 2년 동안 형태를 갖춰 나와줬다는 것 때문이 아니다. 앞으로의 2년, 또는 20년, 또는 계속해서 <진보정치>가 ‘진보정치’를 앞당겨올 것이라는 희망을 지난 2년 동안 보여줬기 때문에 ‘축하’한다.

 

<진보정치>에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나와 함께 일하는 노동자며, 때론 엊그제 옷깃을 스친 민중이며, 또한 ‘함께 가지 않겠냐’고 손 내밀어 봄직한 ‘동지’들이다.

 

<진보정치>에는 ‘진보’가 있다. 그것은 이 세상 밝은 한 가운데나, 뒷골목 어둡고 냄새나는 쓰레기더미에나 있고 또 모든 곳에 있으며, ‘보수’와 투쟁한다.

 

그리고 <진보정치>에는 ‘정치’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무수히 보아와서 이제는 냄새조차 못 맡는 그런 더러운 ‘정치’는 아니리라. 그런 거 말고, 민중이 이야기하고 바라는 ‘정치’는 무엇인가. 우리는 불행히도 그런 ‘정치’를 풍족하게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서 잘 알지 못한다.

 

<진보정치>가 그런 ‘정치’를 알려달라. 그래서 무례하게 한가지 더 바라자면, <진보정치>가 민주노동당적(的)이지만 말고, 진보 정치적(的)이었으면 한다.

 

이황미/<노동과 세계>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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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5 00:45 2005/06/05 00:45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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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3월, <텍스트> 기고글

 

이거 너무 유식(遊識)한거 아니야?

 

텍스트를 읽다보면 주눅이 든다. 창간준비호에서 텍스트는 분명히 자기네들이 ‘지식이나 인식의 깊이란 것도 한낱 평범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고 의뭉을 떨었었다. 거, 사람들 참 겸손하네, 나 자신은 평범에서 많이 떨어지는 수준이라는 점을 일찌감치 자각한 터인데도, 텍스트의 말만 믿고 “음, 가히 같이 읽고 같이 고민할 만 하겠군”이라 믿었다.

 

어느덧, 창간호하고도 벌써 두 권의 텍스트가 점점 불어나는 두께를 자랑하며 내 책꽂이에 꽂혔다. 텍스트가 책꽂이에 늘어갈수록 나 자신의 ‘지식이나 인식’이 평범보다 얕아도 한참 얕다는 점만 분명하게 확인해갈 뿐이다.

 

빌어먹을~ 기자들이 미워진다. 그 많은 책들을 다 읽었다는 것도 얄미워 죽을 지경인데, 그것을 읽고 소화도 마쳤는지, 그럴듯하게 ‘리뷰’하고 있다. 추켜올리는 듯 하다 메다꽂고, 한없이 쓰린 감수성을 따라가다 느닷없이 현란한 수식어들이 춤을 춘다. 차라리 단순하게 ‘주장’만 하고 물러난다면 좋으련만. 그토록 난해하다면, 재미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제목이나 편집에 이끌려 이쪽 저쪽 펴봐도, 내용으로 들어갈라치면, 또다시 느껴지는 ‘지식이나 인식’의 얕음.

 

‘영화매거진’은 ‘영화’라는 게 당초 재미있기 때문에 절로 재미있는 걸까? ‘북’이 재미없어서 ‘북 매거진’도 절로 재미없는 걸까? 아니, 이게 정말 ‘재미’만의 문제일까? 영화잡지를 보고 어떤 영화를 영화관 가서 혼자 볼지, 누군가와 같이 볼지, 비디오로 빌려다 볼지, DVD가 나오기 기다릴지 따위를 정리한다.

 

책이 있다. 그리고 가끔 지면을 조금 나누어 그럴듯하게 소개해주는 신문이나 잡지가 있다. 그렇지만 이거야 원, 기갈스러워서. 책을 사볼지, 빌려볼지, 밑줄 쳐가며 볼지, 친구랑 강독이라도 할지, 아니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딴 사람들도 못 보게 말릴지, 그런 것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북 매거진’의 위상을 너무 천박하게 이해하고 있나?

 

건 그렇고, ‘짧은 리뷰’는 제일 속 편한 꼭지다. 그런데 궁금해진다. 기자들은 원고지 두 장도 안될 이 ‘짧은’ 리뷰 쓰려고 그 책들을 다 읽었을까? 또, 출판을 둘러싼 상품, 유통, 시장, 그 모든 것에 대한 불만으로 똘똘 뭉친 듯 보이는 ‘텍스트’도 ‘짧은 리뷰’를 보면 다 칭찬(?)인데, 진짜로 좋은 책들일까. 좋은 책만 골라서 쓰는 것인지, 아니면 ‘짧으니까’ 딱 한번 눈감고 추켜주는 것인지. 난 사실 그 ‘짧은 리뷰’로는 텍스트의 속내를 짐작할 수 없다.

 

텍스트는 언젠가 ‘연애든 소설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컴퓨터 게임이든’ ‘팽팽한 지적긴장’을 오래도록 같이 즐기자며 노골적으로 독자를 유혹했다. 좋다. 그렇다면 질문 있다. 지금 마지막 권을 읽고 있는 장편소설을 끝내고 나면 난 그 다음에 어떤 책을 집어들어야 하는가. 아니, 내가 집어들어야 할 책의 제목은 무엇인가.

 

이황미/<노동과 세계>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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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5 00:43 2005/06/05 00:43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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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2월 <노나메기> 기고글

 

백기완 선생님께

 


오늘, 2002년 2월25일. 드디어 발전, 철도, 가스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벌여냈습니다. 물론 가스는 낮에 교섭을 타결 지어 파업을 끝냈지만 발전과 철도노조의 파업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두 노조 역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나서서 교섭을 벌이고 있으니 곧 성과를 안고 타결되겠지요.

국가기간산업이라고 하는 공공부문 주요노조들의 동맹파업을 보며, “우리 노동자들이 드디어 해냈다”는 생각에 새삼 감동이 밀려옵니다. 그들의 동맹파업은 결과가 좋으면 금상첨화고, 결과와 무관하게 동맹파업을 벌여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우리 노동운동 역사의 중요한 장을 차지할 것입니다. 게다가 파업중인 이들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을 엄호하기 위해 기아, 현대, 쌍용 등 완성차를 비롯한 금속노동자들이 내일 오후1시부터 파업에 들어가기로 결의했습니다. 속된 말로 ‘그림’이 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

이런 가슴 뭉클한 순간에 저는 또 다른 한편 조금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생겨납니다.

25일부터 벌일 파업을 사수하기 위해 하루 전인 24일 오후6시, 침낭과 깔판 따위를 챙겨 넣은 배낭을 짊어지고 발전노조와 가스노조 조합원들이 서울대학교 노천극장으로 속속 집결했습니다. 5천여 명의 국가기간산업 노동자들이 모인 노천극장은 ‘연대’의 깃발과 ‘단결’의 함성으로 물결쳤습니다.

그런데, 노천극장 한 켠에 한국통신계약직노조 조합원 50여명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들 역시 발전과 가스 노동자들의 총파업투쟁을 지원하고 연대하기 위해 달려온 것입니다. 저는 주책 맞게도 그 감격스러운 순간, 한국통신계약직노조의 깃발과 조합원들의 투쟁조끼를 보며 갑자기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정작 그들의 투쟁은 4백일을 넘기고 있지만 아직 해결의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슴이 저려온 것은 한국통신계약직노조의 투쟁이 마무리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노동운동의 역사가 쌓이면 쌓일수록 노동자와 노동자 사이를 가로막는 벽들이 무수히 생겨나고, 그 벽들이 높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벽은 정권과 자본이 만들어내기 시작했지만, 어느덧 우리 노동자들도 모르는 사이 그 벽쌓기를 돕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도 들었습니다.

 


선생님! 이 세상은 정말 무수한 이유로 인간들을 갈라놓고 있습니다. 여자와 남자, 없는 자와 가진 자, 장애자와 비장애자, 유색인과 무색인, 그밖에도 민족, 종교,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 세상에는 갖가지 불평등이 존재합니다. 게다가 자본은 노동자들을 이러저러한 이유로 갈라놓아서 ‘단결’을 깨트리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우리는 그에 맞서 단일한 노동자계급으로서 뭉쳐야 하며, 또 그러기 위해 투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노동자들조차 정권과 자본이 갈라놓은 패 가르기에 물들고 있는 것입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큰 사업장과 작은 사업장, 제조업과 비제조업, 임금을 많이 받는 사업장과 그렇지 못한 사업장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발전, 철도, 가스 등은 온 나라의 눈길을 한 몸에 받으며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들 사업부문은 정부가 이야기하듯 ‘국가기간산업’으로서 매우 중요하고, 하루라도 공급되지 않으면 나라 안의 많은 사람들이 큰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업장 규모도 큽니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파업은 온 나라의 신문, 방송 등 언론의 눈길을 끌고 있으며, 온 국민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주요간부들도 조합원들이 집결해 있는 거점과 지도부들이 대책을 논의하는 명동성당 양쪽을 오가며 투쟁과 교섭 전략․전술을 짜내기 위해 밤새도록 힘을 쏟고 있습니다.

물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규모 있고 영향력 있는 사업장들의 단 며칠 파업에 온 나라가 이토록 몰두하고 있는 뒤켠에는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몇 백일, 길게는 몇 년 째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이번 투쟁에 제 일처럼 달려나온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은 파업을 시작한 지 1년이 넘었지만 성과보다는 고통과 외로움이 깊어질 뿐입니다. 전화국을 점거해보기도 했고, 자살소동이나 벌이는 곳으로 알았던 한강철교 위에 올라가 요구를 알려보기도 했습니다. 언론이 ‘헌정사상 최초’라고 이야기했던 국회점거투쟁의 장본인도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언론과 사회의 조명은 늘 이들에게 미치지 않고, 어찌 보면 노조 내부에서조차 그렇습니다.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은 지난 2000년 3월31일에 노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4월2일 설립신고를 했지만 반려됐습니다. 한국통신노조하고 조직대상이 중복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한국통신노조에 직접 가입하고자 했지만, 노조쪽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한국통신노조가 계약직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밝힌 이유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계약직원이 조합원이 되면 계약이 만료된 다음에 회사가 재계약을 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자연스레 해고자가 될텐데 계약해지가 예상되는 계약직이 너무 많아 그 책임을 노조가 다 떠 안기에는 부담이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통신노조 쪽으로부터 거부당한 계약직들이 어쩔 수 없이 따로 노조를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조직대상이 같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 한국통신노조가 대의원대회에서 규약을 바꿔 계약직을 조직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한국통신계약직노조는 합법성을 얻어냈습니다. 그러나 ‘노조’라는 이름을 달 수 있었을 뿐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2000년 12월 회사쪽은 계약직 7천명을 계약 해지했고, 한국통신계약직노조는 12월13일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그 투쟁이 벌써 4백일을 넘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공공부문 투쟁에 가리워있는 노동자들은 또 있습니다. 지난 96년 12월 삼미특수강 강봉․강관공장이 포항제철에 팔릴 때 고용이 승계되지 않은 노동자들이 그들입니다. 일터에서 쫓겨난 지 꼬박 5년이 넘은 이들은 지난 2월19일 다시 포스코센터 지하에서 노숙투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5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에 삼미특수강 노동자들은 할 수 있는 투쟁을 다 벌였습니다. 그 성과로 대통령도 복직을 약속했고, 고등법원조차 복직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런데도 지난해 7월 대법원은 ‘포항제철은 삼미특수강 노동자들을 고용할 의무가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대법원은 이 땅의 자본에게 ‘대량해고’의 길을 터준 것입니다. 당시 판결을 듣고 쓸쓸히 발길을 돌리며, 차마 아무 말 못하고 담배만 태우던 그 동지들의 뒷모습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삼미특수강 노동자들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길거리는 제법 봄볕이 비추고 있지만 밤바람은 아직 찬 겨울인데, 60여명은 침낭 하나에 의지해 거리에서 밤을 세우며 ‘고용승계’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물론 주요한 사업장들의 파업 때문에 겨를이 없어서겠지만, 포항제철 고용특위 노동자들의 노숙투쟁은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한국통신계약직, 삼미특수강 노동자들은 그러나 이제껏 투쟁이 주목받지 못하는 데 대해 한번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민주노총의 주요한 투쟁이 있을 때마다 농성장과 집회장을 사수하며 궂은 일을 도맡아 해왔습니다. 그런 동지들을 보며 한편으로는 그들이 자랑스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가슴 한 구석에 저려와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본과 정권에 맞서 힘겹고 외로운 투쟁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백기완 선생님!

이렇듯 힘겹게 이어가고 있는 모든 투쟁을 하나로 묶어서 싸울 수는 없을까요? 우리 노조, 너희 노조 가리지 않고 ‘하나’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까.

물론 그것이 바로 민주노총의 몫입니다. 저 역시 지난 1994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에서 활동하기 시작해서 1996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의 출범을 거쳐 9년째 노동조합 전국중앙조직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9년의 경험을 돌이켜 보면, 그런 일이 머리와 가슴속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데 왜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못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지난 96~97년 노동법개악저지를 위한 총파업투쟁이 있지 않느냐고 이야기합니다. 30만 명이 한가지 요구를 내걸고 파업을 벌였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 위력적인 투쟁의 뒤안에서 탄압의 강도도, 그 후과도 달랐습니다. 여전히 힘없는 노동자들은 어느 한 곳에 어려움을 호소조차 하지 못한 채 경찰, 구사대, 무관심 속에 깨져나갔습니다.

 


물론 민주노총 지도부와 집행부가 노동자를 조직해야 하고, 구조를 갖춰야 하고, 끊임없이 교육․선전하는 등 과제가 많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백선생님! 이제 우리들 마음만이라도 ‘노동자’를 갈라서는 안되지 않을까요? 특히 최근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게다가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면서 사회문제로 불거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민주노조를 표방하는 곳에서조차 비정규직의 문제를 자기 일로 느끼지 않고, 심한 경우 외면하거나 불평등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민주노총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고, 나 역시 그런 부류에 끼어 은근히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괴감이 들기도 합니다.

선생님도 이미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노동운동 경험이 풍부하고, 노동자의식 또한 뛰어나다는 창원지역의 한 노동조합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작업복을 통일하자는 안건이 대의원대회에서 두 번이나 부결됐습니다. 광주에 있는 한 사업장은 안전화를 보고 인사를 나눈다고 합니다. 정규직들이 자신과 똑같은 안전화를 신은 사람한테만 인사를 하고, 안전화가 다른 사람은 비정규직이므로 외면한다는 것이죠. 울산에 있는 한 규모 있는 사업장은 인원정리가 필요할 때를 대비해 용역을 두기로 노사가 합의한 적도 했습니다. 광주의 또 다른 사업장은 하청노동자들이 따로 만든 노동조합을 탄압해서 결국 상급연맹으로부터 제명조치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들거나 투쟁에 나설라치면 어김없이 악랄한 탄압에 부딪혀 사태가 장기화되거나, 깨지거나, 무기력하게 싸움을 접어야 하는 게 현실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례들은 특수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죠. 정규직들로 이루어진 노동조합이 단체협상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내걸고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에 나서는 경우도 적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특수한 경우들은 없어야 할 경우들인 탓에 노동운동이 다른 문제에 앞서 고민해야 하는 것들이 아닐까요.

 


백기완선생님!

정작 노동운동에 몸담고 있다는 젊은 사람으로서 이런 문제까지 백기완선생님한테 말씀드리는 것은 무리일까요?

선생님은 썩은 자본의 문화가 우리 노동자들에 스며드는 것에 맞서 살아있는 우리 문화를 만들어내고 자리매김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노동자들은 ‘노동자문화’에 대한 인식이 낮은 것이 사실입니다.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넘어가지 않고, 단란주점에 가지 않고, 현란한 대중매체에 혹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노동자문화’를 지켜내고 있다고 자신하며, 정작 중요한 ‘노동자의식’은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진정한 ‘우리 문화’가 없는 탓에 ‘이기심’을 적당히 포장해서 개개인이 처한 조건에서 기득권을 지키고, ‘우리’의 이익보다는 ‘나’의 이익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우리 노동자들은 지난 몇 십 년의 노동운동 경험 속에서 소중한 노동자문화를 만들어냈고, 또 정착시켜내 왔습니다. 그런데 어째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은 그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을까요?

진정한 ‘노동자문화’, 곧 ‘노동자의식’은 공허한 이론으로만 붕 떠있는 채 우리의 삶과 머리와 가슴과 실천에 스며들지 못한 탓에 우리는 혹시 스스로를 가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노동자를 가르는 벽을 허물고, 강을 메우는 일은 노동운동의 일선에 선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진정한 ‘노동자의식’을 깨닫고, 모든 노동자들이 그 사상으로 무장토록 하는 투쟁 말입니다.

그러나, 백기완선생님도 해주셔야 합니다.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지만, 이제 이 땅에 어르신들이 없습니다. 어르신들은 당신들이 가진 지혜와 견결함과 전투성을 미처 우리에게 다 넘기지 못한 채 떠나고 계십니다. 때론 죽음이 때론 배신이 때론 노곤한 삶이 선배들을 우리로부터 빼앗아갑니다. 아직 젊은 우리는 미처 다 깨닫지 못했고,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고, 제대로 배우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백기완 선생님이 그 역할을 해주셔야 합니다. 물론 지금까지 온 생을 내던져 그렇게 실천해 오셨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늘 서릿발같은 준엄함으로 빗나가는 우리 노동자들을 꾸짖어 주셨습니다. 노동자들이 혼란스러워할 때는 가야할 길로 이끌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외람 되게도, 선생님은 ‘대중적’이지 못하십니다. ‘대중’에 맞춰달라는 속된 부탁도 아닙니다. 저의 좁은 소견으로 보면, 선생님은 어쩐지 노동자들과 다른 곳에 계시는 듯 합니다. 우리 노동자들은 때로 어리석고, 헤매기도 하고, 또 때론 단결하고 투쟁하기도 합니다. 불완전한 ‘대중’이라는 뜻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선생님은 우리 노동자들이 볼 때 편하기보다는 너무 어렵습니다. 견결성을 버리시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낮춰서 현장에서 기름때를 묻히고, 컴퓨터 두들기느라 손가락이 짓무른 그런 노동자들과 같이 호흡해달라는 말씀입니다.

마음만 앞설 뿐 제 어휘가 모자라서 제가 전하려는 뜻이 제대로 표현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노동자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선생님의 풀먹인 옷고름처럼 꼿꼿해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라는 말씀입니다.

 


정권과 자본은 지금도 그렇고, 자신들이 망하는 그 날까지 우리 노동자를 편가르고 이간질하려 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해지는 세상은 아직 멀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노동자들끼리만은 평등한 그런 세상은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훨씬 빨리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노동자들이 당장 그런 의식으로 무장하고 투쟁에 나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만의 이익에는 눈을 돌리고, 평등한 세상을 일궈나가는 데는 가슴을 불태우는 그런 노동자 말입니다.

선생님이 그런 노동자들의 든든한 ‘빽’이 돼주십시오.

 


나이 어린 제가 감격스러운 동맹파업 현장을 보며 한편으로 드는 안타까움을 주제넘게 말씀드렸습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오.

 


2002년 2월25일 이황미(민주노총 편집부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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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5 00:38 2005/06/05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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