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렀다. 3월21일이면 벌써 박현정동지 49재란다.

때를 맞추어 박현정동지 추모사업회 발족식도 한다고 한다.

그날 울산에 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추모글로 대신한다.

 

"좋은 사람, 이제는 편안하세요"

 

“도옹지요오~” 문득문득 멀리 울산에서 전화가 걸려온 날은 박현정 동지가 술 한 잔 얼콰하게 걸친 날이었습니다. 나도 여기 서울서 한 잔 하던 날이면 전화기 붙들고 서로 허공으로 술기운 날리며 수다를 떨었습니다. 때론 바쁘다는 이유로 “다음에 전화할게요” 하며 그의 목소리를 ‘툭’ 끊어버린 날도 있습니다. 나중에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고 “또 술 드셨으려니~” 넘겨버린 날도 많았습니다.

박현정 동지의 목소리를 한 달에 한 번, 두 번 정도 들었을까요. 늘 저의 안부를 챙겨줬던 동지입니다. 아니지요. 박 동지는 저의 안부를 챙겼던 동지가 아니라 ‘모든 동지’들의 안부를 챙기던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난해 11월, 내가 노동해방선봉대원으로 울산을 찾았을 때 박현정 동지는 어김없이 투쟁에 결합해 있었습니다. 뒤풀이까지 모든 일정이 끝난 뒤 “밖에 나가서 한잔 더 하자”고 전화가 걸려왔는데, 안된다며 또 ‘툭’ 끊었네요. 다음날 눈을 흘기며 “와~, 나를 씹었다 이 말이재”라고 농을 걸었었죠. 그 뒤로도 현대차비정규투쟁 때문에 울산에 족히 네댓 번은 더 내려갔었나 봅니다. 그때마다 박 동지는 투쟁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아, 왜 그때 손 흔들며 웃기만 했을까요. 왜 깃발을 걸려고 엉거주춤하고 있는 저에게 내미는 청테이프를 답삭 받기만 했을까요. 왜 쪼르르 좇아가서 지난번 못 마신 술, 오늘 한잔 하자고 매달리지 않았을까요.

처음엔 몰랐습니다. 박현정 동지가 그렇게 ‘좋은 사람’인 걸 몰랐습니다.

2004년 민주노총 조직실에 있을 때 장투사업장 투쟁을 담당하면서 박현정 동지를 만났습니다. 회의에 온 박현정 동지는 길어지는 회의를 지루해 하는 인상 험하고 까칠한 경상도 동지였을 뿐입니다. 회의에서 서울역 농성을 결정했죠. 몇 년째 투쟁하고 있는 사업장 동지들이 모여서 딱히 성과가 있을까 싶은 투쟁을 이어가던 힘든 농성이었습니다. 종로에서 쇠사슬 걸고 1인 시위 하다가 경찰이랑 몸싸움도 했고, 연대대오가 아무도 없어서 광화문에서 20여명 앉아 재미없는 집회를 하기도 했고, 곳곳에 흩어져서 선전전을 하기도 했습니다. 박현정 동지는 늘 마땅찮다는 표정으로 꾀를 부리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죠. 그런데, 실천에서는 절대 그렇지가 않더라는 겁니다. 그가 움직이는 손과, 발, 몸은 절대 꾀를 부리지 않더라는 겁니다. 어느 비 내리던 주말, 선전전 가지 말고 소주나 한잔 하자는 그의 넉살좋은 ‘투정’ 덕에 천막에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 들으면서 막걸리에 오뎅국물 퍼먹으며 웃음꽃을 피웠던 추억까지 만들었네요.

그를 처음 만난 그 투쟁에서 알게 됐습니다. 늘 장난스러운 표정이지만, 그 얼굴 뒤에 세심함, 치열함, 고민, 동지에 대한 배려, 그 모든 것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긴 농성을 끝내고 울산으로 내려가던 날, 박 동지는 환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효성해복투 방송차에 올랐습니다. 성과는 없이 고생만 지지리 하다 떠나는 그 발걸음이 뭐 그리 가벼웠겠습니까. 이번에도 그 표정 뒤에 설움과 결기를 숨겨두었던 게죠.

그때부터, 박현정 동지는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빼놓지 않고 저에게 전화를 합니다. 저도 울산에 내려가면 연락을 했죠. 박일수열사투쟁 때, 일머리를 몰라서 병원 영안실에 박혀있는 나를 불러내 삼계탕을 사주며 격려해주던 사람도 그였고, 다른 일정으로 들른 울산에서 전화받자마다 득달같이 달려 나와 매운 닭볶음 권하던 사람도 박 동지입니다. 아, 구구절절 이야기해봤자 그의 웃음만 떠오를 뿐입니다. 더 이상 전화는 걸려오지 않습니다.

전 멍청하고 게을렀습니다. 늘 박현정 동지가 안부를 물어오면 그제야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박 동지의 ‘사람다운’, ‘사람을 챙기는’ 천성을 일찍 눈치 채지 못한 저는 멍청합니다. 다른 사람을 챙기느라 정작 자신을 챙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저는 멍청이입니다. 천성이 게으른 저는 동지에게도 게을렀습니다. 게을러서 동지를 챙길 줄도 몰랐습니다.

지난 1월, 간만에 울산에 눈이 많이 내렸다지요. 박현정 동지한테 이른바 ‘멀티메일’이라는 게 왔습니다. 눈 쌓인 동네를 찍은 동영상이었습니다. 동지를 넉넉하게 챙길 줄 알고, 세상을 따스한 눈길로 둘러볼 줄 아는 박 동지는 가슴 속에 동지들과 세상을 향한 사랑만 가득 채운 채 아픔도 설움도 애써 외면했나 봅니다. 그가 외면한 아픔과 설움을 우리가 봤어야 하는 거였는데... 이제는 늦었습니다. 그런데도 박현정 동지는 아직도 다른 동지들이 밥은 먹고 다니는지 걱정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부질없는 다짐을 해봅니다. 박현정 동지에게 못 건넸던 따스한 손길과 눈길을 이제 남은 우리라도 꼭 나누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런 모습 보면 박현정 동지가 “야야, 철들었나보네~”라면서 또 입가를 약간 올리며 눈을 흘기듯 웃을지 모르겠네요.

박현정 동지가 남긴 것을 다 쓸어안기엔 내 품이 너무 비좁기만 합니다. 소주한잔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려서 서럽기만 합니다.

그래도, 그래도 박현정 동지! 이제 편안하세요. 세상이 더러워도, 꽃 같은 아내가 눈에 밟히고 아들놈 속살에 찬바람 스며들어도, 철없는 동지들이 여전히 정신 못 차려도, 제발, 이제는 편안하세요.

멍청하고 게으른 저는 아직도 이렇게 동지에게 ‘부탁’ 말고는 해드릴 게 없네요.

 

2011년 3월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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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6 16:48 2011/03/16 16:48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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