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산은 언제 거기 있었던가

나를 버리러 간다
될 수 있으면 아주 밝은 곳으로
될 수 있으면 아주 어두운 곳으로
나를 버리러 간다
될 수 있으면 아주 높은 곳으로
될 수 있으면 아주 낮은 골짜기로
될 수 있으면 가장 더러운 곳으로
될 수 있으면 가장 깨끗한 곳으로
나를 버리러 간다
될 수 있으면 가장 멀리,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우습다 10년을 반성하지 않는 시가 우습고, 20년을 반성하지 않는 시가 우습고, 30년을, 40년을, 50년을, 반성하지 않는 시가 우습고, 나를 반성하지 않는 시가 정말 우습다 그렇지 않느냐 우스워 죽겠는데 웃지도 않고 시를 쓰는
나를 반성하지 않는 내가 우습고 너를 반성하지 않는 내가 우습고 몇천년 동안 한번도 반성 없는 우리의 정치가 우습다
새벽 달빛에 봄이 오고
새벽 달빛에 내리는 흰 서리, 내려다보는 땅 위에 쑥들이 돋고, 어둠속 내 맨발은 시리다
새봄이 와서
꽃이 피고
흘러가는 강물에
꽃같이 고운 얼굴들이 떠간다
새가 운다
산아
지리산아
3월 지리산아
꽃은 어이 피고 지는고
지리산 아랫도리 가지가지에 살이 터진 매화야
매화는 찬바람 끝을 잡고 피어난다
나를 버리러 간다
가장 화창한 봄날,
꽃들이 가장 만발한 봄날
강물이 가장 파란 봄날
바람이 가장 부드러운 봄날
더러운 세상의 끝가지 보이는 환한 봄날
나를 버리러 간다
돌 틈에다가, 푸른 하늘에다가, 커다란 바위 위에다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길에다가, 만발한 매화꽃가지 아래에다가 그리고,
돌아서서 걸으마
그리운 너를 만나러, 다시는 헤어질 수 없는 너를 만나러
오, 내 사랑의 끝, 그 캄캄한 절벽 끝에서
내 한발 내디뎌
저 산은 언제 저기 있었고
저 강은 언제 저리 길이 났던고?


- 김용택 [나무]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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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5 01:25 2005/06/05 01:25
Posted by 흐린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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