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비정규교수노조 부산대분회는 지난3월 29일 1차 교섭을 시작으로 2012년 단체교섭을 시작했다. 신임 총장이 인문대 출신이고 총장 후보자 공개연설에서 시간강사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발언도 했고, 그간 시간강사 문제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이었다는 점 등이 고려되면서 2012년 단체교섭은 어느 정도 잘 풀릴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진 사람도 몇 있었다.
사실 대학의 전임교수가 시간강사에게 우호적이라는 표현은 다소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같은 대학에서 동일하게 연구하고 강의하는 동료 교수인데 단지 대학의 정규직 교수와 비정규직이라는 차이가 어느 한편이 다른 쪽에 우호적이라는 표현은 그렇게 바람직하게 들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호적이라든가 적대적이라든가 하는 표현은 동일한 사업장의 노동자에게는 영 어울리는 표현이 아니다.
그런데 대학에서 시간강사라는 직급으로 강의하는 전임교수와 비정규교수의 관계가 다른 사업장의 노동현장에서처럼 그렇게 일반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어떤 특수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대학에서 전임교수와 시간강사는 동료교수이자 동시에 전임교수의 제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한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강의하는 비정규교수가 유학을 하고 돌아온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학부 학생이 바로 대학원으로 올라오거나 유학을 가서 학위를 받은 경우라도 강의를 할 경우 대개 자신의 모교에서 먼저 강의를 시작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런 점에서 전임교수는 시간강사에게 동료 교수이자 선배이고 스승인 독특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독특한 관계로 인해 전임교수와 시간강사가 수평적인 연대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전임교수가 시간강사에게 우호적이라는 말은 어떤 점에서 큰 함의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대학에서 전임교수와 시간강사 사이의 관계가 대부분의 대학에서 수직적인 종속구조라는 점에서 더 그렇다.
우리는 2차 교섭을 진행하면서 인문대 총장 체제의 교섭위원들이나 이전 총장 체제의 교섭위원들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선생님의 말씀처럼 그들은 여전히 '마름'일 뿐이다. 노조의 교섭안을 한번도 제대로 검토한 적이 없이 교섭에 들어왔다는 게 빤히 보이니 교섭 자리에서 언성이 높아지고 고함을 지르는 일도 발생했다. 대학에서 교섭위원으로 나온 사람들은 대학본부 직원인 과장 두 명을 제외하고는 다들 부처장들이고 전임교수들이다. 역시 그들은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이 여실이 증명된 상황이었다.
교섭 요구안을 설명하던 중 노조의 교섭안에 '정리해고를 하지 않는다'는 부분에서 대학 측 교섭위원이 '이게 무슨 의미냐'고 물었다. 그래서 말 그대로 정리해고를 하지 말라는 말이다, 라고 응수를 하니 전임교원을 뽑으면 시간강사가 필요없을 수도 있는데 그런 것은 어쩔 수 없지 않느냐, 그런 정리해고는 합리적인 것 아니냐고 다시 되물었다. 그래서 합리적인 정리해고는 없다고 응수했다.
한국 대학의 현실은 대학 교육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강사가 필요하다. 현재 대학의 전임교수 확보율은 국공립대의 경우 70% 정도이다. 나머지 빈 자리를 시간강사로 '때운다'. 사립대의 전임교수 확보율은 70% 이내이고 심지어 50%가 안 되는 곳도 부지기수다. 유일하게 서울대가 130%의 전임교수 확보율을 자랑하고 있다. 그럼에도 서울대의 시간강사 수가 전국에서 제일 많다. 이 말은 전임교수 확보율이 300% 정도는 되어야 대학 교육이 정상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한 ‘2007년 대학교원 현황’에 따르면 한국 대학의 전임교원 1인당 학생수(재학생 기준)는 30.7명이다. 그러나 OECD 31개 회원국의 경우 전임교원 1인당 학생수는 평균 15.8명이다.(* 관련기사 : 교수신문) 상황이 이러니 한국 대학의 전체 강좌에서 시간강사가 차지하는 비율은 50%에 육박한다. 시간강사가 하나의 제도로, 하나의 직업군으로 자리잡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대학이 대학 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전임교원을 채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국공립대의 경우 개별 대학이 전임교원을 채용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국가의 고등교육재정이 뒷밭침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불가피하게 시간강사를 고용해야 한다면 시간강사들의 처우와 권리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개별 대학에서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한국비정규교수노조의 분회가 있는 대학에서 이미 입증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대학에 단체교섭을 요구하고 시간강사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권리를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정리해고 없는 세상
/하종강, 경향신문
기업 구조조정이 또다시 중요한 화두로 등장했다. 유가 급등으로 경제의 불확실성이 높아졌다는 이유로 금융감독 당국과 채권 은행들은 기업 구조조정 일정을 대폭 앞당긴다 하고, 구조조정의 강도도 한층 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유가 상승이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업종에 대해서는 이미 구체적 자구 상황 점검에 들어갔다고 한다.
마치 데자뷰처럼 같은 현상이 되풀이된다. 현 정부뿐만 아니라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막론하고 기업 구조조정이 강조되지 않은 적은 없다. 대통령이 연두회견에서 ‘기업 구조조정의 상시 체제화’를 강조하면 ‘제한된 지식’으로 무장한 관료와 경영자들은 ‘기업 구조조정’을 ‘인력 감축’과 동일한 뜻으로 이해하고 밀어붙였다. 경영자 단체들은 입을 모아 환영의 뜻을 밝혔다. 기업을 구조조정하겠다는데 그 조정을 당해야 하는 기업 경영자들이 환영한다는 것부터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외환위기를 겪은 뒤부터 ‘경제염려증’을 앓고 있는 국민들 역시 구조조정으로 인한 정리해고를 어쩔 수 없는 필요악으로 받아들인다.
인력 감축이란 수많은 기업 구조조정 방식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현행 노동법상으로는 최후에 선택해야 하는 방식이다. 인력 감축의 노동법상 표현은 ‘정리해고’인데, 근로기준법에 정리해고 규정이 없었던 시절부터 대법원은 오랜 기간 판결로 정리해고에 관한 기준을 확립해 왔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경영난이 심각해야 하고(경영상 긴박성), 경영난을 타개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먼저 모색해야 하고(해고 회피 노력), 선별 기준이 지극히 공정해야 하고(공정한 기준), 노동자들과 성실하게 협의를 거쳐야 하는(성실한 협의) 네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켜야만 정당한 정리해고가 될 수 있었으니, 기업이 합법적으로 정리해고를 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 기준들이 근로기준법에 정리해고 관련 조항으로 명시된 것이다.
정리해고의 정당성 요건 중 두 번째가 ‘해고 회피 노력’이다. 글자 그대로 기업 경영을 개선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을 모두 시도해보고 더 이상의 방안이 없을 때 최후의 선택으로 정리해고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랜 기간 대법원은 첫 번째 요건인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성’에 대한 해석을 “노동자를 해고하지 않으면 기업이 도산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 한정하는 것”으로 엄격하게 유지해 왔다. 그러다가 점차 “장래에 올 수도 있는 위기에 미리 대처하기 위해 인원 삭감이 필요한 경우 등 객관적으로 보아 합리성이 있다고 인정될 때” 등 기업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방향으로 폭넓게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 콜트악기 사건에서 대법원이 “정년퇴직에 의한 자연스러운 인력 감축을 통해 이 사건 해고 범위를 일정 부분 피할 수 있었던 점 등을 종합해 보면, 긴박한 경영상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결한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부당한 해고라는 뜻이다. 그런데 대법원 판결 이후 회사는 5년 동안 생존의 벼랑에 몰렸던 이 노동자들에게 또다시 절차를 밟아 정리해고를 하겠다는 뜻을 통보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외치면 평소 진보적이던 학자들조차 “그런 세상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아니라 국가가 계획에 의거해 노동력을 배분하는 사회주의 체제”라고 충고하고 “기업이 정리해고 할 권한을 가져야만 노동력이 골고루 배분된다”고 훈계한다. ‘정리해고 없는 세상’은 경제를 잘 모르는 주장이라거나 지혜롭지 못한 전술이라는 것이다.
사실 기업이 정리해고 하지 않은 채 노동자들과 함께 기업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정리해고 하는 것이 얼마나 더 효율적인가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주주자본주의 아래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주가를 올리는 손쉬운 방법이기에 기업들은 전체적 효율을 생각하기 전에 무조건 정리해고부터 하고 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자들이 짐짓 중립적인 체 강조하면,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인 ‘권한’을 오로지 ‘할 수 있다’로만 받아들이는 기업 경영자들이 함부로 노동자를 정리해고 하는 무모함에 용기를 더할 뿐이다. 정리해고를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절박한 요구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충고하는 일보다는 그 구호를 외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사정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더 기울이는 것이 지식인으로서 바른 도리이지 싶다.
콜트악기에서 정리해고를 당한 노동자는 천막농성을 하다가 “나 한 몸 희생되어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며 자신의 몸에 시너를 붓고 분신했다. 목숨은 건졌지만 화상으로 일그러져 불편해진 손가락으로 “나이든 부모님께 이런 몸으로 얹혀사는 게 죄송하다”고 글을 쓴다. 그 몸으로 4년을 더 싸웠다. 그 노동자에게 “죽음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충고해야 하겠는가? 노동자의 유일한 생존수단을 빼앗는 정리해고가 사라지도록 노력해야 최소한 줄어들기라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