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 분들은 누구지지합니까?" 속으로, 저요? 택시기사의 외모를 보니 그렇게 큰 차이를 못느끼겠는데, 아마 내 얼굴이 동안이기 때문이리라. "아저씨는 누구 지지하십니까?" "저야 이회창 지지하죠. 지금 한나라당 후보가 어디 대통령감인가요. 돈으로 치면 재벌 아닙니까?" 음, 골치아프게 됐군. "아저씨는 전세 사세요, 아니면 ....?" 무슨 말이냐는 듯 쳐다보는데, 영 떫은 표정이다. 잘됐다. 그냥 갈 수 있겠구나. 내릴 때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미터기를 보고 돈을 지불했는데, 택시 기사는 아무 말도 없이 잔돈을 건네 주었다. 인사도 없었다. 문을 닫으니 휑하니 사라졌다.

택시를 타면 그냥 조용하게 있고 싶은데, 꼭 말을 걸어야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걸어오는 분들이 간혹 있다. 힘들게 사시는 분들이니 얼마나 스트레스가 쌓이겠나, 그래 10여분 말동무 정도야 뭐. 하고 응수하다가 낭패당하기가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정치 이야기면 입닫고 대꾸를 삼가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자신은 가난하면서도 보수 우익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을 지지하는 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야 한다. 요즘은 자신을 우파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아마 무식한 인간들이라 어떤 기준으로 좌파나 우파를 나누는지도 모를 것이다.

자신을 우파라고 지껄이는 인간들과 네이버에 무식한 댓글 다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의 차이가 너무 궁금하다.

[경향포럼]당신들만의 ‘법치’(경향신문, 2007. 11. 12)

〈은수미/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길거리를 덮은 광경이 아니더라도 두꺼워진 옷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차다. 이때쯤이면 따뜻한 온기가 소중해지기 마련인데, ‘법치와 공권력이 무너져 불법집회와 파업이 만연하다’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체감기온이 더 뚝 떨어진다.

2007년 11월 9일 현재 파업 발생건수는 전년대비 20.6% 줄어들었고 근로손실일수는 무려 59.8% 감소하였다. 파업발생 건수가 덜 줄어든 것은 대기업 정규직의 파업은 대폭 감소하였지만, 비정규직 및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파업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올 한해만 해도 이랜드를 비롯하여 코스콤, 울산건설플랜트, 기아자동차 사내하청, 울산과학대·안동대·창원대·청주대·광주시청 등의 청소용역 등에 이르기까지 비정규직의 쟁의가 지속되었고, KTX, 기륭전자, 르네상스호텔 등은 최소한 1년 이상 미해결 상태이다. 개인적인 분신·자살까지 고려한다면 사회적 취약계층의 저항이나 연대집회가 ‘법치실종’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낳는 요인 중 하나이겠지만 진짜 법치실종은 다른 곳에 있다.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는 것은 헌법 전문에 보장된 조항이며 그런 점에서 한국은 법치주의 국가이다. 문제는 국민의 특정 집단이 ‘자유와 권리’에서는 배제되고 ‘책임과 의무의 완수’만 요구받는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에게는 ‘차별없이 일할 권리’가 거의 없다. 분명히 취업하였는데 이들의 4대 보험 가입률은 40% 수준이고 시간외수당, 퇴직연금 등 각종 기업복지로부터도 차별받는다. “생리휴가 내겠다고 했다가는 다음번에 재계약이 안되”고 “산전산후 휴가 받는 사람 못보았는데요”가 현실이다. 또한 비정규직에게는 ‘차별없이 요구할 자유’가 없다. 노조를 만들었다가는 해고되기 일쑤고 법원 문턱은 유달리 높다. 게다가 ‘차별없이 투표할 권리’도 없는데 대통령선거일이 법정유급휴일이 아닌지라 선거일에 투표하자면 하루 일당을 포기해야 하는 노동자가 최대 800만명이다.

각종 정부통계에서도 비정규직은 잘 잡히지 않는다. 비정규직에 대한 인구조사가 시작된 것이 2000년 8월부터이지만 그나마 사내하청 등 간접고용은 현 통계조사로도 나타나지 않는다. 비정규 근로가 애시당초 정규근로가 ‘아닌’ 집단범주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존재하는데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선명하게 보일 리가 없다. 결국 누구에게는 존재의 이유가 ‘함께 하는 것’이라면 비정규직에게 존재의 이유는 ‘인정받는 것’이다. 자유와 권리를 가진 자로서 그리하여 책임과 의무를 완수할 수 있는 공동체의 동등한 성원으로서.

독일의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헤겔을 원용하면서 사회의 윤리적인 발전이 기존 사회에서는 범죄로 낙인된 ‘인정투쟁’, 명예회복 투쟁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즉 비정규직의 저항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보편적 권리를 가진 인격체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또한 자신의 노동 및 개인적 능력에 대한 사회적 거부가 반복되는 것에 대한 굴욕감과 분노의 표현이며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인정투쟁이다. 동시에 이것이야말로 사회가 한 단계 높은 도덕적인 수준으로, 선진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이다. 따라서 법치주의 국가는 개인에게 책임과 의무의 완수를 요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를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자유와 권리의 보장을 명시하고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 전자만을 강조하는 것은 ‘법치’가 아니라 그 자체가 특정집단과 함께 하는 것을 거부하는 일종의 폭력이 된다.

1970년 11월 전태일이 노동자들의 명예회복을 요구하며 분신하였을 때 ‘법치’는 책임과 의무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37년 뒤인 2007년 11월의 ‘법치’도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책임과 의무만을 강조한다. 인정투쟁이 아무리 사회의 도덕적 발전의 계기라 하더라도 싸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사람들의 아픔은 찬바람보다 더 살을 에인다. 당신들만의 법치가 아닌 모두의 법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법치를 기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1/11/30 15:42 2011/11/30 15:42
https://blog.jinbo.net/greenparty/trackback/83
YOUR COMMENT IS THE CRITICAL SUCCESS FACTOR FOR THE QUALITY OF BLOG POST
[로그인][오픈아이디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