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나보다 18살이 많은 늙은 시인의 시를 읽다 불현듯 그의 얼굴이 보고싶어졌다.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아주 오래전에 푸른 색 기운이 도는 사진을 그의 시집에서 본 듯하다. 지금 펼쳐본 그의 얼굴은 아직 젊어보이지만 무언가를 후회하는 듯한 우울한 인상이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이 시집이 나온지 거의 10여년.
나는 이제야 겨우 그의 시를 읽는다.
어딘지 어둡고 차갑고 안개가 가득끼여 있는 우울한 호반의 도시처럼.
젊은 날 내가 찾아갔던 그 외롭고 쓸쓸하던 도시의 이미지가 바로 이거구나. 잊지 못하는 것도 큰 병이다. 아이가 둘이라고 했던가.
허허바다
허허바다에 가면
밀물이 썰물이 되어 떠난 자리에
내가 쓰레기가 되어 버려져 있다
어린 게 한 마리
썩어 문드러진 나를 톡톡 건드리다가
썰물을 끌고 재빨리 모랫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나는 팬티를 벗어 수평선에 걸어놓고
축 늘어진 내 남근을 바라본다
내가 사랑에 실패한 까닭은 무엇인가
내가 나그네가 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
어린 게 한 마리
다시 썰물을 끌고 구멍 밖으로 나와
내 남근을 톡톡 친다
그래 알았다 어린 참게여
나도 이제 옆으로 기어가마 기어가마
사랑에도 실패하고 나그네도 되지 못하였으니 얼마나 괴로울까. 그래서 정호승은 똑바로 걸어갈 자신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외침도 자조도 아닌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불멸의 봄노래 ‘봄날은 간다’는 갈수록 부를수록 아프다. 1953년 백설희가 처음 불렀으니 그 후 쉰 다섯 번의 봄을 적셨다. 한영애, 심수봉, 조용필, 장사익 등도 이 노래를 불렀다. 누가 불러도 몸에 감겨든다. 절창이다. 꽃은 남쪽에서 피어 올라왔으니 다시 남쪽에서부터 진다. 꽃이 피어올라온 속도로 봄은 그렇게 가고 있다. 마침 빛고을(광주시립미술관)에서 ‘봄날은 간다’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박영숙의 사진작품 앞에 발걸음이 멎는다. 부엌에서 고등어를 토막내던 중년의 여인이 갑자기 칼질을 멈추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한다. 칼을 든 채 흡사 넋이 나간 듯. 밖에서는 아마 꽃잎이 흩날리고 있을 것이다. 사진 속의 여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 청춘은 지나갔단 말이지. 이렇게 고등어를 썰고 있는데 봄은 가고 있단 말이지. 그런데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꽃향기 는 사라지고, 비린내만 남아있단 말이지. 어머머 어머머, 기가 막혀.’ 작품사진의 제목은 ‘미친년’이다. 그래 이 봄은 많은 사람들을 미치게 하고, 미쳐서 다시 가슴 뛰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