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까지는 하지 않던 트윗터와 페이스북을 올해 다시 했다. 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하다. 시간을 아끼는 방법 중 하나는 컴퓨터를 켜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아예 노트북을 열지 않을 수는 없다. 노트북을 켜지 않을 수 없다면 노트북을 열고 웹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시간을 아끼는 두 번째 방법이다. 물론 이것도 쉽지가 않다. 불가피하게 열어보지 않을 수 없는 메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불가피한 여러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면 선택할 수 최선의 방법은 웹을 열고 메일을 보는 시간을 정하는 것이다. 나는 내일 부터 노트북을 처음 켤 때와 마지막으로 노트북을 껄 때 웹을 열어 메일을 읽기로 작정했다. 그러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닫기로 했다.
트윗이나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면 무의식 중에 자주 웹에 접속하게 된다. 내 글이 누군가의 관심을 끌었는지, 아니면 내 페이스북에 무슨 글이 올라왔는지 확인 하려고 한다. 이건 거의 무의식적이고 일종의 중독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노트북을 하루 종일 켜 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보니 필요한 경우가 아닌데도 웹에 접속하게 된다. 웹이 단순한 스레기통이라고 폄하할 수는 없으나 분명 읽고 쓰는 일보다 시각을 소비하는 방향으로 이용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물론 블로그에 글을 올리기 위해서 웹에 접속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산적이지 못한 일임에도 멍한 상태로 인터넷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은 영혼을 갉아 먹는 짓이라고 단정한다.
사르트르는 "타자는 지옥"이라고 했다. 타자는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나와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다. 필연은 곧 억압이며 구속이며 강제다. 그런데 우리는 필연적으로 타자와 함께 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타자의 불행과 고통을 외면할 수 있다면 타자는 그저 타자로 남는다. 이때 타자는 나와 무관한 존재이고, 나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살 수가 있다면 우리는 냄새나는 오물과 불쾌한 쓰레기 더미에서 나 홀로 깨끗하고 안락한 집을 지어 고고하게 살겠다는 발상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를 경멸해야 한다면 바로 그런 인간일 것이다.
언어는 거울이자 렌즈다. 비춰볼 수도 있고 들여다볼 수도 있다. 생겨나자마자 급격하게 확산되는 말이라면 더욱 그렇다. 비말(飛沫), 상기도, 슈퍼 전파자, 밀접 접촉, 능동 감시, 국민안심병원 같은 용어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의학사전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내 눈길을 사로잡은 새로운 말이 있다. ‘○○번 환자’와 ‘자가(자택) 격리’. 발음하기가 편치 않은 두 새로운 용어를 한참 들여다본다.
6년 전 신종플루 때 감염된 환자를 어떻게 불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번호를 붙이지는 않은 것 같다. 기사를 검색해보았더니 2009년 5월 국내 첫 신종플루 확진 환자는 51세 수녀였다. ‘1번’이 아니고 첫 번째였다. 2003년 사스 첫 추정 환자 역시 ‘1번’이 아니고 40대 남성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환자를 가리킬 때 주로 번호를 사용한다. 내 눈에는 ‘14번 환자’와 ‘35세 남성’은 달라 보인다.
환자에게 번호를 매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감염 시간, 감염 경로를 강조하기 위한 고려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반대로 행정 편의주의의 발로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몇 번 환자 대신 ‘15번째 환자 박모씨’라고 부를 수는 없었을까. 내게는 저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 15번 환자에게서는 인간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15번 환자는 인간이기 이전에 격리시켜야 할 감염자일 뿐이다. 후자에서 번호(서수)는 환자 박모씨를 가리키는 한정사 역할에 그친다. 박이라는 성씨는 그가 우리와 같은 엄연한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 번호를 붙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씨를 붙인다고 해서 환자의 신상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번호 붙이기를 통해 환자를 비인간화하는 행태에는 배제의 논리가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몇 번 환자라고 명명되는 순간, 그는 사회에서 추방당한다. 그 순간 사회는 환자를 마음껏 비난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한다. 몇 번 환자는 이기적이고 몰상식하며 거짓말을 일삼는 파렴치범으로 낙인찍힌다. 비감염자와 감염자 사이의 경계가 확고해지는 동시에 비감염자들 사이에서도 적대감이 형성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적의가 활성화된다.
메르스 예방책 중 첫손으로 꼽히는 손씻기도 마찬가지다. 귀가하자마자 세면대에서 강박적으로 씻어내는 것은 무엇인가. 타인의 흔적이다. 손을 씻는 동안 머릿속에 떠올리는 불특정 다수는 누구인가.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접촉하지 말아야 할 감염 경로일 따름이다. 전염병이 창궐하면 타인이 거대해지고 또 구체화된다. 타인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의식할 수 없는 사이에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손씻기는 타인을 격리시키는 동시에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행위이다. 역설적이게도 전염병이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상호의존성을 확인시켜준다.
환자를 번호로 부르는 (무)의식은 자가 격리에 견주면 사소해보일지 모른다. 자발적으로 외출을 금지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상당수는 강제적으로 ‘감금’되었을 것이다. 저 민주화 시절, 가택 연금에 이어 조선시대의 위리안치가 생각난다. 만일 내가 당사자라면, 그것도 정부 당국이 해당 병원을 늦게 공개하는 바람에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 상황이라면 어떠했을까. 게다가 가족까지 함께 두문불출해야 한다면. 자가 격리 지침에 따르면 생활 용품을 따로 써야 하고,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써야 한다. 가족 또는 동거인과 대화도 할 수 없다. 밥도 따로 먹어야 한다. 상상만 해도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인구 1000명당 병상 수 9.46개로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다. 일본 다음이다. 하지만 1000명당 공공병상 수는 1.19개로 OECD 국가 중 최하위다. 국가가 운영하는 의료시설이 충분하다면, 아니 설령 공공 의료기관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국가가 보다 신속하고 합리적으로 대처했더라면 자가 격리는 아예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가 격리라니. 전쟁이 일어났는데, 국가가 각 가정을 진지로 만들어 각자 전투에 임하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환자 이름 대신 일련번호를 매기는 ‘국가의 마음’과 자가 격리를 대책이라고 내놓는 ‘국가의 마음’이 달라 보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메르스 사태를 지난해 세월호 사태와 동일시한다. 이 같은 견해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선박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최근 메르스 진원지 중 하나인 삼성서울병원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이 나왔다. “우리 병원이 뚫린 것이 아니라 국가가 뚫린 것이다.” 그럴 것이다. 국민의 생명이 뚫린 것이 아니라 국가의 어딘가가 뚫렸을 것이다.
나는 왜 논문을 쓰는가? 이 문제는 여전히 논쟁중이다. 나 자신과 말이다. 대학에서 그나마 비정규교수로 남아있기 위해서,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2년에 한 편이라도 쓸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은 좀 슬프다.
전국 대학에 비정규교수가 10만여명 된다고 한다. 10만 명이 2년에 한 편씩 논문을 쓰고 학회지에 투고한다고 생각하면 1년에 5만편의 논문이 '생산'된다. 비정규교수가 논문을 쓰는 이유는 나와 비슷하거나 같을 거라고 생각한다. 연구성과는 업적이고 업적을 많이 쌓아야 여러가지 측면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논문을 쓴다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이건 나의 불행이자 우리 공동체의 불행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전히 묻는다. 논문을 이렇게 생산하면서까지 대학에 비정규교수로 남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전임교수들은 왜 논문을 쓰는가? 전국대학에 전임교수의 수 또한 8만 여명에 달할텐데, 전임교원과 비정규교수의 논문편수를 합하면 1년에 거의 1만여 편에 이를 텐데 이 논문들은 어떤 가치를 가지는가?
전임교수들이 논문을 쓰는 이유는 세세하기 모르지만 내가 아는 한에서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승급 심사를 위해, 이런 저런 명목으로 연구비를 받기 위해서 일거다. 결국 이런 노문을 연구업적물이라고 부른다. 업적인 셈이다. 무엇을 위해?
그러면 이 논문들은 누가 읽는가? 나는 일주일에 제법 여러편의 논문을 읽는다. 강의 준비를 하면서, 나의 논문과 관련한 주제이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 나는 순수한 학문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논문을 찾아 읽지 않는다. 일전에 동료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논문을 4 사람 정도는 꼭 읽는다고 한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논문 심사위원 2~3명과 자신의 아내, 그리고 나라고 말한다. 물론 나는 박선생님의 논문은 꼭 읽는다. 왜 읽느냐고? 우선 관련 강의를 하고 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나의 학위 논문과 관련해서 읽는다.
인공 지능이 과연 인간을 압도할 위협이 될 것인가는 많은 논쟁이 있는 문제이다. 빌 게이츠나 일론 머스크와 같은 이들은 그 위험을 분명히 인식해야 하며, 인공 지능의 발전에 대해 명확한 제한을 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유명도나 경륜에 있어서나 이에 못지않은 많은 이들은 이러한 걱정은 기우일 뿐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나는 비관론 쪽에 더욱 끌린다. 주머니 속의 스마트폰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내가 인공 지능에 대해 무얼 알아서가 아니다. 인공 지능과 경합을 벌이게 될 인간의 정신노동이 갈수록 왜소해지고 쇠퇴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 때문이다.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AP통신의 기사가 있었다. 애플사의 당기순이익 발표가 있은 직후 이를 분석한 기사였는데, 화제가 되었던 것은 그 기사의 내용이 아니라 그 기사의 작성 과정이었다.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이 쓴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사 작성 프로그램은 애플사의 보고서를 놓고 이와 관련된 수백 개의 리포트와 문서들을 참조해 단 30분 만에 분석기사를 내놓은 것이다. 이는 분명히 컴퓨터 과학의 진보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 정신노동의 쇠퇴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가 정신노동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작업이 총체적인 인간 이성의 복합적이고 미묘한 작업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컴퓨터 프로그램과 다름없이 일련의 알고리즘으로 이루어진 기계적 과정이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이는 회사 실적 보고서에 대한 기사라는 게 원래 그렇게 정형화되어 있는 자료들을 놓고 정형화되어 있는 정보들을 뽑아내는, 뻔하게 정해진 기사라서 그런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신문과 여러 미디어에서 그렇지 않은 기사가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다면 어떨까. 비단 저널리즘뿐만이 아니다. 가장 고단위의 정신노동 산물이라고 할 학술지 논문의 생산 과정과 생산물의 내용은 놀랄 정도로 정형화되어 있고 이러한 경향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핵심 어구와 핵심 논지의 방향을 입력하면 알아서 논문의 초벌을 생산하는 프로그램이 존재한다는, 심지어 그렇게 투고된 논문을 심사하는 프로그램까지 존재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
각종 소프트웨어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매일매일 감가를 겪고 존재가치마저 위협당하는 정신노동의 직종은 그 외에도 무수히 많다. 이른바 제3차 산업혁명의 진전과 그 귀결인 전면적인 자동화(이 또한 오늘날 대단히 고색창연한 용어가 되었다)로 인해 노동이 위협을 받게 된다는 경고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위협은 비교적 단순하다고 말할 수 있는 노동에만 적용되는 일이 아니다. 지금처럼 정신노동이 정형화되고 기계화되는 쇠퇴 과정이 계속된다면, 기자건 교수건 변호사이건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변화는 우리에게 지금 존재하는 노동시장, 보상체계, 교육시스템 전반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다시 생각하고 다시 설계할 것을 촉구한다. 이러한 기술 변화의 흐름을 되돌릴 것이 아니라면, 인간도 사회도 이러한 흐름에 적응해 나가면서 기계와 데이터의 흐름이 아니라 이성과 감성과 육신을 가진 인간만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찾아나가야만 한다.
지금 우리가 상당한 숙련이라고 여기는 능력과 기능의 많은 것들은 조만간 거의 모든 이들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능력이 될 수 있으며, 지금까지 분명히 상당한 정신노동이라고 여겨져왔던 많은 것들이 데이터와 소프트웨어의 조작으로 간단하게 대체될 만한 것이 될 수 있다. 지금처럼 일련의 알고리즘으로 얼마든지 분해가 가능한 정신작용을 기계적으로 훈련시키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며, 그것에 과도한 가치와 보상을 부여할 수도 없게 된다.
기사 작성 프로그램이 쓸 수 없는, 오직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기사는 어떤 것일까. 임용과 재임용에 혈안이 된 대학의 연구자들이 끊임없이 쏟아놓는 종이 덩어리가 아니라 정말로 집단적인 지식의 증가에 기여할 수 있는 논문과 저서란 어떤 것일까. 기계와 소프트웨어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날개로 삼아 이전까지 누구도 가보지 못했던 정신과 생각과 감정의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은 어떤 것일까. 기계적 과정으로 환원할 수 없는, 진정 ‘인간적인’ 활동의 영역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여기에서 떠오르게 되며, 정신노동의 미래라는 문제는 그 질문이 가장 첨예하게 제기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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