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향신문 이대근 논설위원을 좋아한다. 그 사람의 글을 좋아하는데,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다. 나는 이대근 논설위원의 글을 읽으면서 이렇게 명쾌하게 글을 쓰는 글솜씨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이대근칼럼]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는 언제 들어도 좋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 유승희 최고위원의 ‘봄날은 간다’는 한 편의 공포 영화 같았다. 막말 폭언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그걸 말리는 난장의 한가운데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 그 처연한 가락이라니. 

그런 부조화를 영화 <블루 벨벳>에서 느낀 적이 있다. 성적 학대가 펼쳐지는 장면을 바비 빈튼의 발라드 ‘블루 벨벳’이 비단결처럼 부드럽게 감싼다. 시각과 청각의 충돌, 그 어긋남에 매우 심란했다. 기이한 것과 익숙한 것, 역겨운 것과 사랑스러운 것이 동거할 수 있다는 사실에 속이 불편했다. 폭력과 섹스, 정신착란이 뒤섞인 장면에서 로이 오비슨의 감미로운 노래 ‘인 드림스’가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게 흐르며 귓불을 간질이는 몽환적 분위기도 감성에 교란을 일으켰다. <지옥의 묵시록>을 볼 때도 그랬다. 미군이 헬기 부대로 베트남 어촌을 공습하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헬기 부대가 화면을 가득 채우며 끔찍한 살육전을 예고하는 긴장된 순간,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이 장엄하게 울려 퍼진다. 광기와 비극이 영웅적 서사처럼 묘사된 것이다. <시계태엽오렌지>도 청소년 폭력배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성폭행하는 장면을, 떠들썩하게 즐기는 한바탕 축제로 만들었다. 그 상황에서 폭력배 대장이 흥얼거리는 노래가 진 켈리의 ‘사랑은 비를 타고’다.

이런 불쾌감에도 세 영화가 폭력과 범죄를 조장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폭력을 과장된 스펙터클로 드러내는, 흔한 영화적 방법이 오히려 더 폭력에 대한 무감각을 드러낸다. 폭력은 쉽게 목격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것, 예외적 현상이란 인식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그런 폭력은 도처에 존재하는 폭력을 부정하는 폭력이다. 그보다는 아름다운 음악과 폭력의 결합이 빚는 괴기스러움이 오히려 폭력의 본질을 더 잘 드러낸다. 감미로운 노래 때문에 더 선명해진 폭력이 폭력을 폭력적이게 한다. 친숙한 것과 섞이고 일상에 스며들어 은폐되고 있어도 드러나고야 마는, 폭력에 내재한 감춰지지 않는 혐오감이야말로 폭력을 제대로 고발한다.

그래서 음악은 무죄다. 나는 여전히 블루 벨벳, 발퀴레의 기행을 즐긴다. 유승희에도 불구하고 봄날은 간다 역시 계속 불릴 것이다. 천양희 시인이 계간 ‘시인세계’(2004년 봄)에 산 제비 날던 고향 절골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쓴 글이 있다. 봄 소풍 때 선생님의 요청에 그 노래를 구성지게 불렀는데 예쁜 선생님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무슨 슬픈 사연이 있었을까 생각하다 시집간 언니를 떠올렸다. 언니는 사랑하던 사람과 맺지 못하고 중매결혼을 했다. 언니는 친정 올 때마다 뒷동산 성황당과 암자를 찾았다. 성황당 돌탑에 돌을 올려놓고는 무언가를 빌었다. 그리고 암자로 가는 고갯길을 넘어갈 때 언니의 분홍치마가 바람에 휘날렸다. 앞서 가던 언니는 나지막이 봄날은 간다를 부르며 울고 있었다. 이런 추억은 한국인 누구나 공유하는 감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의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노래를 부른다는 건 한국인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몇 해 전 인사동 한 선술집에서 선물로 받은 CD 두 장에는 서른세 개의 봄날은 간다가 담겨 있다. 가수도, 음색도, 리듬도, 장르도, 녹음한 시대도 다른 서른세 곡을 다시 들어본다. 체념한 듯 스산한 목소리의 한영애가 뿜어내는 데카당스. 슬픔을 자극하는 조용필의 비음(鼻音)이 격발하는 주체할 수 없는 한(恨). 너무 섬세해 상처받을 것 같은 심수봉의 여린 가슴 저 밑바닥에서 울리는 작은 떨림의 물결. 남성다움의 과잉으로 아픈 가슴을 감추는 배호의 그 잘난 허세. 깊은 사연을 가슴에 묻고 있는 것 같은 굵은 목소리와 가녀린 정서가 혼성을 이루는 문주란의 미묘함. 사라지는 것에 대한 장사익의 처절한 절규. 
 

하나의 노래가 서른세 개의 노래로 변주되는 동안 우리들의 삶도 그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삶은 다 다르지만 알뜰한 맹세에, 실없는 기약에, 얄궂은 노래에 봄날이 가듯 어떤 인생도 흘러간다. 누구의 봄도 머물지 않는다. 열아홉 시절이 황혼 속에 슬퍼지는 건 황혼이 되어서야 열아홉이 절정이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 사라질 때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봄이 왔을 때가 아니라 봄이 갈 때 봄을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왜 떠나고, 소중한 것들은 왜 사라지고 마는가? 봄날은 간다는 그 상실을 목 놓아 부르지 않는다. 삶은 봄이 아니라, 봄이 가는 것을 아는 것이고, 그걸 노래할 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모래가 손 안에서 빠져나가는 것과 같은 소멸과정이다. 그러나 소멸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혜와 성찰을 남긴다. 고은의 ‘그 꽃’은 이렇게 노래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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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5 15:43 2015/05/25 15:43

대학에서 비정규직교수로 강의한지 올해 11년이 되었는데, 여전히 나는 강의를 참 잘 못한다고 생각한다. 학기말 실시하는 강의 평가가 썩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어중간한 것도 내가 강의를 세련되게 잘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대학의 강의 평가 시스템이 정확하다거나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의 성적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로 어쩔 수 없이 강의 평가를 한다고 한다. 물론 진지하게 평가에 임하는 학생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평가를 위한 시스템은 엉망이다. 천편일률적으로 보일 수 있는 평가 문항들은 교수의 강의 전체를 제대로 평가하기에는 부족할 뿐 아니라 사실, 엉망이다. 대학의 강의 평가는 그저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도 얼마 전 신문에는 어떤 대학은 계약직 교수의 강의 평가가 4.7 이하일 경우 재계약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5.0 만점에 말이다. 나는 그 대학의 평가 시스템과 평가 항목이 궁금해졌다.

하여튼, 내가 강의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떤 분들은 강의가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말한다. 비록 비정규직 교수로 대학에서 연구하고 강의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나는 강의가 즐겁다기보다 호구지책이라는 측면이 더 크다. 사실이다. 내가 강의에 이렇게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내 강의가 재미있지 않을 거라는 건 당연하다. 학생들은 최근 부쩍 열의를 잃어간다. 나는 최선을 다해 강의를 해도 학생들은 시큰둥한 표정이거나 아예 스마트 폰을 들여다 보거나 고개를 꺽고 자거나, 어떤 학생은 그냥 엎드려 자기도 한다. 나는 몇 년 전부터 그런 학생들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성인인 학생들에게 그런 잔소리를 한다는 게 나 스스로 불편하기 때문이다.

학기 초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바쁘다. 왜 그런지 매번 생각해 보지만 별 이유 없이 바쁘다. 그래서 종종 강의 준비를 게을리 하게 된다. 강의가 매끄럽게 잘 진행될리 만무하다. 다행인지 학생들도 학기초에는 바쁘다. 여러 가지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도 강의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요즈음 나는 대학을 떠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대학을 떠나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내가 대학에서 비정규직 교수로나마 남게 된 것은 순전히 나의 의지가 아니었다. 대학원을 마치고 그냥, 말 그대로 그냥 자연스럽게 대학에서 교양강의를 맡게 되고 그러면서 몇 년이 흘러가고 어느새 나는 대학에 눌러 앉아 대학이 아닌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대학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는 도서관에서 마음껏 책을 빌려 읽을 수 있다는 것과 조금 연체를 할 수도 있다는 것, 이런 사소한 것들인데, 여자친구는 내게 말한다. 그런게 이유라면 일반 시민으로서도 언제든지 가능하다고 말이다.

이래 저래 고민이 많은 나이가 된 것이다. 이런 저런 고민들이 마치 내가 넘어야 할 산처럼 쭉 널어서 있다. 이산 저산 산을 오르는 재미는 이미 지났다. 나는 20대 청년이 아닌 것이다. 이제 중년이다. 곧 50이 되리라. 그때 나는 여전히 대학에서 학생들을 마주보고 있을까? 나는 그런 나의 미래가 두렵고 괴롭다. 나는 내 인생의 어디쯤 서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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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9 16:19 2015/03/29 16:19

시인 김상용은 왜 사느냐고 물으면 웃는다고 했던가. 뜬금없는 물음이지만  불현듯 이 물음이 나에게 떠 올랐다. 올바르게 사는 게 어떤 건지는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왜 사느냐고 물으니 나는 좀 난감해졌다. 나는 왜 사는 것일까? 그저 나도 생명이니 목숨이 다할때까지는 살아야 하기 때문일까? 나는 왜 사는 것일까? 나는 왜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런 물음을 던지니 난감하기 짝이 없다. 

 

그 동안 매번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가를 묻기만 하고 정작 중요한 살아가는 의미에대해서는  외면하고 살아온 셈이다. 나는 지금 불현듯 떠오른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없다. '적절하게'가 아니라 말 그대로 '완전히'  대답할 수 없다. 그래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내가 계속 살아가야 한다면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인가? 산다는 건 무엇인가? 이런 물음에 답할 수 있도록 애써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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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8 16:35 2015/03/28 16: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