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생이 지각생에게

잡기장
그를 처음 봤을때를 기억해? 인사를 했는데 널 흘낏 보고 가볍게 인사를 받고는 모니터만 계속 바라봤지. 옆얼굴을 조심스레 살펴봤어. 뭔가 심통이 난 것 같기도 하고. 원래 무심한 사람인가. 넌 그때 그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도 기억해. 왜 그런거야 하고 중얼거리며 신경을 껐겠지. 오바 친절로 사람들을 대하던 네게는 그런 대접이 익숙치 않았어. 너같으면 보통 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나 그러겠지. 그런가보다 하기로 했어.


그 후로 몇번 마주칠 일이 있었지만 별다른 생각은 없었지. 별로 예뻐 보이지도 않고. 뭔가 불만에 찬 듯한 표정. 감각은 있어보이네. 나쁜 사람 같진 않은데. 그때 넌 누군가를 혼자 좋아했다가 안 좋게 끝나던 때라 힘들었지. 일에 치이고 조직 분위기도 안 좋았어. 밖으로 나돌기 시작할때였어.



그때 넌 블로그를 쓰고 있지 않았어. 설치형 블로그를 몇번 써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런 걸 써보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지. 제대로 글이란 걸 쓰진 않고 묵혀뒀어. 학교 다닐때 날적이 쓴 거 말고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글을 쓴적은 거의 없었어. 블로그보단 위키에 더 관심이 많았지. 그게 기술적으로는 더 흥미 있었으니까. 그러다, 너는 그 사람의 블로그를 보게 된거야.

처음에는 참 솔직하구나. 꾸밈이 없네 하는 생각이었지. 그런데 보다 보니 참 재밌어. 신기했고.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을까? 기발한 문구를 써서 웃기는 것도 아니고, 미사여구를 붙여 아름답게 꾸미는 것도 아닌데 보면 볼 수록 뭔가 생생하게 와 닿는 느낌이 놀라웠어. 그때만 해도 넌 너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어디서던 쭈삣쭈삣하며 당당히 말하지 못하던 때였어. 너 스스로 뭘 하고 싶은지 알지 못했고, 자신없고 위축되어 있었지. 어디가서 사람들에게 너가 좋아하는 걸 말하지 못하고 있었어. 혼자 연습장에 끄적이다간 사람들이 볼 수 없게 덮어두고, 처박아 뒀지.



너가 보기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부러웠어. 스스로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당당히 말하는 모습은 나와는 동떨어진, 멋있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했지. 물론 자기만 옳다고 하며 함부로 거칠게 말하는 건 좋아하지 않아. 그런데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 같더군. 그 사람이 놀랍고, 너도 그렇게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됐던거야.

블로그를 만들었어. 하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웠지. 다른 사람들의 글을 보며 감탄하며 넌 여전히 위축되어 있었어. 별로 네 자신의 이야기랄게 없는 것 같았어. 각박하게 살다보니 별로 내세울 것도 없고, 뭐 특별한 이야기 재미난 이야기도 없는 것 같았지. 그나마 재밌겠다 싶은 학교때 얘기하고, 지금 고민하고 있는 걸 조심스럽게, 아주 겸손해 보이며 애쓰며 조금씩 얘길 하기 시작한 거야. 그러던 어느날 밤이었어.



그의 블로그를 보면서 감탄하고 부러워하며 계속 이전글들을 보기 시작했지. 지금은 기억도 거의 안나. 하지만 읽다보니 놀랍더군. 어찌 보면 무뚝뚝하고, 자기 주장 강하고, 당당하고 그리고 유쾌하고 그런 사람으로만 보였던 그에게서 다른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어. 그 이미지가 실제로 그가 스스로 한 말에 들어 있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넌 그 이미지를 떠올리게 됐어. 어두운 사무실.. 그는 혼자 남아 있었지. 모니터 앞에. 그런데 그는 울고 있어. 책상에 엎드려 온몸을 떨면서 슬피 울고 있어. 그 모습이 그냥 눈에 보이는 것 같았어.

넌 견딜 수 없었지. 너도 그때 혼자 사무실에서 밤새 일하던 중이었을꺼야.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지. 그리고는 밖을 내다봤지. 한참동안이나. 가슴이 답답하고 메어왔어. 당장 뭔가 해야할 것 같고, 어디론가 가고 싶어. 그가 있는 곳으로. 가서 뭘 할 수 있을지 아무 생각도 없지만.. 그리고 그때부터 시작됀거야.



넌 그 사람을 만날 기회가 종종 있었지. 그런 기회가 되면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어. 다른 모든 일은 그걸 위해 재조정됐지. 그날 이후로 그는 네게 다른 사람이었어. 안 좋게 보였던 것이 다 좋게 보이고, 그의 모든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지. 그리고 왠지 그도 네게 관심이 있을거라는 생각을 했어. 그때부터 넌 그의 주위를 계속 맴돌기 시작했지.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어.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똑바로 잘 쳐다보지도 못했고, 말도 잘 건네지 못했지. 바보가 된 것 같았어. 어찌나 긴장했던지..

그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갑자기 에너지가 샘솟는 것 같고, 자신있게 행동하게 됐지. 마치 딴 사람이 되고 있는 듯했어.  평소에 생각은 했지만 실천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기 시작했고, 바뀌고 싶다고 생각만 하지 실제로는 늘 그자리에 맴돌던 것들이 정말로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것처럼 보였어. 그가 갖고 있는 생각, 하는 말, 행동은 다 너를 변화시키기 시작했지. 그래서 너는 조금씩 자신을 갖게 된거야. 조금씩 더 자유를 있는 그대로 추구하게 된거야. 조금씩 더 당당하게 말을 하기 시작한거야. 지금의 네가 할 수 있는것, 하고 있는 것,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은 너 혼자만의 것이 아냐. 대부분은 그가 네게 준것이기도 해.

------------

너가 그때 바로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경애"의 감정. 지금껏 주위를 맴돌면서 말하지 못했지만, 말하고 싶다는 걸 알아. 네가 얼마나 그 사람에게 깊은 영향을 받고 있는지. 힘을 얻고 있는지. 그가 멀어진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괴롭고 주저앉고 싶어지는지.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자신을 숨겨오며, 이제는 그런 말을 할 기회가 점점 사라지는게 아닐까 걱정을 하고.


너는 이제 예전의 네가 아냐. 넌 달라졌고, 계속 달라지고 있지. 여전히 작은 일에 크게 요동치며 희망과 절망을 왔다갔다하고는 있지만, 옛날 같으면 이런 말도 부끄러워 할 수 없겠지. 이렇게 차분하게 얘기할 수 있다니. 사실 지금도 망설이고 있다는 걸 알아. 비밀글로 할까, 공개할까. 하지만 어떻게든 그에게 이 얘기를 들려주고 싶군. 그가 원한다면 더 자세히.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06/12 03:45 2007/06/12 03:45
Trackback Address :: https://blog.jinbo.net/h2dj/trackback/449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