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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8/23
    함께 가자...
    홍킹
  2. 2005/08/17
    정동진영화제 - 플레이 테니스(6)
    홍킹
  3. 2005/08/17
    블로그에 글 쓰기(6)
    홍킹
  4. 2005/08/16
    계급 유전(5)
    홍킹

함께 가자...

이 글은 탈주선님의 다시 제자리로

           지후님의 익숙해지지 않는 이별들에 트랙백을 건 글입니다.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은 이정표도 길도 없는 황량한 황무지.
추운 밤공기의 외로움을 감쳐줄 집도 절도 없는 빈털털이
애써 뒤돌아 가려는 이들을 붙들지는 않아.
그래서는 안되는 거야..."

 

오랜만에 황군께서 시상을 발동해서 글을 남기긴 했지만...


그런데,
뭐가 안되는 걸까?
여기가 황량한 황무지라서?
아니면 죽도록 고생해 봐야 빈털털이 밖엔 안돼서?

 

사실 황군 생각만 하면 틀린 얘기가 아니라서 ^^;; 가슴이 더 찌릿찌릿 하지만...
이번엔 좀 경우가 다르다고 생각해.

아직 할 말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남아 있잖아?

 

그걸 블로그에 다 남길 순 없겠지.
대신 노래나 한 곡 띄워야 겠다...

 

 

 

   

♪ 함께가자 우리 이 길을 (출처:피엘송닷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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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영화제 - 플레이 테니스

썩은 돼지님의 [늦었지만 정동진 영화제 넘 좋았다] 에 관련된 글.
* 나도 늦었지만 정동진 영화제 넘 좋아서...

 

영화제라는 데에 별로 가보진 않았지만 정동진영화제처럼 마음 편한 축제를 느낄 수 있는 곳은 없을 것 같다. 마치 좋은 영화보고 서로 나누고 놀고 즐기는 독립영화인들의 잔치 같았다.

 

정동진 영화제 초청 작품들은 훌륭했다. 공무원노조 동해시 지부의 이야기를 다룬 최은정 감독의 다큐가 가장 좋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애니메이션들이었다. 강한 인상을 남긴 양성평등. 여성 픽토그램이 비상구, 엘리베이터, 신호등의 남자만 있는 픽토그램에 자신도 함께 들어간다는 2분짜리 영상이다. 짧은 상영시간에도 일상의 성차별 문제를 다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외에도 여러 작품들이 많았지만 가장 신선했던 것은 '플레이 테니스'라는 작품이었다.

 



 

 

"실사 사람이 그린 그림(2D 캐릭터)이 사람이 나간 틈을 타서 컴퓨터 안 3D 캐릭터와 테니스를 치기 위해 궁리를 하다가 결국 스캐너를 통해 컴퓨터 모니터 안으로 들어가 서로 테니스를 치고 논다. 그러나 그들은 곧 판정시비로 서로 다투게 되는데 밖에서 이를 지켜보던 장난감 경찰인형이 판정을 내려준다. 모니터 안의 둘은 테니스 심판으로 경찰인형을 불러들이려고 고민을 하다 캠코더로 경찰인형을 모니터 안으로 불러들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방을 비웠던 실사사람이 들어오면서 들킬 위험을 맞게 되는데 셋이서 힘을 합해서 슬기롭게 위기를 벗어난다."(작품 소개 중에서)

 

이 작품에는 사람(실사) 이외에 3개의 캐릭터들 즉, 종이그림, 컴퓨터안 캐릭터, 경찰인형이 등장한다. 이 애니메이션이 재미있었던 것은 이 캐릭터들이 각각 차원을 표현한다는 점 그것도 단순히 점, 선, 면, 부피의 차원만이 아니라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의 차이까지도 표현한다는데 있었다.

 

종이그림은 대표적으로 2차원의 공간을 나타내고 그 한계 또한 그대로 갖고 있다. 컴퓨터안의 캐릭터와 경찰인형은 3차원을 나타냈는데 이 둘은 결정적으로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의 차이를 표현하였다.

 

공간을 이동하는 수단(한계를 극복하는 방식)도 각각 다른데 스캐너는 2차원을 가상공간으로 이동시키는 수단으로 등장하고, 캠코더는 3차원의 사물을 컴퓨터 안으로 이동시킨다.

 

다른 면에서 보면 이 작품은 현실과 가상공간의 긴장을 표현하고 있다. 모니터 안의 세상과 모니터 밖의 세상. 뭔가를 감시하는 실사 사람과 컴퓨터 그래픽으로 표현된 3개의 캐릭터들이 갖는 긴장은 결국 현실과 디지털 공간의 긴장을 표현한다. 하지만 작가도 자평 했듯이 그런 긴장들이 '디지털의 흐름 속에 융화되어 가는 모습'으로 결론 짓고 있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역시 영화란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보는 가에 따라서 그 느낌이 한층 다른 것 같다. 그래서 영화 평도 제각각 이겠지만 한 여름밤 모깃불 날리는 별빛아래 종종 밤기차 지나가는 것을 배경으로 느끼면서 보는 영화란 더 남다르지 않을까 싶다.

 

정동진독립영화제, 매년한다고 하니 내년에도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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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글 쓰기

 

블로그... 만들라고 해서 1년도 더 전에 만들긴 했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말이야... 자기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정말로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블로그 같은 것을 잘 할 수 있을지, 마치 단체 기관지들처럼 정제되고 엄선된 글들만 점잖게 올려서 블로그 분위기 죽이는데 한 몫 하지나 않을지 적잖이 우려가 되어서 무려 1년 동안이나 아무 글도 올리지 않았다.

 

작년에 another0415를 열고 운영하면서 사실 반성 많이 했었는데...
내가 얼마나 나를 드러내지 못하고 모든 사물과 사건들을 객관화시키면서 일반적인 글만 써 왔는지 뼈저리게 느꼈었다. 3인칭 시점에 그것도 전지적 작가 시점의 글쓰기에 익숙해 있던 나로서는 1인칭 시점의 글을 쓴다는 건 거의 고문에 가까웠다. 게다가 설명문과 선언문에 익숙해 있던 사람으로서는 수필 형태의 글을 써야 한다는 걸 알았을 땐 포기하고도 싶었다.

 

아무튼 블로그에 글을 쓰기로 했고 글을 쓴다. 물론 모든 게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지만 맘 편한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변해야 하고 혁신해야 한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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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유전

노동자의 자식들이 노동자가 되는 세상, 자본가의 자식들이 자본가가 되는 세상. 뭐 그리 이상할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씁쓸한 느낌만 가득할까. 수능시험 격차가 강남-비강남권은 32점, 강남-지방은 43점이나 차이가 났다는 결과를 두고 언론에서 또 호들갑이다. 가난이 교육불평등을 낳고 있다는 것인데... 대학입학시험 하나로 인생의 큰 줄기를 결정하게 되는 로또식 수능도 문제긴 하지만, 있는 자식들은 있는 곳으로, 없는 자식들은 없는 곳으로 가는 일이야 당연한 결론이 아닐까? 적어도 2005년의 한국사회에서는 그래 보인다.

 

대통령이라는 사람. 아픈데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국민이 있는 나라,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하는 국민이 있는 나라는 나라도 아니라며 입만 열면 빈곤해결, 양극화 해소를 떠들고 다니지만 결국 해 놓는 일이라고는 교육개방, 영리의료법인 허용이나 하고 있으니 어떤 기자 말대로 그 입을 어떻게 다물게 해야 할지 걱정이다.

 

가난이 차별하는 대물림은 교육만이 아니다. 한 달쯤 전에는 어느 중학생이 촛불을 켜 놓고 자다가 화재로 참변을 당했다. 작년 겨울에 난방비가 없어서 전기장판으로 겨울을 나야 했는데 이것 때문에 전기요금이 너무 많이 나와서 전기가 끊겼다더군. 겨울철 난방비 때문에 여름에 죽어야 하다니...

 

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대물림되는 것은 가난이 아니라 계급이다. 오늘 발표된 교육격차가 지역간 격차나 소득격차로 문제를 축소해서 보고 있지만, 결국 결정되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이고 그 인생은 부모의 능력에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노동자 농민의 자식은 노동자나 농민이 된다. 특출난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도 결국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심어놓은 유산은 여기에 더한 차별을 가하고 있다. 정규직 노동자의 자식들은 다시 그 회사에서 정규직으로 뽑아 가는데, 비정규직 노동자의 자식들은 여전히 비정규직으로, 이주노동자의 자식들은 이주노동자로 살아가야 한다.

 

'기회의 평등'을 이야기했던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현실을 보면서 뭐라고 할 것인가?

 

 



<성명서> 정부는 교육격차 해소와 교육복지 실현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라 

광복 60년을 맞이하여 한국 사회는 분단 극복과 함께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건설하라는 시대적 요구를 부여받고 있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의 문제는 더 이상 방치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이라는 그늘 밑에 극빈층이 500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일하는 사람의 절반 이상을 비정규직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이미 중산층의 존재는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교육, 의료, 주택, 결혼 등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이제 10: 90의 구획으로 나누어지는 사회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은 더 이상 사회적 이동을 위한 통로가 될 수 없게 되었다. 아니 최근 잇달아 발표되고 있는 연구 결과는 오히려 교육은 계층재생산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김경근 교수가 전국 교육연구소 네트워크에서 발표한 "한국사회의 교육격차" 에서는 수학능력고사의 평균이 강남-지방 읍면학생 사이에 43점차가 나타나는 것을 밝히고 있다. 대학 입학시험에서 가장 결정력이 높은 수학능력고사에서 지역과 계층 간의 교육격차가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지역 내에서도 강남과 비강남 지역의 점수 격차가 32점에 이르는 것은 국가가 주관하고 있는 수학능력고사가 사교육에 얼마나 노출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김현진 중앙고용연구원 선임연구원이 2003년 중 고생과 대학(원)생 등 1198명을 대상으로 가구 소득별과 부모의 학력별, 거주 지역별로 월평균 사교육 지출을 조사해 분석 결과에 따르면 서울 강남권(강남·송파·서초구)의 가구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50만원 이상이 거의 절반이나 됐다. 반면 서울지역 비강남권은 50만원 미만이 84.5%로 대조를 보였다.

 

교육이 계층 재생산의 통로가 되고, 교육의 결과가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좌우되는 사회는 봉건 세습 사회에 다름 아니다. 더구나 이러한 결과는 유아 단계에서부터 구조화되고 있다. 학교에 들어가기 이전에 적어도 "출발점 평등" 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가치조차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특목고 진학을 위한 대비반이 일부 지역에서는 초등학교 4-5학년부터 만들어지고, 강북 지역에 있는 특목고 학생의 대부분은 강남지역이 차지하고 있다. 평준화 정책을 유지하겠다던 노무현 정부에 들어와서 지방자치단체마다 특목고와 외국인학교,공립형 자율학교 등, 특수 계층을 위한 학교 증설에 열을 올리고 있다. 정부의 정책이 이러한 교육 불평등을 구조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 헌법은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은 부모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교육받을 기회가 결정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이 고착화될 경우에 우리 사회는 남북 분단과 함께 또 하나의 분단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어제 광복 60주년 경축사에서 우리 사회의 양극화 문제에 대한 해결 방침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의 양극화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양극화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모든 이들에게 질 높은 양질의 교육을 정부와 사회에 의해 사회적 기본권으로 부여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유아 교육단계부터 진정한 공교육화가 이루어져야 하고, 적어도 고등학교 교육을 의무교육 단계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

 

둘째 계층 간 지역 간의 교육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가칭 교육격차 해소와 교육복지 실현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여야 한다. 시 군 구 지방자치단체의 교육경비 보조금의 격차가 서울의 경우에도 강남과 강북지역의 차이가 매년 수십억 원에 이르고 있는 모순된 상황을 시급히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셋째, 이를 위해서는 노무현 정부가 국민에게 약속한 교육재정 6% 확보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작년도에 1조억원이 넘는 세수 결함으로 오히려 교육재정은 악화되고, 시 도 교육청은 빛을 얻어야 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 한 노무현 정부는 계층간 지역간 교육격차를 심화시킨 정부로 평가될 것이다.

 

2005년 8월 16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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