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가을의 유서

이번 달 페이퍼를 교보에 앉아서 잠깐 보다가, 주제인 가을의 유서를 보고, 문득 7년 전에 어떤 기억이 떠올라서. 유서라기 보단, 그냥 넋두리에 가까운 글. 사실 막상 유서를 쓰려고 보니, 별 달리 남겨 줄 것도 없고 써 놓을 만한 업적ㅋㅋ도 없어서, 그 어떤 기억이 나를 지배했던 며칠을 생각하며 끄적끄적.


아직 기억해. 그 날, 수유역 4번 출구의 그 계단. 교복을 입은 채 깔깔거리던 나를 멈춰서게 했던 그 순간을. 쓰러져있던 그 남자. 계단을 뒤덮었던 피. 부서진 머리. 그리고 비명소리와 비릿한 피 냄새. 부서진 그의 머리를 감싸며 울부짖던 한 여자. 그 때부터였어. 언젠가 내가 죽는다면 계단에서일 거라고 생각한 건. 어느 순간 나도 그처럼 계단 한 모서리에 머리를 박은 채 뇌를 드러낸 채 죽고 말거라고 말야. 그래서 계단을 두려워 했었나봐. 언제고 바닥으로 뒹굴어버릴 것 같아서, 바닥에 버려진 처참한 내 광경이 보이는 것 같아서. 가을이라 다행이야. 난 가을에 태어나서 좋았어. 아마 가을에 죽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 단지 걱정이 되는 게 있다면 오늘 아침 예쁜 속옷을 입고 나왔을까, 가방엔 숨겨야 할 만한 건 없나, 뭐 그냥 그 정도야. 그리고 유서 같은 걸 미리 써 놓았으면 좀 편했겠다 하는 생각. 사실 특별히 할 말이 있을까 싶긴 해. 가진 게 별로 없으니 누군가에게 물려줄 것도 나눠줄 것도 마땅치 않으니까. 그저 나를 좋아해 주었던 사람들에게 고맙고, 이런 식으로 인사하게 되어서 미안하다는 것 정도는 말해야 겠지. 하지만 그들 중 누군가는 내게 계단을 더 조심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어야 했어. 내 물건은 원하는 사람이 다 가져가도록 해. 그리고 남는 게 있다면 필요한 곳 어딘가에 기증해줘. 그리고 내 컴퓨터 속 파일은 모두 지워버려줘. 내 일기장이며 수첩도 다 태워줘. 온라인에 있는 것이든, 오프라인에 있는 것이든 내가 없는 곳에서 내 글을 누군가 마음대로 해석해대는 건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특히 심리학적 분석이니 뭐니, 의사소통의 부재니 이런 말을 붙여놓을 거라면 더더욱. 내가 찍었던 사진도, 내가 찍혀 있는 사진도 모두 나와 함께 태워줘. 혹시 모르잖아. 영화 원더풀 라이프처럼 한 가지 순간만 영원히 기억해야 할지도. 사진을 가루로 날려주면 문득문득 그 기억들이 날 거야. 행복한 기억이 아니더라도 필요할 것 같아. 행복한 기억이란 적어도 약간은 불행한 기억이 있어야 그 빛을 발하는 법이니까. 나누어 줄만한 재산이 많지 않다는 건 이런 순간엔 꽤나 좋은 일이구나. 별로 걱정할 것이 없잖아. 내 돈 가지고 싸울 만한 사람도 없을테고. 통장에 남아있는 돈이 있다면 필요한 사람이 가져. 아마 얼마 없을 테지만. 웃는 얼굴이 예쁜 사람이고 싶었어. 사실은 하고 싶은 일도 많았어. 좋은 사람들과 재밌는 일들을 만들어보고 싶었어. 이제 와 아쉬워. 부끄러운 내 마음이 말하지 못했던 것들, 겁이 나서 덤비지 못했던 것들, 다 말하고, 다 해 볼 걸 하는 후회가 돼. 이제 늦어버렸지만. 후회란 늘 그렇게 늑장을 부리기 마련이지. 계단이 차가워. 너무 추하게 쓰러져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돼. 오늘 화장을 제대로 하고 나왔었나, 한 쪽 구석이 튿어진 구두를 신고 나온 거 같은데. 내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답답해. 꽤나 멋진 모습으로 이별하고 싶었는데. 당신에겐 내 말이 들릴까? 바닥에선 은행냄새가 나. 가을은 다 좋았는데 이 냄새는 싫었어. 가을 거리에 진동하던 은행 냄새, 그리고 그 노란 빛. 이 은행은 누구 발에 밟혀 이 계단까지 왔을까. 이제 내 몸도 밟혀 이런 냄새가 나겠지. 당신은 지금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늘 그랬듯이 늦으려니, 그냥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을까. 당신의 얼굴이 꼭 보이는 것 같아. 당신의 노래가 듣고 싶어. 애달픈 노랫소리에 잠깐 동안만 엉엉, 울었으면 좋겠어. 지금이 나쁘다는 건 아냐. 그저 아주 잠시 동안만, 그러고 싶어. 차가운 계단 바닥에 얼굴을 댄 채로 따뜻한 눈물을 조금만 흘렸으면 좋겠어. 버선코를 닮았다는 예쁜 꼬마아이의 그 가락에 맞춰서. 이제 정말 안녕의 시간이야. 날 아는 모든 사람들, 부디 모두 행복해. 당신들 덕분에 난 참 행복했어. 고마워. 안녕.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