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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두세시간씩 지각하는 그녀에게 조직에서는 반성문(?)을 요구했다..
몇가지 공동 프로그램을 제외하고는 상당한 자율성이 보장되고 비교적 출퇴근 개념이 자유로운 공간이었지만 전체가 약속한 프로그램을 그녀로 인해 진행하지 못하는 사례가 반복되면서 다른 구성원들이 더 견디지 못하고 요구한 것이었다.
한달여만에 제출한 그녀의 넉줄 짜리 반성문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선배들이 잘못했다 하니 잘못한 거 같다.. 앞으로 늦지 않겠다' 였다.. 딱 저 문구는 아니었으나 그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그 글을 그렇게 해석했다..
그녀에게 요구한 것은 말이 반성문이지 반성문이 아니라
1. 다른 구성원들이 제기하는 문제가 무엇인가? 또 문제제기의 이유는 무엇인가?
2. 그 문제의식에 본인도 동의하는가?
3. 동의한다면 그 원인은 무엇이며 그 원인을 제거하고 문제의 재발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4. 동의하지 못한다면 다른 구성원들의 문제 제기에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고 설득할 것.. 이었다.
더불어 절대 '잘못했다 잘하겠다' 라는 식의 반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 프로그램과 약속이 진행되고 유지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자신의 주관적인 입장을 객관화시키고 대안을 담아야 함을 주지했음에도 한 달만에 나온 그녀의 반성문은 딱 거기까지 였다.. 다시 요구한 반성문은 몇 달이 지나도 그만 둘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몇달을 그것을 잊지 않고 계속 대화하면서 요구하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일이었지만 말할 때는 고개를 까닥거리며 진심으로 알았다는 착한 눈빛을 해놓고서는 그렇게 버티는 그녀의 끈기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그녀의 생활은 물론 개선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출근 시간으로 변경된 이후에도 언제나 그녀가 타는 차만 문제가 발생하고 그 노선만 막히고 갑자기 배탈이 나는 상황은 여전했다.
그녀는 우리가 제시했던 네 가지 질문에 대해 고민을 하긴 했었던걸까?
다른 이들의 문제 제기에 동의하지 않아서 다른 질로 고민을 했거나 고민조차 시작할 수 없었다면 왜 눈물콧물 쏟아부어가며 그녀와 소통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말할 수 없었던 것일까?
차라리 '약속 시간 늦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그래요.. 내가 늦으면 다른 사람들은 다른 일 하다가 내가 왔을 때 프로그램 진행해도 되는 거 아녜요?' 라고 말했었다면 오히려 더 받아들이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일단! 무조건 잘못했다.. 라고만 할 뿐이었다. 왜?
그때의 판단은 진지하게 다른 구성원들이 느끼는 문제점을 공유하고자 노력하기 보다는 사과 몇마디로 그 상황을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녀에게 우리의 문제제기 자체가 희한한 별난 일로 받아들여졌음이 분명했다. 그녀와 함께 하기 위해 기울였던 다른 이들의 노력에 대해 주의 기울여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사람이 나쁘다거나 모자라서가 아니라 함께 무엇인가를 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녀가 활동을 그만 둔 이후에야 비로소 마음 편하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얼마간 안보면 그립기까지 하고 누군가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면 도시락 싸들고 가서 함께 싸워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심지어 양다리 걸쳤던 그녀의 남친을 어떻게 테러할 것인가를 두고 몇날며칠 같이 고민하기까지 했었다. 왜 같은 지향을 가지고 어떤 일을 도모할 수는 없었을까? 이렇게 즐겁게 만날 수 있던 그녀를 왜 조직에서는 그럴 수 없었던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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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발생했던 날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에 그녀는 어렵게 자신이 성폭력 당했음을 알려왔다. 그녀가 요구했던 것은 사과문이나.. 사건의 공개나..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 사업과 관련된 모든 기획자들과 참여자들이 양성평등교육을 받고 토론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 과정을 통해 이후에 유사한 일이 재발될 수 있는 물리적 상황을 철저히 봉쇄하는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여 사업을 기획하기를 바랬었다.
가해자는 첫 날 흔쾌히! 자신의 가해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다음 날부터 그는 말바꾸기를 시작했다. 대책위의 몇가지 주의사항을 지키지 않으며 여기저기 자신의 입장을 변론하고 다녔다.. 그러다 어느 날엔 인터넷 상에 자신의 가해사실을 인정하는 글을 올렸다. 전후과정을 모르는 다수의 사람들은 그 글만을 접하고 그를 동정하거나 대책위가 너무 혹독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대책위와 메일을 주고 받으면서 반성과 부인을 반복하더니 몇 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인터넷 상에 자신이 책임을 통감하며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해버렸다. 그녀가 요구했던 과정들은 가해자의 갈지자 행로에 따라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에게 계속 기회를 주고자 하는 너그러움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대책위는 그때까지만 해도 예정에 없던 사건전말의 공개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도 잊을만하면 뜬금없이 나타나고 또 뜬금없이 대책위에 자신이 반성하고 있으며 대책위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전해오곤 한다.
그가 끊임없이 반복했던 '내가 잘못했다 반성한다 사과한다'는 것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왜 그의 끊임없는 반성의 언사들을 그녀는 물론 대책위 사람들조차 받아들 수 없었던 것일까?
그가 최우선으로 했어야하는 일은 반성문이 아니었다.
제기된 사건에 대한 정확한 인지와 인정..
거기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행위가 그녀에게 어떤 위해를 가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을테고 반성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사건에 대한 인지와 인정도 없이 어떤 사과가 가능할지 나는 의문이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과는 사과를 위한 사과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진심어린 사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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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
그의 사과문을 보는 순간 난 참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누구도 당신은 반성하시오.. 당신은 가해자요.. 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들 조심스럽게 '.. 평화기행'을 읽으면서 느꼈던 자신의 불편함과 공포를 이야기하며 그 글이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를 알고 싶어했다. 나는 그의 첫 사과문을 읽으며 전제되어야 할 과정들을 훌쩍 뛰어넘어 앞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더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번째 그의 글을 접하면서.. 점점 더 불편해졌다. 그가 '나는 성폭력 가해를 반성한다'는 글로 대꾸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주춤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왠지 내가 그를 몰아부치고 있는건가? 한 사람을 싸잡아 다구리 치고 있는 건가? 조심스러워지며 다른 말을 꺼내기가 힘들어졌다.
아주 솔직히 이야기하면 나는 그가 어떤 성폭력 가해를 했다는 건지 이해하면서 그 글을 썼는지 묻고 싶다.
다른 이들이 어떤 지점이 불편했고 공포를 느꼈는지.. 그리고 왜 글쓰기를 통한 소통의 노력을 시작했는지 정말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하기조차 하다.
그의 글쓰기 방식은 많은 이들이 아주 어렵게 시작한 이야기 넓히기와 소통을 가로 막고 있다고 생각된다.
어쩌면 그녀들은 자신의 불편함과 공포를 잠시 뒷전으로 미루고 더 많은 소통을 하고자 했을 뿐이다..
왜? 어떻게? 그 글이 나왔는지를 알고 싶었을 뿐이다.. 더 발전적인 소통은 거기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그의 성급한 사과와 _되기 고백으로 인해 고통 속에 문제제기했던 그녀들은 뻘쭘해지고 점점 더 불편해졌을 뿐이다.
나는 그의 사과는 받고 싶지 않다. 고백도 별로 관심없다. 그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접했던 것들이 그를 이해하는데 훨씬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그보다 더 여성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부끄러운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래서 더욱 '왜 어떤 맥락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인가'를 알고 싶을 뿐이다. 그를 좀 더 이해하는 지인들의 추측성 글을 통해 그 설명을 접하고 싶지 않다. 그건 문제제기를 한 이들로 하여금 '그를 이해하기'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으라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러나 세번째 그의 글은 최소한 일주일 정도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인데.. 그때까지 가만히 있다가는 질식 당할 것 같아서 그냥 막간 넋두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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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 친구에게 같은 문제의식을 반복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내 자신을 새삼 느꼈다.
나의 문제제기에 그 친구는 '알겠다 잘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나와 그는 문제의식에는 동의했으나 해결방식은 달랐다. 그럼에도 그 친구는 주의주장하지 않았다. 다들 그렇다고 하니까 내가 잘못된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의기소침해지곤한다고 했다.
"왜 너의 판단이 나와 다른데 알겠다고 하는거지?;"
"다수가 주장하는 것이 옳은 것이야? 그럼 소위 운동한다는 자들은 다 틀려먹은 찌질이들이겠네..자본주의가 대세인 이 시대에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우리는 다 찌질이들이네.. 백기 들어?!"
"왜 너는 없는거야? 나와 네가 다를 때 나는 나와 다른 너의 이야기를 우선 듣고 싶다"
"나는 나를 강하게 주장할거야.. 동시에 네가 강하게 너를 주장하기를 바래"
다름의 소통은 거기에서 출발하는 거 아닐까?
백기들고 투항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
자신을 타자화시키고 문제를 객관화하면서 문제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노력하는 것..
꽃다지의 <일어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