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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전주곡>, 내 딸은 웃으며 일할 수 있기를

내 딸은 웃으며 일할 수 있기를
<빗방울 전주곡>,최헌규 감독/ 2003/ 29분

 

20041181 연극원 연극학과 박선영

 

 이 영화를 보기 전, 2001년 4월 10일에 있었던 ‘대우사태’에 대한 영상을 먼저 보았다. 실상은 참으로 끔찍하고 참혹했다. 2001년 당시 나는 대우사태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 당시 나는 고3이었고 대학에 가는 일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너무 두지 않았던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어 생계를 위하여 투쟁하며 목숨을 바치고 있는 것도 모른채 나는 따뜻한 방안에서 배불리 먹으며 느긋하게 공부를 하 고 있었다니. 그때는 몰라서 느끼지 못한 죄책감이 지금에서야 몰려온다. 역시나 사람은 아는 것이 병이다. 하지만 어떻게 같은 하늘 아래서 이리도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 이리도 모를 수 있었을까. 세상은 경주마처럼 혼자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 곳이 아니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곳이다. 그것을 어린 나는 알지 못했고 지금도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알아야 한다.
 사회는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돌아간다. 아무리 애써봐도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지고 마는 것이 사회인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노동자들은 대기업의 횡포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아무 죄 없이 이유 없이 당하고 만 것이다. 죄값을 치러야 할 사람과 죄값을 치르는 사람은 따로 존재하는 듯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꿈을 잃었으며 미래를 잃었고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목숨을 끊었다.
 살고자, 살아가고자 하는 그들의 마지막 외침은 무참히 휘둘러진 방망이 속에서 산산히 부tu졌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흘린 붉은 피가 그토록 붉어보일 수 없었다. 그들의 뜨거운 열정과 끓어오르는 분노를 대변하는 그들의 피는 싸늘하게 흘러 식어가고 있었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나 자신 또한 무기력해지는 느낌이었다.
 무기력해질대로 무기력해진 나는 <빗방울 전주곡>을 보면서 더 우울해졌다. 그들이 아파트에서 반지하 방으로 이사를 간 것처럼 나 역시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하고 눅눅한 반지하 세계로 한순간에 추락한 느낌이었다. 저절로 우울해지는 곰팡내 나는 반지하의 세계.
 만약 영화를 보기 전 대우사태에 대한 영상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 영화와 대우사태가 관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사고로 정리해고를 당한 한 가장이 그 후 택시기사를 하며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암울한 현재를 살아가는 이야기 정도로만 여겼을 것이다. 연관을 짓기에는 대우사태에 대한 언급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우사태에 대한 영상을 보고 난 후에 영화를 봤기 때문에 쉽게 영화의 전사를 알 수 있었고, 상황파악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감정몰입이 더욱 잘 되었다. 내 자신이 분노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몰입하고 느낀 감정은, 나의 분노에 답답함이 더해진 극도의 답답함뿐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왜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왜 그들은 더 나아질 수 없고 더 나아갈 수 없는가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애쓰는 자와 애쓰지 않는 자, 삶을 관조하는 자와 살아가는 자, 과거를 바라보는 자와 미래를 바라보는 자. 그들이 합하여 만들어지는 결과는 과연 어떠한 것일까. 이 세계에서도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이길 수 있을까. 정답은 그렇지 않다 였다. 이 세계에서는 약한 것이 강한 것을 끌어 내려 함께 나약하게 만들어 버렸다. 낡은 포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면 포대가 새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가 낡아지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인간의 나약함, 희망 없음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았다. 딸 아이를 피아노 학원에 등록시켜주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자신은 곧 죽어도 미래가 없어도 앞으로 나아가야할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게끔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주린 배를 채우기 보다 딸 아이의 굶주려질 뻔한 미래를 풍요롭게 만드는 쪽을 택한 아버지의 모습에서 나는 사라질뻔한 희망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과거나 현재가 아닌 미래를 향해 가고 있는 딸을 보면서 부러움과 동시에 대리만족을 느끼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내 자녀라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우리들의 자기희생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말이다.
 문뜩 며칠 전 보았던 <훌라걸스>가 생각이 났다.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어머니들이 하던 일을 물려받지 않고 새로이 건설될 하와이안 센터의 훌라댄서가 되겠다는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그들의 어머니들과 어른들은 댄서가 되겠다는 자신들의 딸들을 비난하고 반대한다. 하지만 춤을 추며 행복해하는 딸들을 보면서 자신들은 힘들게 일하며 살아왔지만 그들은 이제 웃으면서, 즐기면서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주자고 말한다. 고통스럽게 일하는 시대는 자신들로써 끝내자는 것이었다. 이로써 가려질뻔한 소녀들의 미래는 날개를 펴게 되고 그들은 희망을 현실로 이루게 된다.
 나는 <빗방울 전주곡>에서 역시 자신은 힘들게 일하며 살아왔고 살아가야 하지만 자신의 딸에게는 그 고통을 물려주고 싶어하지 않는, 자신의 딸만큼은 즐거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고자 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희미하게나마 희망을 볼 수 있었다. 영원히 멈출 것 같지 않은, 끊임없이 내리는 어둠의 빗줄기 속에서 희망은 그 비를 멈출 수는 없지만 막아줄 우산이 되고 있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느즈막한 저녁, 그래도 비를 피할 수 있는 반지하 방이라도 있다는 사실이,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웃음 짓게 만들어 주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전달하기에는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빈약하지 않았을까. 그 어느 누가 영화를 보고 난 뒤 영화제목이 ‘빗방울 전주곡’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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