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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 페스가 싫다

여덟 시간의 기차 여행 끝에 페스에 도착한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메디나의 입구는 거대한 공동묘지다. 썰렁한 광장을 지나 시장 입구에 도착하니 숙소가 한두 개 보이기 시작한다. 가이드북에서 미리 찍어 둔 숙소를 찾아간다. 어두운 입구를 지나 음침한 방을 보니 우울함이 확 밀려온다. 고개를 설래설래 젓고 나쨈?/span>. 다음 숙소에 들어간다. 아까 숙소보다 더 우울하다. 세 번째 숙소도 별로 다르지 않다. 배낭은 점점 무거워져 오고 삐끼들은 점점 더 극성을 떠는데 아무래도 이 동네 숙소는 죄 이 수준인 거 같다. 그나마 처음 본 방이 쬐끔 낫다 싶어 다시 그 숙소로 돌아간다. 이틀만 묵겠다고 돈을 주고 방에 들어서는 순간 전기콘센트가 없다는 걸 깨닫는다. 망했다. 이틀밤을 뭘 하면서 보낼지 앞이 깜깜하다.

 

밥 먹으러 나가는데 호텔 리셉션에 있던 총각이 뒤에서 열심히 부른다. 안 그래도 우울한데 왜 하고 돌아보니 어디 가냔다. 남이사.. 밥 먹으러 간다니까 뒤에 있는 식당을 가리키며 이 식당이랑 그 호텔이랑 같은 집이란다. 싸고, 깨끗하고 어쩌고저쩌고 정신없이 떠들어 대길래 그래 하루쯤은 여기서 먹어주자 싶어 자리를 잡는다. 메뉴판을 보니 가격이 장난이 아니다. 전 메뉴 40디르함 즉 5천원 균일이다. 비싸다고 일어설까 하다가 어차피 자리를 잡은데다 다른 가게의 음식값도 싸지는 않을 테니 바가지를 써도 천원 정도일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음식을 시켰는데 황당하게도 다른 집에 가서 음식을 사가지고 온다. 완전히 당했다는 느낌이 든다. 페스에서 보낼 이틀이 끔찍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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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나안의 광장, 앉아 있는 사람들마저 우울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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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나안의 시장, 그나마 가장 생기가 넘치는 곳이다

 

다음날 페스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가죽염색공장을 찾아 나선다. 이 가죽염색공장 역시 메디나의 골목길 속에 있다. 사실 페스의 골목길은 마라케쉬보다 한 수 위다. 메디나 자체가 마라케쉬보다 작으니 골목길도 좁고 경사도 상당한데 그 좁은 가파른 골목이 무려 9천개나 된다고 한다. 세계 최고의 미로라 불리는 이 골목으로 잘못 들어갔다간 일주일이 지나도 못 나오는 수가 있다는데 일주일은 몰라도 당일날 나오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제 더 이상 골목이란 이유로 메디나를 헤매는 모험은 하고 싶지 않다. 사실 이제 골목들도 그 골목에 있는 가게들도 다 비슷비슷해 보인다. 골목을 헤매지 않는 법은 간단하다. 단체관광객 뒤를 졸졸 따라가면 최단거리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유럽 관광객 한 팀을 찍어서 뒤를 따라가니 30분도 패 안 되어 가죽염색공장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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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건물로 둘러싸인 가죽염색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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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을 당기면 이렇다

 

가죽염색공장은 말이 공장이지 거대한 노천에 여러 색깔의 염료를 담은 통을 늘어 넣고 거기에서 사람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근처 건물에서 내려다보는 게 전부다. 온통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는 그곳은 가까이 접근할 수도 없고 그저 테라스에서 잠시 사진을 찍고 나오는 게 전부인데 그나마 그 테라스를 빌려준 가게에서는 일괄적으로 20디르함씩의 비공식 입장료를 요구한다. 동물의 가죽에서 나는 냄새와 염료 냄새가 뒤엉킨 지독한 냄새를 맡으며 사진 두어 장을 찍고 돌아오니 여전히 오전이다. 이 길고 긴 시간 동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방이 음침하니 방에서 쉬고 싶은 생각도 안 들고 인터넷을 하자니 가격이 다른 도시의 두 배고 저 골목 속으로는 더 이상 들어가고 싶지 않고.. .. 난 정말 페스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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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의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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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의 전경, 위와 같은 골목이 무려 9천개나 있단다

 

남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 페스의 전경이 펼쳐진다는 누군가의 무덤이 있다는 곳을 가보기로 한다. 론리에는 혼자서는 가지 말라고 되어 있건만 알게 뭐냐.. 그냥 간다. 도로를 따라 걷다가 옆길로 난 계단을 따라 오르니 페스의 전경이 한 눈에 펼쳐진다. 그런데 날이 흐리다. 사실 모로코의 날씨란 게 낮에는 햇볕이 쨍하다가도 해만 지면 초겨울 날씨로 변해 약간의 감기 가운이 늘 따라다녔는데 패스에서는 그나마 낮에도 날씨가 흐리니 몸이 영 좋지를 않다. 게다가 모로코에 오면서부터 계속 높은 습도 탓인지 축축한 기운이 몸에서 떠나질 않는다. 사진 몇 장을 찍고 서둘러 내려온다. 이럴 땐 그냥 자는 게 상책이다. 일찌감치 감기약을 털어 먹고 잠자리에 든다. 하루 밤만 자면 페스 탈출이다. 이 약이 감기약이 아니라 수면제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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