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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쳅차오웬> 하얗고 파란 마을

버스가 페스를 벗어나면서 기분이 다시 좋아지기 시작한다. 날씨는 다시 화창해지고 주위는 초록이 한창이다. 제법 봄꽃을 피워 올린 나무들이 보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버스는 산길을 돌아간다. 얼마 만에 보는 나무 있는 산이더냐..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만 아니면 그저 시외버스라도 타고 있는 것 같다. 산길을 한참이나 달리던 버스는 산중턱에 온통 하얀 건물들로 가득한 마을에 내려 준다. 이곳이 모로코 북부의 휴양지인 쳅차오웬이다. 터미널에서 내려 찾아간 마을은 온통 하얀색과 파란색으로 이루어진 건물들로 가득하다. 이건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인데.. 그래 그리스의 산토리니랑 비슷한 느낌이다. 숙소도 온통 하얀색과 파란색으로 되어 있고 심지어 방도 벽은 하얗고 침대며 가구, 창틀은 푸른색이다. 산토리니에서도 하얗고 파란 방은 비싸서 묵지도 못했건만 아싸.. 여기서 묵어보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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쳅차오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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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바라본 풍경

 

여기서도 싸고 깨끗하다는 숙소는 여전히 풀이지만 그 옆의 다른 숙소도 그럭저럭 싸고 깨끗하다. 날씨도 생각보다 따뜻하고 무엇보다 습도가 낮아 살만하긴 한데 감기는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차라리 확 아파 버리면 하루 이틀 끙끙 앓고 일어나면 개운할텐데 그저 몸만 무겁고 미열이 있는 증상만 며칠째 계속된다. 아무래도 일교차가 너무 심한 게 이 감기의 원인이지 싶다. 스페인으로 올라가면 일정도 빠듯해지고 물가도 비싸질테니 여기서 이삼 일 푹 쉬었다 가야 할 것 같다. 다행히 숙소도 맘에 들고 동네도 편안한 분위기라 쉬기에는 딱 좋은 동네이다. 페스의 숙소는 더운물이 나오질 않아 씻지도 못했는데 오자마자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밝고 환한 방안에 누워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다. 역시 숙소는 깨끗하고 볼 일이다^^.

 

그래도 굶을 수는 없으니 밥도 먹을 겸 동네로 나가 본다. 누가 모로코 아니랄까봐 이 좁은 동네도 온통 하얀색과 파란색의 페인트를 뒤짚어 쓴 골목들이 무성한 나무 가지처럼 뻗어 있다. 골목에 다시는 들어가지 말아야지 했던 다짐도 어느새 잊고 어느새 푸른색의 골목으로 빨려 들어간다. 산 밑에 있는 동네라 골목은 온통 좁은 계단으로 이어져 있어 그 끝이 보이질 않는다. 계단의 끝은 막다른 골목이거나 또다른 계단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골목만 미로 같은 게 아니라 집구조도 미로 같은 모로코의 집들은 작은 나무 문밖에서는 거의 아무 것도 볼 수 없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면 제법 큰 집안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아주 신기한 구조로 되어 있다. 이 동네도 여느 동네들처럼 상점이 밀집된 골목만 벗어나면 어디서나 아이들이 뛰어 놀고 어른들은 문 앞에 나와 앉아 한낮의 여유를 즐기고 있는 그저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평범한 동네다. 그나마 동네가 그리 크지 않아 두어 시간이면 대략 골목이 파악된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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쳅차오웬의 상점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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쳅차오웬의 상점들2

 

동네는 손바닥만하고 별달리 할 일도 없으니 카페에 앉아서 엽서를 쓴다. 사실 엽서란 게 참 애매한 분량이다. 간단한 안부만 묻기엔 좀 길고 긴 사연을 쓰기엔 좀 짧고... 게다가 이젠 볼펜으로 뭔가 쓴다는 일이 익숙치가 않아져서인지 안 그래도 못 쓰는 글씨는 거의 날아갈 지경이니 살 때는 그래도 볼만했던 엽서가 글을 써 놓으면 왠지 후줄그레해지는 게 영 맘에 들질 않는다. 이럴 땐 잽싸게 부치는 상책이니 우체국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막상 우체국에 가보니 이 동네 우편 요금이 장난이 아니다. 아무리 국제 우편이라도 엽서는 어느 나라할 거 없이 몇백원 수준이었는데 웬걸 한 장에 거의 이천원 돈이다. .. 그냥 찢어버릴까^^ 잠시 갈등이 된다. 참 돈 만원에 인간 많이 쪼잔해졌다 싶지만 만원이면 하루치 방값이요, 이틀치 밥값이다. 그래도 어쩌랴.. 그냥 우표를 산다. 비싸면 우표라도 좀 이쁘면 좋을 텐데 하나도 안 잘생긴 이 나라 국왕께서 전체 우표를 도배하고 계시다. 자기 얼굴을 생각해서 지폐 정도로 만족하시고 우표는 풍경에게 양보해도 좋으련만 참 대책이 안서는 아저씨다

 

다음날도 그저 동네 카페에 앉아서 논다, 두번만 가면 단골이 되는 동네 카페는 관광객들 뿐 아니라 동네 아저씨들의 사랑방이기도 하다. 카페 죽돌이 아저씨 하나가 예의 질문 레파토리를 쏟아내더니 종이 하나를 들고 다가오신다, 싸인 해달라는 건 아닐테고 뭘까 유심히 바라봤더니 허걱 로또 번호를 적는 종이다. 로또를 아느냐고 물어보더니 숫자 여섯 개씩을 두 군데다 찍어 달라신다. 웃으면서 사양을 하는데도 이 아저씨 거의 막무가내인데다 옆에서 카페 주인아저씨까지 거드는 통에 더 이상 사양하기도 쉽지 않다. .. 부담스럽다. 내 생전 로또라고는 이전에 김박사의 감언이설에 속아 산 한 번이 전분데-그걸 내 돈으로 샀는지도 아리까리하지만 김박사가 사줬을 리는 없으니 내가 산 게 맞긴 맞을 거다^^- 이 아저씨의 기대에 찬 눈빛을 한 눈에 받으며 번호를 골라내자니 손이 다 떨릴 지경이다. 대충 12개의 번호를 골라서 건네준다. .. 100디르함짜리 하나라도 맞았으면 좋겠는데 결과야 하느님만이 아실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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쳅차오웬의 골목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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쳅차오웬의 골목길2

 

나머지 시간은 인터넷을 뒤지며 보낸다. 모로코에서 한국여행자 하나라도 만나면 스페인 가이드북 정도야 얻어 볼 수 있겠지 생각했는데 내일이면 모로코를 떠나는 오늘 이 시간까지 한국인 여행자는 하나도 못 만났으니 자력갱생하는 길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열흘 남짓 있을 나라를 위해 가이드북을 살 수는 없으니 인터넷만이 살길이다. 대충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축으로 갈만한 도시를 끼워 넣으니 대략 론다-그라나다-세비야-똘레도-마드리드-바르셀로나 정도의 루트가 나온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제외하고는 거의 하루씩 보고 이동하는 내가 상당히 싫어라 하는 일정이다. 그렇지만 이제부터 갈 곳은 유럽이고 유럽의 하루 체제비는 대략 이때까지 내가 다녔던 나라들의 사나흘 체제비에 해당하니 싫어도 이렇게 움직일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이런 이동을 내 나른해진 몸이 견뎌줄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다. 이제부터 행복 끝 고생 시작의 빡센 일정으로 접어드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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