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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더불어숲] 마라톤 평원에서

  • 등록일
    2004/08/21 21:40
  • 수정일
    2004/08/21 21:40

마라톤의 출발점은 유럽의 출발점입니다.


 이 엽서는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 북동쪽에 있는 마라톤 평원에서 띄웁니다. 마라톤 평원은 아테네에서 정확히 36.75km거리에 있는 평원입니다. 당신도 잘 알고 있듯이 이곳은 페르시아전쟁의 현장입니다. 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페르시아의 대군을 맞이하여 고립무원의 아테네 병사들이 절망적인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를 물리친 격전의 땅입니다.



나는 마라톤 평원이 내려다 보이는 산기슭에 올라 2천 5백년전의 광경을 상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비규환의 전장(戰場)은 보이지 않고 한 어린 병사의 모습만 떠오릅니다. 기적같은 승리를 전하기 위하여 평원을 달리는 병사의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전쟁의 패배와, 패배에 뒤따를 파괴와 살육의 공포에 가슴조이고 있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한시라도 빨리 승전보를 전하기 위하여 잠시도 걸음을 늦추지 않고 그들이 모여 있는 아고라로 달려가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겼다."는 한마디를 외친 다음 어린 병사는 숨을 거둡니다.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 경주가 이 병사를 기리기 위한 것임은 당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 그가 출발하였던 곳에는 전사자를 추모하는 위령탑과 오륜마크가 새겨진 작은 성화대 가 세워져 있고 성화대와 나란히 마라톤 경주의 출발선이 대리석으로 땅에 새겨져 있습니 다. 나는 바로 그 출발선에 서 보았습니다. 벅찬 승전보를 가슴에 안고 달려나갔던 어린 병 사의 마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마음은 오늘날의 마라톤 경주에서 출발신호를 기다리는 선수의 심정이 되어버립니다. 병사의 마음과 마라톤 경주선수의 마음은 참으로 엄 청난 차이가 있음이 사실입니다. 그 아득한 두 마음을 넘나들고 있는 나자신이 당황스럽기 까지 합니다.

 

이곳 마라톤 평원을 찾아 오면서 나는 많은 역사서가 지적하고 있는 지형상의 특징을 확인 해보려는 생각이 없지 않았습니다. 마라톤 평원은 해안을 향하여 입을 대고 있는 주머니처 럼 입구는 좁고 안쪽은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평원입니다. 6백척의 전함으로 마라톤만( )에 상륙한 페르시아 대군이 전열을 채 가다듬기도 전에 갑자기 개미목처럼 좁아진 협곡에서 학 익진(鶴翼陣)을 펼치고 있던 아테네의 중장밀집(重裝密集) 창병(槍兵)의 돌격과 포위에 직면 하게 됩니다. 페르시아군이 자랑하는 대병력의 이점이 한순간에 무산되어버리는 전략상의 패인이 어렵지 않게 확인됩니다. 나는 마라톤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산위에서 당시의 광경을 애써 눈앞에 그려보았습니다만 여전히 눈앞에 보이는 것은 이 벌판을 달리는 어린 병사의 모습만 또렷이 떠오릅니다. 아테 네군의 결정적인 승인(勝因)은 무엇보다 가족들의 생명을 지켜내려는 병사들의 결연한 용기 였음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됩니다. 아마 어린 병사의 추억 때문에 갖게 되는 감상이기도 하겠지만 아테네군이 비록 병력에 있어서는 열세를 면치 못하였지만 그들에게는 사활이 걸 린 전쟁의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이유가 페르시아군에게는 없었습니다.

 

생각하면 이 마라톤 전투의 승리는 단지 아테네를 지킨 승리에 그치지 않고 당신의 말처럼 '유럽'을 만들어낸 승리입니다. 2천5백년의 장구한 세월이 흐른 지금 마라톤 평원은 그때의 단검조각하나 묻혀 있지 않은 한적한 벌판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오늘의 유럽 이 유럽으로 보전될 수 있게 한 유럽의 탄생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리석으로 표시된 마 라톤 경주의 출발선은 그야말로 유럽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10년후인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해전에서 동양의 제국 페르시아의 서진(西進)이 다시 한번 저지됨으로써 비로소 유럽이 확고하게 그 땅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해전을 승리로 이끈 아테네는 델로스동맹의 맹주가 되어 페리클레스 의 황금기로 이어졌으며 이 찬란한 고대 그리스문명은 르네상스를 거쳐 유럽의 정신으로 자 리잡게 됩니다. 실로 유럽의 땅과 유럽의 정신이 탄생되는 곳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마라톤 평원을 떠나 다시 살라미스해협을 찾았습니다. 살라미스 해협도 마찬가지였습 니다. 연기와 불길로 뒤덮인 바다는 간 곳 없고 푸른 물결만 출렁이고 있습니다. 마라톤 전 투에 참가한 전사들이 그 갑옷과 무기를 스스로 마련하였던 것과는 달리 살라미스해전에서 는 무장(武裝)을 자변(自辨)할 능력이 없는 무산(無産)시민들도 저마다 노젓는 병사로 참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결코 사소한 변화가 아닙니다. 이러한 변화는 전쟁에 임하는 아 테네시민들의 의식이 그만큼 고양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일뿐 아니라 그만큼 고대 그리스 민 주주의의 기반이 확장되고 있다는 점을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민주주의가 과연 어떠한 수준의 어떠한 내용을 갖는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일 단 유럽의 시각을 떠나 논의되어야 할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세계가 승전과 환희로 이루 어진 아폴적 세계만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그리스문화도 다른 많은 고대문화와 마찬가지로 식민지와 노예의 희생을 딛고 있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나는 아침 살라미스 해협의 아침 바닷물에 손을 씻으며 이 평화로운 풍경속에 그림처럼 앉아 있습니다. 아침안개 자욱한 포구에는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의 어깨너머로 먹이를 찾는 갈메기들이 한가롭기 그지 없습니다. 생각하면 전쟁의 승패(勝敗)는 물론이고 나라의 흥망 (興亡) 역시 역사의 흐름이라는 유장(悠長)한 세월에 실어 본다면 그것은 한 바탕 부질없는 춘몽(春夢)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찬란히 꽃피웠던 그리스의 황금기도 오래지 않아 '그리스 의 자살'이라는 30년간의 펠로폰네소스전쟁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마케도니아 의 젊은 왕에게 망하게 됩니다. 지금은 유럽의 나라들이 바야흐로 유럽연합(EU)이라는, 나라를 뛰어넘는 새로운 틀을 만들 어가고 있지만 금세기가 보여준 광기어린 전쟁과 지금도 가시지 않고 있는 종교적 반목과 민족적 쟁투에 생각이 미치면 국가라는 틀의 완고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돌이켜보 면 인류사가 이륙해온 문명은 개별국가의 흥망과는 상관없이 어어져오는 것인지도 모릅니 다. 나라가 없어진 것을 망(亡)이라 하지 않고 도(道)가 없어진 것을 망이라 했던 고인(古人)의 역사관을 수긍한다면 국가란 문명을 담는 그릇이 못되고, 문명은 국가라는 그릇에 담 기에는 너무나 크고 장구한 실체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생각을 작은 그릇에 간수하고 있을뿐입니다. 먼 에게해의 물가에 앉아서 전쟁의 승패와 나라의 흥망과 문명의 유장함에 젖어보는 나자신 이 과연 하염없는 역사의 이방인 같이 느껴집니다. 절실할 것 하나 없는 이방인의 마음에도 문득 문득 솟구치는 감상이 있습니다. 마라톤 평원의 출발선에 섰을 때의 마음이 그것입니 다. 어린 병사가 숨을 거두며 외쳤던 한마디 말과, 올림픽 마라톤경주의 승리자가 결승점에 서 가슴으로 테이프를 끊으며 외치는 한 마디 말에 담긴 의미가 내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 습니다. '우리는 이겼다.'는 말과 '나는 이겼다.'말의 엄청난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이 두 말의 의미에 그처럼 몸서리치는 까닭은 아마 '나'가 '우리'를 이겨야 하는 것이 바로 오늘의 현실이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철학이 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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