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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희덕] 어린 것

  • 등록일
    2004/08/23 00:26
  • 수정일
    2004/08/23 00:26

어디서 나왔을까 깊은 산길

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새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맑은 눈빛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고집할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어린것들은

내 앞에서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

나를 어미라 부른다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

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



젖이 차 올라 겨드랑이까지 찡해온면

지금쯤 내 어린 것은

얼마나 젖이 그리울까

울면서 젖을 짜버리던 생각이 문득 난다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않는

난만한 그 눈동자,

너를 떠나서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고

갈 수도 없다고

나는 오르던 산길을 내려오고 만다

하, 물웅덩이에는 무사한 송사리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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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이 시는 페미니즘의 여러 유형 가운데 에코 페미니즘에 속한 시이다.

 

에코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과 여성을 동일한 범주와 차원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즉, 남성 억압에 의한 여성의 수난을 인간 억압에 의한 자연의 수난과 동일시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사적 대상에 대한 모성적 측은지심이 체험적 진실에 힘입어 보편적 감동을 유발하고 있다. "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새끼"를 바라보고 있는 시적 자아의 정서는 연민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모성적 사랑이야말로 모든 사랑의 근원이다. 이 시에는 대상과 세계를 유용성과는 거리가 먼, 지고지순한 사랑과 연대의 관계로 파악하려는 거룩한 삶의 태도가 들어있다.

 

어린 다람쥐를 보고 시인은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 핑그르르 굳었던 것이 돈다"라고 말하고 있다. 생명 지닌 것들에 대한 외경을 생활로 삼지 않으면 불가능한 시적 표현이다. 시인은 나아가 이 어린 다람쥐에게 자연스럽게 집에 두고 온 아이를 떠올린다.("지금쯤 내 어린것은/얼마나 젖이 그리울까") 시인은 오르던 산 길(삶, 인생)을 내려오고 마는 것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근원적 사랑을 저버린 욕망의 실현이란 모두가 부질없는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체험적 진실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 물웅덩이에는 무사한 송사리떼". 어린 다람쥐와 젖이 그리운 아이와 송사리떼는 여기서 동일한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생명의 존재라는 차원에서 그것들은 결코 장애를 겪거나 훼손되어서는 안 될, 더 없이 소중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들이다.

                                                                                                             - 이재무 -

 

69인의 좋은 시를 찾아서 긍적적인 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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