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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서운 건 쓰나미가 아니라 가난"
    간장 오타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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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위한 한 시간(2)
    간장 오타맨...

"무서운 건 쓰나미가 아니라 가난"

  • 등록일
    2005/03/27 12:08
  • 수정일
    2005/03/27 12:08
김성환의 History Today - 남아시아 해일 재난에 대한 좌파의 시각 편집부 editor@digitalmal.com 김성환 본지 편집위원 작년 12월 16일 남아시아를 강타한 지진해일은 사망자만 15만 명에 이르는 충격적 사건이었다. 언론은 천편일률적으로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자연재해라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스리랑카의 트로추기주의적 좌파정당인 사회평등당 총서기 위제 디아스의 지난 2월 4일 시드니에서 있었던 연설을 통해 좌파는 이 재난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들어보자. <본문 > 오늘(2월 4일)은 스리랑카가 영국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한 지 57년째를 맞은 국경일입니다. 정부는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농민과 군대의 행진 행사를 가질 것입니다. 비록 쓰나미 재난 때문에 그 열기가 예전 같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의문은 남습니다. 빈농, 어부, 청년 실업자 등 스리랑카의 노동자 대중이 그런 기념식에 참석해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요. 재난의 주범은 가난


스리랑카 총인구의 5%에 달하는 1천 2백만 명이 지금 난민 캠프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45만 명은 지난 20년 동안 부르주아 정부들이 잇달아 벌인 내전 때문에 떠돌이 신세가 된 사람들입니다. 나머지는 이번 쓰나미로 인해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쓰나미로 성인 남녀와 어린이 약 4만 명이 죽었고 4천 명이 실종됐습니다. 내전 기간 동안 죽은 사람들이 약 6만 5천 명입니다. 쓰나미는 결코 자연재해가 아닙니다. 피해의 주범은 이 지역 반(半)식민지 국가들 전반에 만연해 있는 가난입니다. 프라풀 비드와이는 <프론트라인 > 최근호에 쓴 글에서 “재앙의 정도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그 원인은 사회구조에 있다. 일본에서는 1회의 자연재해로 평균 63명이 죽지만 페루에서는 그보다 46배나 많은 2천 9백 명이 죽는다. 1985년 허리케인 엘레나가 미국을 덮쳤을 때 단 5명 만이 죽었다. 그러나 1991년 사이클론이 방글라데시를 강타했을 땐 무려 50만 명이 죽었다. 한번 지진으로 1만 명 이상이 죽는 일은 제3세계에서만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나는 주로 스리랑카에 대해서 언급할 것인데 이는 내가 그곳에 대해 잘 알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곳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여타 후진국들에 만연해 있는 일반적인 상황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국가들 국민들 대다수가 겪고 있는 가난은 인재(人災)입니다. 그 가난의 뿌리는 신이나 자연의 영역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은 이들 나라들에게 유용한 광물자원과 쾌적한 기후조건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국민의 대다수를 비참한 가난에 빠져 있게 한 것은 바로 사회구조인 것입니다. 가옥과 인명 피해를 당한 이들은 주로 바닷가에 살고 있던 빈민들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어부이거나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집은 오두막이라고나 할 정도로 허술해서 쓰나미는 말할 것도 없고 아주 작은 규모의 홍수나 태풍에도 견디지 못합니다. 쓰나미가 지나간 뒤 찍은 일부 사진에서 때때로 광활한 판자더미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견고한 집을 볼 수 있었을 겁니다. 자본가의 집은 견뎌낼 수 있을 만한 쓰나미였다는 말입니다. 어부들은 작업 때문에 바닷가에서 살지만,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은 땅 한 뙈기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바닷가에 삽니다. 해안철도는 주변에는 많은 철도용지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곳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는 것이지요. 지금은 다 날아가 버렸지만요. 그들에게는 은행 통장도 없고 사회보장 혜택도 없습니다. 집이 없어지면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불법 점거자’로 취급받아 보상에서도 제외됩니다. 서민 생명 경시하는 지배층 이들은 사전에 어떠한 경보도 받지 못했습니다. 쓰나미가 스리랑카 동부 해안을 강타한 직후 방송에서 한마디 보도만 했었더라도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해일이 서남 및 남부 해안에 도달하기까지는 30분이 걸렸습니다. 사람들이 15분 동안만 내륙을 향해 걸을 수 있었다면 모두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보는 없었습니다. 정부 측의 이러한 치명적 실수를 정당화하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수많은 합리화 논리가 동원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12월 26일이 공휴일이라 관공서가 문을 닫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은 정부나 엘리트층이 서민들의 생명에 대해 총체적으로 관심이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스리랑카에서는 야만적인 내전 때문에 인간의 생명은 훨씬 값싸게 취급받아 왔습니다. 정부가 서민들의 고통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은 구호활동에서도 드러났습니다. 정부당국과 군은 재앙이 일어난 지 이틀이 지나도록 손을 쓰지 않았습니다. 자발적으로 일어나 피해 주민들을 도운 인접 지역 주민들이 아니었더라면 수천 명이 더 죽었을 겁니다. 서민들의 이러한 자발적 구호활동은 지배 부르주아 정당들이 노동계급과 피억압 대중들을 갈라놓기 위해 수십년 동안 만들어 내고, 재생산하고, 활용해먹은 인종적, 종교적 갈등을 초월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제국주의 주인장들에게 철저하게 복종하는 토착 부르주아지들은 대중들의 사회적, 민주적 요구를 해결해 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애초부터 그들은 반동적인 싱할라 쇼비니즘의 분리 통치 전략에 의존해야만 했지요, 1948-49년에 타밀어를 하는 플랜데이션 노동자들에게서 그들이 인도에서 온 이주자라는 이유로 공민권을 박탈하면서 시작된 차별정책은 1956년에 싱할라어를 유일한 공식언어로 지정하고 토착 타밀족에게서도 공민권을 박탈하는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마침내 1983년 내전이 시작되자 쇼비니즘에 대한 호소는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조성한 비합리적인 지역분리 정책은 이번 쓰나미 이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생존자들을 구조할 때 아무 위력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싱할라인인지, 타밀인인지, 무슬림인지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던 것입니다. 각지에서 온 난민들을 수용하고 있는 장소가 불교 사원이든, 기독교 교회이든, 무슬림 모스크이든 가리지 않았습니다. 민중의 편에 선 노동대중 구호 활동 가운데서도 계급관계가 전면에 드러났습니다. 주도권을 쥐고 활동한 것은 인구 중에서 사회적으로 가장 잘 조직된 노동대중이었습니다. 특히 병원 노동자들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최근의 건강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 과정에서 숱한 욕을 들어먹어야 했습니다. 자본주의적 언론매체는 그들은 환자에 대한 적으로 묘사했었지요. 노동대중이 쓰나미 피해자들 구호활동에 즉각 자발적으로 참여하자 지배계급은 겁을 집어먹었습니다. 그건 마치 서민들이 금지된 영토를 침범한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정부는 신속하게 모든 구호활동을 군의 지휘 아래로 이전시켰습니다. 그 결정을 합리화하기 위해 언론을 동원해 대중들이 일으킨 몇몇 유아 성 추행 및 강간 사건을 확대 과장 보도하도록 했습니다. 피해자 및 자원봉사자들 모두로부터의 공적인 분노에 직면한 정부는 한발짝 물러나 군은 난민캠프의 안전만 담당하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지 않은 1월 6일, 쿠마라퉁가 대통령은 스리랑카의 총 25개 행정구역 가운데 14개 구역에 적용되는 일련의 가혹한 비상조치법을 공포했습니다. 그것들은 의회는 물론 각료회의의 토론도 거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인권위원회가 시민은 자신이 적용받게 될 법률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고 발표하기 전까지 그 법률들은 비밀에 부쳐져 있었습니다. 긴급조치법은 공공질서와 기초 공공 서비스를 유지한다는 미명 아래 군과 경찰에 과도한 권한을 주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임명한 소관 부서장 및 지역 군사령관들은 구호활동을 위해 건물, 토지, 자동차를 징발할 권한을 갖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쓰나미 관련 구호활동 뿐만 아니라 국가안보 관련 일을 위해 어떤 사람에게든 일을 시킬 수 있습니다. 이는 징병제를 실시하는 것과 같은 조치로서 민주적 권리에 대한 중대한 침해인 것입니다. 지난 20년 동안 군의 야만적이고 살인적인 행동들을 상기할 때 이번 조치법들로 인해 대중들이 심각한 위험에 놓이게 된 것은 확실합니다. ‘재난을 독재의 기회로’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쿠마라퉁가 대통령은 남부지방 함반토타에서 가진 군중연설에서 선거는 5년 뒤로 연기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민주적 권리에 대한 이러한 공격에 대해 야당들 가운데 좌파든 우파든 어느 곳도, 심지어 노조 지도부도 항의를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항의의 부재는 ‘쓰나미 충격’의 결과가 아닙니다. 또한 인도주의적 활동이 중단 없이 진행되게 하기 위한 배려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돼 대다수 국민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는 상황에서 노동자와 빈민들의 민주적 권리를 보장해줄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현재 스리랑카 인구의 40% 이상이 하루 1달러 수입으로 최저생계비 이하 수준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유무역지대 노동자들은 월 45달러의 임금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구요.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적 권리와 대의정치는 지배계급에게 점점 더 불필요한 부담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헌법을 파괴하고 독재체제를 수립하려는 시도는 그들에게 오랜전부터 하나의 아젠다였습니다. 2003년 11월, 쿠마라퉁가는 국민연합전선 정부로부터 3명의 장관직을 강탈하는 사실상의 헌정 쿠데타를 시도했습니다. 3개월 뒤 그녀는 독단적으로 정부 전체를 장악했습니다. 노동계급을 대변한다고 하는 어느 정당도 이러한 조치들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안정된 정부’라는 것은 다른 말로 타밀 소수민족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정부를 말합니다. 한때 스리랑카 최대의 노동계급 정당이었던 랑카 사마 사마자는 스탈린주의 공산당과 함께 대통령 측에 가담하여 반민주 조치들을 지원했습니다. 민주적 권리들을 짓밟은 지배 엘리트들은 제국주의 국가들 특히 부시 정부와의 관계 개선에 의해 더욱 고무되었습니다. 쓰나미 이후 미국은 1만 3천 명의 군사요원과 21척의 해군 함정 그리고 75대의 수송기를 인도양에 배치했습니다. 스리랑카는 부시 정부의 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지정학적 전략 구상에서 핵심적인 지역입니다. 예일대의 역사학자 존 루이스 개디스는 뉴욕타임즈에 이렇게 썼습니다. 쓰나미 재난은 “부시에게는 이라크에 대한 선제공격과 그 실패, 그리고 이슬람 세계와의 갈등에서 벗어날 하나의 기회이다. 이곳은 미국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일을 할 수 있는 모범적 지역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언론이 미군을 인도주의적 구호활동자들로 홍보했음에도 지난 수십년 동안 제국주의에 억압당하고 착취당해온 이 지역의 노동계급과 빈민들은 그들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베트남이라는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으며, 최근 미군이 이라크에서 벌인 야만적 행동들이 이들에게 미 제국주의 및 제국주의 전체에 대한 적대감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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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치외법권지역 삼성왕국이 대한민국에 존재&quot;

  • 등록일
    2005/03/27 11:57
  • 수정일
    2005/03/27 11:57
** 개인적으로 김성환 위원장을 아는 것은 정확히 1999년 인천에서 이천전기(그때는 삼성에 매각되기 전이어서 해고자들이 일진그룹과 원직복직 쟁취 투쟁을 위해 인천 만석동으로 가는 철기 옆에 텐트를 치고 투쟁을 하였을때 였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우량기업이 었던 이천전기가 일진에 매각되며 이 지역 경제가 어렵다고 난리 였다. 사무실이 송림동에 있었던 터라 걸어서 텐트를 종종 방문하였다. 만석동으로 나 있는 철길-기차가 과거에 비해 많이 지나다니지는 않지만... 동국철강 옆 이천전기가 생각이 난다.)을 걸으며 싸움을 하였을때 얼굴을 알게 되었고, 작년 삼성공대위 활동을 하면서 얼굴을 뵐 수 있었다. 올해 2월 말인가 3월초 민주노총 경기본부 사무실에서 봤었는데.... 구속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을 터이지만 이 글을 보고 구속이 되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부디 몸 건강하시기를... 원직복직 싸움을 회사가 2번 바뀔때까지 끊임없이 진행하는 위원장이 옥중에서나마 이후 투쟁을 위한 충전의 기회가 되기를 빌어본다. 삼성일반노조 김성환 위원장 옥중 편지 이태준 기자 ltj@digitalmal.com 김성환 삼성일반노동조합 위원장 수감중인 김성환 삼성일반노동조합 위원장이 편지를 통해 "삼성재벌의 불법비리에 맞선 노동자는 구속"됐다며 억울한 심경을 토로했다. 김 위원장은 '삼성SDI 노동자 불법위치추적 사건'과 관련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등 삼성 임직원들을 고소한 바 있다.


하지만 울산지법은 지난 2월 22일 오히려 김 위원장이 '삼성재벌 노동자 탄압백서'와 같은 홍보물로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삼성SDI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징역 10개월 실형을 선고했다. 이미 지난 2002년에도 명예훼손으로 징역 3년과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은 김 위원장은 집행유예 기간에 다시 법정구속되면서 모두 3년 10개월 실형을 받고 있다. 그리고 지난 2월 16일 검찰은 불법위치추적 사건에 대해 기술상 어렵다며 수사를 중단했다. 이에 지난 19일 김 위원장은 '삼성재벌 물신의 경지에 오르다, 대한민국 사법부를 장악하다'는 제목으로 부인에게 편지를 전달해 억울함을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은 이 편지에서 "삼성재벌의 무노조 경영, 노동자 탄압과 족벌세습경영을 위한 불법비리에 대하여, 그리고 그러한 삼성재벌의 불법 비리에 눈을 감는 노무현 정권과 무능한 검찰에 나는 분노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제는 이(건희)씨 일가가 족벌세습경영을 위한 주가조작, 세금 포탈 등 온갖 불법비리를 저질러도, 또 무노조 경영을 위해 온갖 노동자 탄압을 자행하더라도 천민자본식의 경제발전에 눈이 멀고 돈 고물에 눈이 먼 개혁정권하에서는 절대로 삼성을 수사하거나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됐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삼성에버랜드주가조작 사건, 삼성재벌 친족회사 (주)새한(옛 제일합섬)이 복수노조금지를 악용해 유령노조를 만들고 먼저 구청에 신고해 노조를 탄압한 사건, 삼성 SDI수원공장에서 노조를 건설하려던 박경렬씨가 감금, 일본으로 납치당한 사건들을 예로 들면서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비판했다. 이러면서 김 위원장은 검찰과 법원이 삼성 관련 사건에 대해선 제대로 수사나 판결을 하지 못한다며 "대한민국 안에 존재하는 천민자본 삼성재벌에 대한 법 적용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이라며 "치외법권 지역 삼성왕국이 대한민국과는 별도로 존재"한다고 비판했다. 김 위원장은 "삼성구조본 이종왕 법무실장은 노무현 대통령 사시동기이고 서 모 검사는 에버랜드 불법주식증여 사건을 수사하던 곳에서 부장검사를 했고, 수원지검 특수부 이 모 검사는 삼성전자 관련 정차장 사건의 공판검사로서 재판이 진행중에 삼성구조본부로 직장을 옮겼다"며 "삼성재벌 물신이 사법부를 장악"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사법부가 삼성재벌을 제대로 심판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다음은 김 위원장이 감옥에서 보낸 편지 전문. 삼성재벌 물신의 경지에 오르다 . 대한민국 사법부를 장악하다 법정구속된지 한 달이 되어간다. 그리고 0.93평 독방에 앉아 법정국속에 울산구치소에 갇혀 있는 것이 억울하여 분노하고 있다. 삼성재벌의 무노조 경영, 노동자 탄압과 족벌세습경영을 위한 불법 비리에 대하여 그리고, 그러한 삼성재벌의 불법 비리에 눈을 감는 노무현 정권과 무능한 검찰에 나는 분노하고 있다. 마침내 삼성 재벌은 군부 독재 시절에도 감히 오르지 못한 천민 자본의 최고의 경지인 '물신'의 경지에 올랐다. 이제는 이씨 일가가 족벌세습경영을 위한 주가 조작, 세금포탈등, 온갖 불법 비리를 저질러도 또 무노조 경영을 위해 온갖 노동자 탄압을 자행하더라도 , 천민 자본식의 경제발전에 눈이 멀고 돈 고물에 눈이 먼 개혁정권하에서는, 절대로 삼성을 수사하거나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됐다. 2000년 법학자들과, 본인, 단병호의원이 고발한 삼성 에버랜드 주가 조작고발사건은 시효 하루 전에 고소되어 구형이 3년, 5년이 떨어져, 05년 2월 선고날을 잡았는데, 당일 재판부 스스로 변론 재개를 결정하여, 재판 장기화를 통해 삼성재벌을 봐 주었다. 또한, 04년 7월 1차. 2차 검찰에 고소한 핸드폰 불법 복제를 통한 위치추적, 그것도 죽은 사람의 명의를 도용하여 삼성관련 노동자를 사찰한 사건이 검찰 수사 8개월만에 05년 2월 수사가 중단됐다. 과거 검찰이 권력의 시녀라고 온갖 비난과 매도를 당한 적은 있어도 검찰의 무능을 스스로 인정한 전례는 없었다. 검찰의 무능을 인정하면서까지 삼성재벌을 봐 준 위치추적 고소사건을 기소중지한 날은 검찰의 치욕의 날로 기록될 것이다. 특별 검사가 삼성재벌을 재수사하라! 개혁이라는 국민의 뜻을 등에 업고 등장한 노무현 정권마저도 밝혀내지 못하는 천민 자본 삼성재벌의 온갖 불법비리에 대하여, 국회에서 임명한 특별 검사에 의해 엄정한 재수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수많은 피해 사례와 수 많은 피해 당사자들이, 두 눈 부릅뜨고 살아 있는데 검찰은 가해자를 밝혀 내지 못하고, 가해자가 없다는 말을 믿으란 말이냐 ! 국민과 피해 당사자들은 , 불법 행위의 가해자, 범죄자가 삼성재벌임을 아는데, 검찰과 삼성재벌만이 모른다고 하는 것은 사회적 죄악이다. 민주노동당은, 노무현 정권하 검찰에 대해, " (수사)주체는, 의지도 없고 능력도 없음을 스스로 고백한 검찰이 아니라, 국회에 의해 임명되는 특별검사여야 한다"며 삼성재벌 관련 의혹 사건과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 검사 임명등에 관한 법률안을 제출하여 현재 국회 법사위에 계류중이라 한다. 위치 추적당한 피해노동자는 법정 구속 ! 본인은 이천전기에서 노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이천전기의 주식인수를 통해 경영권을 장악한 삼성재벌이 파견한 삼성중공업, 삼성전관 (현 sdi ) , 삼성전자 관리자들에 의해 96년 불법 단체 구성등의 이유로 징계해고당하였다. 이후 이천전기는 본인 징계해고 후 삼성계열사로 편입되었다. 이후 본인은 2000년 삼성그룹 해고자 복직 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2002년에는 민노총 해고자 복직 특별위원회 (전해투) 위원장으로, 2003년에는 삼성일반노동조합 위원장으로, 해고자 원직 복직과 삼성계열사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조직 건설활동을 하다가 2005년 2월 22일 삼성sdi 명예훼손 고소사건으로 , 집행유예기간중에 법정 구속되어 앞으로 3년 10개월의 수감생활을 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본인은, 징계해고 이후 10년 가까이 삼성재벌과 투쟁하면서 수 많은 사건에 직간접적인 연관을 맺어왔다. *삼성에버랜드 주가조작 고발사건 *(주) 보광 민주노조 건설 탄압사건 *(주) 새한 유령노조 민주화투쟁 탄압사건 *삼성에스원 노조건설 탄압사건 *중앙일보 인쇄노동자 노조건설 탄압사건 *전남 광주 아르네 삼성전자 노조건설 탄압사건 *호텔 신라 노조건설 탄압사건 *분당 삼성프라자 노조건설 탄압사건 *99년 삼성 sdi수원공장 노조건설 일본감금 납치사건 *삼성 sdi 울산공장 하청노동자 노조건설노동자 납치. 감금. 폭행사건 *삼성 sdi 천안공장 노조관련 노동자 납치사건 *수원 삼성코닝 아텍엔지니어링 노조건설 탄압사건 *삼성 sdi 울산공장 홍보물 배포노동자 납치, 감금, 폭행사건 등에서부터, 최근에는 *핸드폰 위치추적 고소사건 *삼성전자 노조건설 격리, 감금 금품 매수 고소사건 *삼성 sdi 부당노동행위 고소사건 *삼성전자 하청 애니스 노조건설 탄압, 폭행및 불법 하도급사건 *삼성재벌 친족회사인 신세계이마트 노동자들의 경기일반노조 가입관련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미행, 감시, 면담빙자 감금, 인권유린사건등 삼성재벌의 무노조경영을 유지하기 위한 노동자 탄압의 불법, 탈법행위는, 정규직, 비정규직,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무차별적으로 자행되는 범죄행위이다. 이처럼 본인은, 삼성재벌의 족벌세습행위를 위한 불법비리와 노동자 탄압에 맞서 10년 가까이를 고소 고발하고 당하면서 투쟁을 전개하여왔지만 삼성재벌이 처벌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거나 본 적이 없다. 심지어 , 삼성 sdi 울산공장은 집회신고장소에 흙을 쌓고 나무를 심어 아예 노골적인 집회방해를 , 온갖 불법적방법을 자행하여, 이를 울산 지검이 아닌 서울검찰청에 고소하였어도 수사결과는 혐의없다는 것이다. 신세계이마트 취업규칙을 공개하라고 , 경기일반노조에서 행정정보공개 청구를 하였지만 수원 지방노동사무소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비공개결정을 내렸다. 즉, 삼성재벌이라는 물신의 이익에 반하는 수사나 결정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검찰은, 수사 핑계. 시간 지연 삼성재벌 노동자 회유, 탄압고소 취하 ! 04년 7월, 1차, 2차 고소한 핸드폰 불법복제 위치 추적 고소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 과정을 보면, 1) 검찰은 사건접수 이후 수사를 빙자하여 최대한 시간을 지연한다. 2) 검찰에서 시간을 지연시켜 주는 동안 삼성재벌은 , 그 시간동안 고소인을을 회유, 압력을 행사하여 다수의 현장노동자들이 고소취하 하고 노조 (민주노총 금속노조) 에서 탈퇴하였다. 마지막으로 검찰은 , 적당한 시기에 고소취하라는 삼성재벌의 성과물을 토대로 위치추적 고소사건을 기소중지하여, 삼성재벌에게 시간적이고 일시적인 도덕적 면죄부를 주었다. 이처럼, 삼성재벌과 검찰의 사이는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처럼 ,군부독재정권이후 변함이 없다. 과거 삼성재벌은, 집시법을 악용하여 대사관을 유치하여 집회자체를 원천봉쇄하여 왔다. 그러나 민주노총법률원과 본인은, 헌법소원을 제기하여 3년만에 위헌판결을 받은 바 있다. 또한, 삼성재벌은 업무방해 접근금지 가처분신청을 통해 합법적인 집회, 심지어 1인 시위마저 법을 악용하여 원천봉쇄하고 있다. 삼성재벌의 무노조 경영유지를 위해 복수노조 금지조항이라는 악법을 악용하여 노조설립을 원천봉쇄하는 것처럼 말이다. 삼성재벌의 불법 비리에 맞선 노동자 구속 ! 삼성sdi 해고자 송수근은, 소위 합법적인 집회에서 발언한 내용을 꼬투리잡아 두 번이나 구속되었다. 삼성 sdi 수원공장 박경렬씨는, 노조건설 관련하여 99년 12월 , 납치 감금되어 탄압받은 적이 있고 이후 강제 해외출장을 강요당하고 동료에 대한 장기간 해외출장에 항의하다 오히려 폭행범으로 구속되었고, 출소후 해고되었다. 이와 같이, 삼성재벌과 노동자에게 차별적인 사법부의 법 적용은 노노간의 형평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즉, 대한민국안에 존재하는 천민자본 삼성재벌에 대한 법 적용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치외법권 지역 삼성왕국이 , 대한민국과는 별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삼성재벌의 물신은 사법부를 장악하여 대한민국을 망치고 있다 ! 삼성재벌이라는 물신이 떨어뜨리는 돈 고물과 영향력 앞에, 한없이 초라해지고 추해지는 노무현정권하의 사법부에 대하여, 사회단체는 실망과 분노를 감추고 있지않다. 삼성구조조정 본부 법률팀 소속 변호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대검, 중앙지검. 서울지검. 수원지검 출신 이종왕법무실장은 노무현대통령 사시동기이고, 서모검사는 에버랜드 불법주식증여 사건을 수사하던 곳에서 부장검사를 하였고, 수원지검 특수부 이모 검사는 삼성전자 관련 정차장사건의 공판검사로써 , 재판이 진행중에 삼성구조본부로, 말 그대로 공직자의 윤리의식도 없이 직장을 옮겼다. 삼성재벌은, 05년 현재 국내 변호사 , 외국 변호사를 합쳐 100여명의 변호사를 두고 있다. 검사출신 변호사들도 배경이 화려하지 않은가 ! 그러니 감히 누가 삼성재벌을 수사하고 처벌할 수 있단 말인가 ! 그러기에 삼성재벌은 , 이씨 일가 족벌세습경영을 위한 불법비리도, 노동자 탄압 , 인권유린도 , 아무런 죄의식없이 탈법을 저지를 수 있는 것도, 법과 원칙을 앞세워 불법을 합리화시키는 조직적이고 사회적인 범죄조직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본인은, 분노하는 마음으로 삼성재벌의 불법비리를 제대로 수사하기 위한 특별검사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그 날까지, 울산구치소에서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다. 2005. 3. 19. 울산구치소에서 .... 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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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호와의 만남

  • 등록일
    2005/03/21 16:47
  • 수정일
    2005/03/21 16:47
Starry Night Over the Rhone /Arles: September, 1888/ Paris: Musee d'Orsay Evening landscape with Rising Moon/ Saint-Remy: early July, 1889/ Kroller-Muller Museum White House at Night/ The Auvers-sur-Oise: June, 1890/ St. Petersburg, Hermitage The Potato Eaters Self-Portrait in Front of the Easel Japonaiserie : Flowering Plum Tree (after Hiroshige) Skull with Burning Cigarette Langlois Bridge at Arles with Road Alongside the Canal, The Sower, The Tree Roots and Trunks Vincent's House in Arles (The Yellow House) : Arles Wheat Field with Crows Starry Night


고호와의 만남 (II) 1편에서 고호와의 만남이 우연한 만남이었다면 이번의 만남은 나의 의도된 그와의 만남이었다. 난 그를 만나기위해 Amsterdam에 있는 그의 박물관을 찾아간것이다. 먼저 고백하고 싶은건,지금까지 난 London National Gallery에서 보았던 고호의 해바라기를 난 고등학교 미술책에서 본 그 그림이라고 이곳에 오기전까지 믿어왔는데 이곳에 와서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걸 알게되었습니다. 내가 고등학 교 미술책에서 본 해바라기의 그림은 이곳 고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해바라기'였던것이었습니다. 어느 그림이 더 미술적 가치가 있느냐를 떠나서 다만 나의 미술에 대한 무지한 안목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고흐 미술관련 책자에서 고흐는 해바라기를 5점을 그렸는데 3작품이 노란색 바탕의 그림이고, 2작품은 파란색 바탕의 그림이라고 읽었는데 (아무래도 나의 영어실력에 문제가 있었던것 같습니다) 웹에서 본 그의 그림에서 15송이의 해바라기 그림 3점은 노란색배경으로, 12송이의 해바라기 그림 2점은 푸른색 배경으로 되어있었으며 그외 다른 몇송이 해바라기의 그림도 여러점이 있었습다. (관심이 있으신분은 여기를 보시고 London에 있는 해바라기 와 Amsterdam에 있는 해바라기 의 구분법 을 연구해보심이...개인적으로는 테이블과 배경의 경계선의 색깔과 화분에서 그의 서명의 위치로 구분하기로 했답니다.-London=푸른색,윗쪽, Amsterdam=적색, 아래쪽-) 고호는 고갱과 같이 지낸적이 있는데 이 '해바라기' 그림(들)은 고갱의 방을 장식해주기위해 그렸다고 합니다. 또 박물관에는 고호가 Theo와 주고 받은 많은 서신들도 함께 전시 하고 있었습니다. 그 서신들중에는 고호가 고갱과 함깨 지내면서 싸운 시시콜콜한 내용들의 서신들도 있었는데 그것을 보면서 문득 스쳐가는 생각은 혹 고호는 동성연애자가 아니였을까?.. The Potato Eaters : 그외 나의 인상에 남는 작품들로는 먼저, '감자 먹는 사람들(The Potato Eaters)' 이란 작품이었는데 그림 옆에 붙은 설명서에 의하면 왼쪽에 있는 사람이 앉아 있는 의자는 그의 그림처럼 옆면과 뒷면이 동시에 보일수 없다고 한다. 아마도 이것은 그의 실수는 아닐것이고 입체화의 첫 시도가 아닐까?. 무엇보다 이 그림 에 관해서는 그 옛날 국어교과서에 나온적이 있어서 잘알고 있었다. 책에서 고 호는 그의 형/동생(brother)에게 이 그림은 금색액자에 넣으라고 했던걸로 기억 한다. 그때는 몰랐던(어쩌면 국어선생님이 배경설명을 해주셨지만 내가 잊었을 지도 모르는)사실은 그의 형/동생 Theo는 그림 판매상이었다. 그래서 아마도 고호는 금색액자에 넣어달라고 요구했던 모양이다. Self-Portrait in Front of the Easel : 이 그림은 그의 많은 자화상들 중에서 화가로서의 유일한 자화상이라고 설명서에 서 읽은것 같은데...난 다른 한점의 화가 자화상을 웹에서 보았다. 아마도 이 그 림은 제대로된 그의 화가로서의 유일한 자화상이 아닐까?. Japonaiserie : Flowering Plum Tree (after Hiroshige) : 기분이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고호는 일본의 그림에도 관심이 많았던것 같다. 그의 귀가 짤린 자화상(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고호와의 만남 (I)에서 세번째 만남의 그림으로서 이 그림을 난 영국의 Courtauld Institute Galleries에서 보고 진한 감동을 받았었다)의 배경중에 일본풍의 그림이 있듯이 그는 몇점의 일본 풍경화를 그렸다. 이 그림의 설명에 의하면 그는 일본 풍경화들처럼 그림에 액자모양의 테두리를 그렸으며 그 둘레 에 쓰여진 글들은 아무 의미없는 그림적 효과를 위해 써 넣은것이라고 한다. Skull with Burning Cigarette : 이 그림을 처음보았을때 난 고호가 이러한 그림도 그렸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금은 의외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떠오른 잡념은 이 그림은 금연 공익광고의 그림으로 사용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리고 박물관 기념품 가게에서 이 그림을 한장샀다. 책상위에 붙여놓고서 금연을 시도해 보려고... Langlois Bridge at Arles with Road Alongside the Canal, The : 아마도 암스테르담을 여행하다가 보면 이 그림의 다리를 볼수 있을것이다. 나도 다리가 아름다워 이 다리의 야경사진을 찍었으니까..그의 그림에서도 이 다리가 모델이 된 여러 그림들이 있었다. 하지만 설명서에 의하면 고호는 이다리를 보고 그린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 다리가 만들어졌을때 그는 파리에 있었고 그곳에서 그렸다고 한다. Sower, The : 사실 이 씨부리는 사람의 그림에 대한 설명서의 기억은 확실하지 않다. 다른것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나. 기억이 맞다면 나무가 그림의 대각선 으로 지나가는데 그림에서는 이러한 구도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림이 2등분 되는 인상을 주기에. 하지만 그는 그러한 금기를 의도 적으로 사용한것 같다. Tree Roots and Trunks : 이 그림이 무엇을 묘사하는지 애매하지만 나무의 뿌리와 줄기(Tree roots and Trunks)들을 그린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고호의 표현에 의하면 'something life's struggle'(정확하게 옮겨적은건지는 잘 모르겠음)이라고 하는데.. 설명서에서도 정말 그렇게 느껴지는지 독자에게 묻고 있었다..하여턴 난 그의 의도가 마음에 들어 이 그림의 엽서도 한장 샀다. Vincent's House in Arles (The Yellow House) : Arles에서의 그의 집을 그린것이라고 한다. 그의 집을 녹색으로 표현한것이 정말 녹색대문과 창문의 집에서 살아서 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집을 녹색으로 칠한것은 꼭 어린아이들이 그들의 그림에서 자신의 집들을 밝은색이나 크게 그려서 강조하는것 처럼 그린것 같아서 재미있게 느껴졌다.(이건 순전히 저의 개인적인 느낌입니다). 왜 하필이면 녹색일까?..풍차마을에서 느낀것인데 그곳의 집 들은 거의가 녹색으로 되어있었다. 아마도 그 옛날 이곳사람들은 녹색을 무척 좋아했었나보다. Wheat Field with Crows 내가 이 '밀밭의 까마귀들(Wheat field with crows)'을 소개하는건 설명서에 의하면 이 그림이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믿어지는 작품이라고한다. 외국에서는 까마귀는 길조를 의미하는데.... 그외 여러가지의 그의 그림이 있었지만 지금 생각나는건 이정도인것 같다. 여기서 발혀두고 싶은건, 음악과 더불어 그림에 대해서 난 완전히 무지한 사람이다. 이 글의 내용은 부정확할수도 있으며, 전적으로 나의 주관적인 느낌이라는것을 꼭 발혀두고 싶다. 물론 자세한 원문을 찾아가며 적을수 있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들고...나의 개인적 감정에 영향을 미칠수 있다는 변명같지 않은 변명으로 대신하며...... Starry Night :마지막으로 천문학도로서 난 고호의 '별이 빛나는 밤(Starry night)'을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아쉽게도 이 그림은 고호 박물관에는 없다. 그래서 조사를 해보니 New York에 있는 The Museum of Modern Art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언제가 난 뉴욕으로 가리라. 이 그림을 보기위해서. 그리고 그 그림을 보고 난후 난 고호와의 만남 (III)완결편을 쓸것이다. 정말 이건 우연이라고 난 생각한다. 고호 박물관을 갔다온후 이틀뒤 난 벨기에의 숙소에서 우연히 영국의 신문 Guardian지를 보게되었다. 그것을 보게된건 그곳에 난 기사를 보고서 난 그것이 어디 신문인지를 확인하였 던것이다. 기사 내용의 요점은 최근 허블망원경(HST)로 찍은 어떤 별의 사진이 고흐의 starry night에서 묘사된 별과 유사하는것이었다. 그리고 그 두사진을 위 아래로 나란히 실고 있었다. (돌아와 인터넷 신문을 검색 해보니 HST로 찍은 별사진만 있고 고흐의 그림은 인터넷판에 없었다. 이런 나쁜놈들 고호의 그림은 왜 인터넷에 실지 않은거지?.. 그 기사를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해보세요..음 활자판 신문을 구해서 스크랩을 하고 싶은데.....) 2004년 3월 7일 암스테르담에 있는 고호 박물관을 다녀와서.... 고호와의 만남-(III) 먼저 다시 한번 고호와의 만남을 갖게 된것이 무엇보다 무척 기쁘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었다. 고호와의 두번째 만남이 있은후, 나는 인터넷을 통해서 그의 'Starry Night'이라는 작품의 2000조각 직소를 사서, 외로운 날들이면 그의 작품과 대화를 하며 하나하나 맞추어나갔다. - 완성된 직소를 보시려면 자화상 (I)의 배경을 유심히 살펴보시길.- 완성후 방에 걸어놓고 지내다 그가 그린 별이 최근 우주망원경으로 찍은 먼지에서 별이 탄생하는 모습과 비슷하다는 기사를 읽은후 난 매일밤은 아니지만 그 그림을 쳐다볼때면 혹 또 다른 천문학적 연관성은 없을까 하는 생각에 그 그림을 한번씩 더 쳐다보곤하였다. 하지만 그 어떤것도 찾지 못하고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더이다... 그러던중 올초 난 다시 그의 그림으로 된 달력을 갖게되었고 달력속의 그림들을 한장 한장 넘겨보다 난 예전에는 미쳐 감지하지 못했던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의 그림 'Starry Night over the Rhone'라는 그림에는 북두칠성의 그림이 선명 하게 그려져있었다. 그리고 천문학도라면 머리에 스치고 지나갈 생각을 하게되었다. 그당시의 별자리 모습을 재현해보면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를 정확히 추정할수 있지 않을까? 라는.....그래서 당장 구글에서 그 그림을 그린 Arles 지방의 위도를 조사하기위해 'arles latitude' 를 치는 순간 난 허탈해졌다. 이미 누군가 나와 같은 생각으로 이미 조사 한것이 아닌가!!!. 그 사이트는 첫번째 검색항목으로 검색되어졌다..... (혹 믿기지 않으시면 www.google.com에 직접 검색해보시길) 하여턴, 자세한건 아래에 링크한 사이트를 참조 하시기 바람니다. Van Gogh's Starry Night over the Rhone (Arles, 1888) 그 사람들은 고호가 그의 동생(Theo)에게 보낸 서신들을 기초하여 이 작품의 제작일을 1888년 9월 25일로 추정하고 그림에서의 모양처럼 북두칠성(Big Dipper or Great Bear)이 위치할려면 오후 10:30분경이라며 'The Sky'라는 프로그램으로 그당시의 북두칠성의 모습을 재현하여 설명하고 있었다. 아래 그림은 내가 'starry night'(참 프로그램 제목도 잘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라는 천문 프로그램으로 재현하여 비교한 그림이다. 그 사람들의 지적처럼, 밝기나 상대적 위치는 조금 부정확한것 같다. Starry Night Over the Rhone Arles: September, 1888 Paris: Musee d'Orsay Great Bear 25 Sept 1888, 10:30 PM simulated with 'Starry Night' 혹시나 하는 마음에 또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내가 그렇게도 찾아헤메이던 해답에 대한 제안들이 있었다. 'starry night'에 그려진 별자리는 과연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은 Aries(양자리)라고 제안하고 있었다. Vincent online Forum에서, 아울러 자세한 그림 비교 설명과 함깨. 사실 위의 그림처럼 그렇게 선명하지 않고 신빙성은 낮아보이지만 난 나름대로 어쩌면 그게 정답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고호가 이 그림은 비록 Saint-Remy 로 옮겨와서 그린것이지만, 혹 그가 어떤 별자리를 그리고자 했다면 Arles 지방이름에서 연상하여 Aries를 그릴수도 있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두 단어의 유사성에 그 가능성은 높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이는 그 당시 그는 Saint-Remy병원에 있었기에 실제로 야외에 나가서 그린것이 아니고 병원창문을 통해보아 퍼져보이는 별을 그린것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중앙의 나선모양은 그 당시 나선성운에대한 천문지식을 고호도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그린것이라는 말을 한다. 정말 고호가 야외에서 그린것이라면, 그건 역사상 가장 나쁜 천체 관측 기상조건이었을것이라는 우스개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생각한건 그 나선모양의 회오리들이 얼마전 본 영화 '윔블든'에서 영향을 받아 혹 혜성을 그린것이 아닐까 하고 그림이 그려진 1889년의 헤성들을 조사해보니 3개정도 있는것 같은데 그건 맨눈으로 보이기에는 너무나 어두웠다. Alphonse Loyis Nicolas Borrelly라는 프랑스 Marseilles(Saint-Remy와도 가깝 다고 할수있는)사람이 1904년에 발견한 19P/Borrelly라 명명된 혜성(물론 가장 밝을때가 8등급인)도 있었지만. 또 다른 떠오른 생각은 그럼 중앙의 가장 밝은 별은 혹 초신성이 아닐까? 또 인터넷을 검색하니 그 당시에 폭발한 초신성의 기록들은 발견할수 없었다. 어떤 글을 보니 그 중앙의 밝은 별은 금성(Venus)라고 한다. 인터넷의 정보들은 이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Evening Landscape with Rising Moon (1889)'라는 작품은 고호가 그의 동생 테오에게 달이라고 언급한 편지가 발견되기전인 1930년도까지는 일몰(sunset)인지 월출(moonrise)인지 몰랐다고 한다. 하지만 그 편지는 날짜가 적혀있지 않고 종국에는 분실되어서 그 편지의 진위가 의문시 되었는데, Southwest Texas주립대의 Olson교수가 1889년 7월 13일 오후 9:08분에 달의 모양이 그렇게 해안절벽에 걸린다는 사실을 현지조사와 컴퓨터 계산을 통해 밝혀냈다고 한다. 또 하나 그의 작품 'White house at Night'에 떠있는 별은 금성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추정시간은 1890년 6월 16일 오후 8:00경, 고호가 자살하기 정확히 6주전. Venus pinpoints Van Gogh painting (BBC news) Evening landscape with Rising Moon Saint-Remy: early July, 1889 Kroller-Muller Museum Moonrising 09:08PM, 13 July, 1889 Simulated with 'Starry Night' White House at Night, The Auvers-sur-Oise: June, 1890 St. Petersburg, Hermitage Venus 08:00 PM, 16 June 1890 simulated with 'Starry Night' Starry night에 관한 여러사람들의 의견에 기초를 하여 나름대로 그 그림이 그려진 시기를 추정해보았다. 먼저, 고호의 편지들중에서 이 그림이 제일 먼저 언급되는(혹 내가 편지를 철저히 조사하지 않아서 오류가 있을수도 있지만) 편지를 찾아보니, 1889년 6월 17(혹은 18일) 그의 동생 테오에게 보낸편지 인것 같았다.(아래부분의 전 편지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세요) ..... At last I have a landscape with olive trees and also a new study of a starry sky...... 그리고 내가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를 추정함에 있어서 가장 큰 가정은 고호가 그 당시 달의 위상(phase)을 그대로 그렸다는고 가정하는 것이다. 물론 고호가 달의 위상을 제대로 그렸다고/혹은 그리지 않았다고할 아무런 근거는 없다. 하여턴, 그리하여 달의 위상이 맞는 달을 찾아보니 6월에도 있었지만 그건 17일 이후여서 이전 달(month)을 조사해본 결과 22일무렵부터 달이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다(아래 오른쪽 그림 참조). 다음으로 한 가정이 중앙의 밝은 별이 사실은 금성(Venus)이라는 사람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그 그림과 비슷한 시간을 찾아본 결과 5월 25(나름대로 25일 위상과 비슷한것같아서) 오전 4:00경(금성과 달위 위치를 고려하여)이 나왔다. 과연 고호가 그런 이른 새벽에 일어나 이 그림을 스케치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고, 또 양자리의 별들로 그림 왼쪽 위의 몇별들은 설명할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특히 달옆의 두별들을 설명하지는 못하는것 같다. 논의의 여지가 많고 앞으로 더 조사할 필요가 있지만 잠정적으로 난 고호는 이 그림을 1889년 5월 25일 이른 새벽(4:00) 에 일어나 이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한다(결론내렸다). Starry Night Saint-Remy: September June, 1889 St. Petersburg, Hermitage Venus and Moon 04:00 AM, 25 May 1889 simulated with 'Starry Night' 후기 : 사실 고호는 개인적으로 현재 그의 그림중 최고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 작품(starry night)보다, (별과 관련해서) Starry Night over the Rhone나 Cafe Terrace on the Place du Forum at Night을 (또는 Road with Cypress and star) 더 좋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편지들 속에서 많이 회자되는걸로 보아서. 그리고 한가지 궁금증으로 떠오르는것은 왜 Starry Night over the Rhone를 Starry Night이라 제목으로 붙이지 않았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편지 글들속에서는 늘 그 작품을 starry night(sky)로 표현한것 같은데...그리고 사실 Starry Night작품에 대해서는 언급이 별로 없는것 같았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결과를 얻어서 이 작품(starry night) 이 그려진 시기에 대한 언급이 없는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들었다. 분명 다른작품을 했다면 이 작품에도 욕심이 났을텐데... 시뮬레이션 사진의 배경밝기는 하늘의 배경밝기정도를 고려한 색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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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월의 여자, 아니 십이월의 여자

  • 등록일
    2005/03/17 10:52
  • 수정일
    2005/03/17 10:52
* 이 글은 <엄마...>게시판 가기님의 [여성이 되다(뉴스앤조이 기사)] 에 관련된 글입니다.

** 도종환 선생님의 사이트에서 본 글이 알엠님 글과 매치가 되어 옮겨봅니다. 전 되려 사역자이신 분의 글이 이 글과 대치되어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되려 부럽게 다가옵니다. 자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러나 그렇지 못한 무수한 여성들.... 가부장이라는 사회 제도라는 틀에서 억매여 있습니다. 제가 느끼지 못하는 것을 말할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여성으로서 지금도 삶을 콘트롤 할 수 없는 사람들..... 누군가 삶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렵고도 쉽습니다. 그러나 현재 그 삶이 자신의 삶이 아니면 이해는 그만큼 반전된다고 봅니다. 삶은 현재진행형이기에... 자주가는 도종환 선생님의 이전 글에서 쇠망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는데... 알엠님 글과 매치가 될 것 같아서 훔쳐 놓아 봅니다.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온 산의 모든 나무가 잎이란 잎 다 떨구고 가진 것 다 잃어 황량해진 십일월 하순 같은 여자. 산뽕나무 잎이랑 두충나무 잎 군데군데 푸른 잎들도 있었는데 그것들마저 어느 날 한 순간에 다 지고 산천은 갑자기 잿빛의 겨울 풍경으로 몸을 바꾸고 말았는데 인생이 그런 잿빛 풍경 같은 여자.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뚝뚝 떨어지고 문바람 스며 들어와 방안도 썰렁하고 자면서도 어깨가 시려 뒤척이는데 그런 냉기 속에서 일생을 산 여자. 십일월의 여자. 아니 십일월에서 십이월로 옮겨가듯 그렇게 살아온 여자. 그 여자는 "육지 것하고 붙어먹은 년"의 딸이었습니다. 새 아버지는 엄마와 딸을 그렇게 욕하면서 모질게 대했습니다. 일곱 살 된 딸이 있는 여자라는 걸 알고 같이 살자고 해 놓고서도 툭하면 그렇게 몰아부쳤습니다. 낳아주신 아버지는 전쟁 중에 군인들을 훈련시키러 온 군인이었습니다. 엄마를 데리고 한동안 살다가 육지로 가버렸습니다. 가서는 영영 소식이 없었습니다. 생부의 얼굴을 모르는 딸은 씨다른 동생을 업어 키웠습니다. 소 부리듯 일을 시켰지만 보리죽 한 그릇도 배불리 먹여주지 않았습니다. 광목치마 한 겹으로 엄동설한을 낫고 내복 한 벌 못 입어보고 나일론 양말 한 번 못 신어본 채 동상으로 손발이 얼어터지곤 했습니다. 새 아버지의 구박을 견디기 어려울 때면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고아원으로 갔습니다. 그러다가 고아원 문 앞에서 붙안고 울다가 되돌아오곤 했습니다. 친구들은 교복 입고 학교 갈 때 호미 들고 밭으로 갔다가 밤이면 야학당을 다녔습니다. 고단한 몸으로 한밤중까지 숙제하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쥐라는 놈이 문틈으로 튀어 들어오다가 등잔불을 떨어뜨렸고 겁이 난 그녀는 어머니의 매질이 무서워 싸락눈이 내리는 새벽 집을 떠나왔습니다. 그리곤 남의 집 식모살이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중풍으로 휠체어에 의지해서 지내야하는 그 집 주인 사장님 병수발을 하고 다른 식구들은 못 알아듣는 사장님의 말을 그녀는 알아듣고 전달해주곤 하였습니다. 병수발 임무를 맡으면서 바깥에서 오시는 손님들에겐 딸 역할을 했고 그 몇 년은 그래도 행복하였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예절과 법도도 배웠고 옷도 좋은 옷으로 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아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마침내 사랑고백을 해오고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없어서 집을 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미친 듯 아버지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아버지를 꼭 만나야 할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를 찾아야 자기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고향이 경기도라는 것과 최아무개 중사라는 이름만 가지고 병무청을 찾아가서 거머리처럼 매달렸고 온갖 데를 다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병이 들었습니다. 죽을 병이 들었고 삶을 포기했습니다. 죽기 전에 꼭 한 번만 어머니를 보고 싶어서 있는 돈 다 털어 제주로 내려가 어머니 집 문 앞까지 갔습니다. 딸을 버린 어머니였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어머니여서 죽어가는 딸을 버리진 않았습니다. 식모살이 하면서 부쳐준 돈으로 어머니는 땅을 사놓으셨습니다. 그 땅 얘기가 나오자 의부는 그녀가 마시려는 약 그릇을 발로 걷어찼습니다. 문짝을 부수고 어머니를 두들겨 팼습니다. 그녀는 또 떠나와야 했습니다. 그래도 딸이라고 양은솥에다 굼벵이를 달여 먹여가며 살려보려고 애쓴 어머니 힘인지, 병상에서 눈물로 기도해준 이름도 모르는 수녀님 덕인지 겨우 목숨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고아 아닌 고아로 자라 근본도 없는 게 어디를 넘보려 하느냐고 첫사랑은 실패로 끝이 났고 아이 둘이 있는 홀아비한테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 시골집에 갔다 오는 길에 옛 애인 집에 들러 취하도록 마시고 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덧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결혼한 지 채 일 년도 못 되었는데 말입니다. 낳은 지 50일밖에 안 된 딸을 안고 그녀는 통곡했습니다. 자기가 낳은 아이든 아니든 제 자식처럼 키우려고 노점 행상을 하며 손발이 터지도록 일했습니다. 그런데 교통사고 당한 후 아이들 앞으로 나오게 만든 보험료가 있는 걸 알고 시아버지는 그걸 당장 현금으로 내놓으라고 난리를 쳤습니다. "서방 잡아먹고 전실 새끼 피까지 빨아먹는 년"이라고 욕을 퍼부었습니다. 살기 등등해져 온갖 욕을 하며 짐승처럼 괴롭히는 상황을 견딜 수 없어 보험을 시아버지 앞으로 다 인계해주고 딸 하나 데리고 나왔습니다. 일곱 평밖에 안 되는 작은 꽃가게 한쪽에 주방 겸 잠자리를 만들어 거기서 살았습니다. 시아버지는 쌀 두말과 그 여자 앞으로 들어왔던 조의금 빈 봉투 50여 장을 주고 갔습니다. 우는 아이와 함께 며칠을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의 울음소리마저 들리지 않아 정신을 가다듬고 마른 젖을 물렸습니다. 젖은 말라버려 나오지 않았고 둘러보아도 먹을 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기운차리라고 돈 얼마를 놓고 가기도 했습니다. 가게는 점점 기울고 월세는 밀려 거리로 장사를 나왔는데 시아버지가 찾아왔습니다. 아들이 결혼자금으로 얻은 농협 빚 갚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다 그녀가 처녀 때부터 운영하던 꽃가게가 당신 아들 것이라며 월 20만원씩의 생활비까지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식 둘 있는 아들 장가보내면서 방 하나 얻어주지 않고 결혼 자금으로 얻어 쓴 빚까지 과부가 된 며느리한테 갚으라는 시아버지였습니다. 요구대로 하지 않으면 술을 마시고 와 쌍욕을 해대고 장사를 망쳐놓곤 했습니다. 나중에 시가 친척 한 분이 그녀를 붙잡고 우시며 하는 말을 듣고 알았습니다. 땅 부자인 그 집에서 맏며느리인 그녀를 제쳐놓고 재산을 분할하는 것에 대한 꺼림칙함 때문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시댁의 재산권을 포기한다면 여자도 단독으로 호적을 가질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일가를 창립하여 나왔습니다. 남자 복이 없어도 어쩌면 이렇게 없을 수 있는지 혼자 사는 그 이후의 삶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던 남자가 있었는데 뱀보다 더 싫은 그 남자를 피하는 길은 재혼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자기를 돕겠다는 남자가 있어 서둘러 그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남자 사기꾼이었습니다. 남편의 교통사고로 인한 보상금이 두둑한 것으로 착각했다가 뺑소니 사고였다는 것을 알고는 머리채를 잡아끌고 법원으로 갔습니다. 두세 달만에 끝나고만 결혼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청혼을 받아주지 않으면 자결하겠다는 목사를 만났지만 그 결혼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고 그녀는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도시 생활을 접고 딸아이를 데리고 피반령을 넘어 산골로 내려왔습니다. 거기서 채소밭 일구고 꽃 심어 가꾸고 장애로 누워 있는 이들이나 의탁할 데 없는 사람들 돌보며 살고 있습니다. 골짝골짝 다니며 면사무소에서 수당 받고 하는 수급자 실태조사나 인구조사를 하거나 컴퓨터를 가르치기도 하고 찌개를 끓여들고 독거노인을 찾아다닙니다. 그녀가 이사 와 사는 회북면만 해도 스물 한 개 동네에 영세민이 100명이나 됩니다. 자기보다 더 힘든 인생들이 많아서 그들 때문에 바쁩니다. 모녀가 비둘기 같이 지내다가 딸 정이가 올해 고등학교를 청주시내로 가는 바람에 요즘은 혼자 지냅니다. 외롭지 않느냐고 물으면 외로울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고독은 자기를 성찰하게 했고 고독은 글을 쓰게 했다고 합니다. 고독은 아버지 대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했고 고독은 버려진 아이들, 늙고 병든 노인들을 친구가 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고독은 더 이상 자기가 싸워야 할 적이 아니고 생활이 되었다고 합니다. 고독으로 잿빛이 된 십일월의 야산 같은 이 여자가 원고뭉치를 들고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녀가 있는 동네는 내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터라 맞춤법에 맞지 않는 곳이 많은 그 여자의 글을 읽다가 나는 그 원고를 자주 밀쳐 놓곤 했습니다. 읽고 싶지 않은 날이 많았습니다. 읽다보면 너무 속이 상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팔자가 기구할까 어쩌면 운명은 이 여자에게 이렇게 혹독한 것일까, 그런 생각에 먹은 것이 잘 안 내려가는 날도 있었습니다. 이 여자의 인생 어느 부분을 떼어다 글로 옮겨도 절절하지 않은 구석이 없습니다. 대목 대목이 슬프고 가슴 저립니다. 혼자 딸을 키우며 눈물 흘리는 이야기는 너무 가슴이 아파 원고를 멀찌감치 집어 던져 놓았습니다. 이 여자가 만난 대부분의 남자는 이 여자에게 크나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제 욕심만 채우기에 급급한 남자들이었습니다. 무책임한 남자들이었습니다. 한 여자의 운명을 무자비하게 짓밟아 놓고 떠나버린 남자들이었습니다. 무책임한 아버지가 그랬고, 난폭한 새 아버지가 그랬으며, 황망하게 세상을 떠난 남편이 그랬고, 돈에 눈이 어두운 포악한 시아버지가 그랬습니다. 새로 만난 남자들도 모두 그를 이용하려 들었고 탐욕스럽기만 했습니다. 남자들 참 나쁩니다. 남자들 정말 못됐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걱정 되는 게 하나 있었습니다. 이 여자의 딸 정이가 엄마처럼 외할머니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에게 당하고만 살아도 안 되고 모든 남자들을 적대시하며 살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고 따뜻하게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 여자는 남자들을 미워하고 욕해도 되지만 그게 딸에게 그대로 전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세상을 바르게 보고 인격적인 눈으로 대하며 인간적인 배려를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살 때 아빠를 만나러 간다고 들떠서 따라나섰다가 무덤 속에 아빠가 계신다고 하자 󰡒엄마 빨리 삼촌들 오라고 해, 아빠 꺼내서 빨리 병원에 가.󰡓그러면서 눈물 범벅이 되어 몸부림치던 아이, 사람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말해 주었더니 공원에서 놀다가 흙을 한 움큼 쥐고 들어와 󰡒엄마 이것도 아빠야?󰡓 하고 묻던 딸아이는 지금 시인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 아이의 별빛 같은 감수성을 잘 키워주어야 합니다. 그런 시적 감수성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사람을 따뜻하게 만날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엄마는 비록 십일월, 십이월 같아도 딸은 삼월 같이 살도록 해야 합니다. 삭막한 풍경의 끝에서 대나무들은 아직도 푸르게 출렁입니다. 사람도 황량한 사막 같은 인생을 살았어도 그 가슴 한가운데 푸르게 출렁이는 댓잎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여자도 인생의 십이월이 다 가기 전에 꼭 한 사람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길 바랍니다. 남은 생애동안 남자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어루만져주며 정말 인간적인 따듯한 정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마지막 한 사람을 만나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하얗게 쌓인 눈 위를 다정하게 팔짱 끼고 걸어갈 수 있는 사람, 먼저 일어나 마당의 눈을 다 치우고 신발에 쌓인 눈도 탁탁 털며 조금 더 자라고 속삭여주는 사람, 부족한 부분도 허물이 될만한 습관도 말없이 덮어주며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람, 아내의 딸을 제 딸 이상으로 사랑하며 키워주는 사람, 어깨가 넓고 등이 따뜻한 사람, 나누고 베풀 줄 아는 믿음직한 사람을 만나 두 사람의 사랑을 이웃에 나누어 주며 살아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꼭 만나게 되길 바랍니다. 지난 오십 년, 운명의 신은 이 여자에게 너무 가혹했습니다. 이 정도면 갚아야 할 전생의 어떤 업보도 갚았다 할 수 있습니다. 제발 이 삶의 모진 고개를 넘어 모녀가 봄이 되어 활짝 꽃피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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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한 시간

  • 등록일
    2005/03/17 10:27
  • 수정일
    2005/03/17 10:27
* 이 글은 갈막님의 [새벽에 걸려온 전화..] 에 관련된 글입니다.

** 도종환 선생 사이트(도선생도 훔쳐온 글임.)에서 글중에 훔쳐와 트랙백 걸어봅니다. 글 읽다 갈님의 게시판 글과 매치가 되어 트랙백 걸어봅니다.(자중해야 하는데 목련이 필때까지는...) 바위 위에 고요히 눈을 감고 앉아 있습니다. 고요 속에서 나도 없고 생각도 없이 있습니다. 내가 멈추자 시간도 멈추어 있는 것 같습니다. 나도 그냥 바위의 일부가 되어 앉아 있습니다. 바람이 골짜기를 따라 내려와 남쪽 언덕을 넘어 갑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나도 머리칼을 바람에 맡기고 앉아 있습니다. 바람이 아무런 막힘이나 걸림 없이 나를 지나갑니다. 내가 있다는 걸 어디에서도 느끼지 못하고 그냥 나를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나는 빈 밭처럼 있습니다. 갈지도 않고 일구지도 않고 씨를 뿌리거나 농사를 짓지도 않습니다. 몇 해에 한 번씩은 그냥 밭을 밭으로 놓아두어야 할 때가 있는 것처럼 나도 나를 그냥 빈 밭처럼 놓아두고 있습니다. 이 흙의 몸속에서 계속 무언가를 수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에서도 밭을 풀어주고, 잠시도 멈추지 말고 거두어들이고, 거둔 것을 나누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에서도 나를 놓아줍니다. 화엄의 숲에서 나와 해인의 초막으로 갑니다. 나무가 되어 다른 나무들과 함께 숲을 이루고 그 숲 안에 대동세상을 만들어 가고자 지난 몇 십 년 가슴 벅차고 힘들고 기뻤으나, 심신에 병이 들어 쫓기듯 해인을 찾아 갑니다. 해인. 바닷물에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까지 다 비쳐 해인이려며 풍랑이 가라앉아야 합니다. 번뇌의 물결, 지나친 욕심의 파도, 끝없는 밀려오는 소유에 대한 집착, 헛된 명예와 허영에 매달리는 어리석음의 밀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고요하고 고요해진 바다에 맑은 내 얼굴이 초승달처럼 비칠 때 그 해인의 삼매에서 다시 화엄의 세상을 향해 몸을 돌려야 합니다. 본래 화엄의 큰 눈을 뜨기 직전 가장 깊은 순간이 해인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해인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화엄의 문을 열고 나와 해인을 향해 길을 나섰으나 해인에는 이르지 못하고 이렇게 산중턱에 앉아 있습니다. 나뭇잎을 쓸고 가는 바람소리가 물결소리 같습니다. 바람소리가 철썩이며 숲 위를 지나갑니다. 나무들도 버려야 할 것이 있는 걸까요. 그래서 저렇게 철썩이고 있는 걸까요. 나무들도 탐욕스러운 데가 있을까요. 나무들도 살기 위해 분노하고 다른 나무들을 해치고 그럴까요. 저만 살려하다 제가 먼저 쓰러지는 어리석은 짓을 할까요. 그렇다면 나무들도 업의 윤회에서 자유롭지 못할 겁니다. 칡넝쿨을 치렁치렁 매달고 있던 나무, 다래넝쿨에 감겨서 자유롭지 못하던 나무, 으름덩굴을 제 열매처럼 달고 잠시 허영의 계절을 살아가던 나무들은 겨울에 폭설이 내리면 바로 그 넝쿨을 버리지 못한 것 때문에 넝쿨그물 위에 눈덩이를 짊어지고 있다가 그 무게에 눌려 가지가 부러지거나 꺾이는 걸 보았습니다. 그런 걸 보면 나무도 다 저마다 두터운 제 업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나무가 욕심을 지니고 있다하더라도 사람처럼 탐욕스럽지는 않을 겁니다. 아무리 나무들이 어리석다 할지라도 사람들처럼 어리석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잘 되기 위해서라면 어떤 모함도 술수도 모략도 폭력도 다 동원하는 사람들처럼 모질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도 고요히 돌아와 앉아 자신과 만나는 시간을 하루에 한 시간씩만 갖는다면 부끄러움도 알고 뉘우칠 줄도 알 겁니다.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깨끗하고 아름다워지게 하기 위해 하루에 한 시간씩만 투자할 수 있다면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정신적으로 풍요로워지고 넉넉해진 사람이 되어 하루를 살 수 있을 겁니다. 지금보다 내적으로 충만하고 값진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고자 합니다. 몸을 위해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하루 한 시간 내적인 풍요로움을 위해 나는 이렇게 나를 고요 속에 맡겨 둡니다. 그러면 바람이 나를 맑게 씻어주고 부드럽게 매만져 줍니다. 햇빛이 내려와 내 안을 가득 채우고 따듯하게 합니다. 바람 속에 햇빛 속에 나는 지금 고요히 멈추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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