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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교조치 그 이상을 요구하며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1/06/08 14:23
  • 수정일
    2015/04/17 18:34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집단성폭력과 관련하여 쓴 대자보입니다. 대자보를 제출하기까지 교열을 봐주신 구멍님, 대자보 형식으로 다듬어주신 챨리님 그리고 지지를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출교조치 그 이상을 요구하며

 

학내 여론은 성폭력을 행사한 가해자들의 출교조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출교는, 그 형평성을 고려할 때 충분히 가능한 하나의 징계입니다. 출교조치가 가해자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처벌 아니냐는 일련의 반응은 부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집단성폭력은 한편으로는 형사범죄일 뿐 아니라 여성에 대한 구조적 폭력의 발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이 사회구성원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 특히 이번 경우 여성 학생들이 고려대학교 학생사회에서 배제되어 있다는 것을 폭로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1).

 

출교조치 요구는 집단성폭력이 ‘잘못된 행동’임을 지적한다는 점에서는 전적으로 정당합니다. 그러나 출교조치 요구가, 고려대학교 학생사회가 여성 학생들을 배제하고 있고, 여성 학생들을 남성 학생들과 대등한 개인이자 주체로 인식하지도 인정하지도 않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면죄부로 작용할 때, 우리는 출교조치를 통해 이번 사태를 망각하려는 고려대학교 학생사회의 시도를 단호하게 차단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고려대학교 학생사회는 이번 집단 성폭력 사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요? 사태가 언론에 공개된 직후, 고파스(www.koreapas.net) 등지에 올라온 글들은, 아예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고려대학교’와 분리시키려 했고, 이 사태를 ‘고려대학교’와는 무관한 하나의 해프닝으로 처리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태 ‘자체’에 관해 많은 학생들은 ‘부끄럽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분노에 가득 차 가해자들이 ‘고려대학교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말했습니다.

 

여태까지 성폭력은, 피해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행위보다는 피해자 가족의 명예를 더럽히는 행위로 치부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족 명예를 더럽힌 소위 문란한 여성은, 성폭력 피해자임에도 온정적인 시선을 받지 못했습니다. 법조계는 1990년대 이래 이런 인식을 어느 정도 변화시키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 그리고 고려대학교 학생사회는 아직까지도 아무런 거부감 없이 이런 인식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말했다시피 학생사회가 분노한 것은 가해자들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이 아니라, ‘고려대학교 명예를 실추시켰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성폭력이 피해자 가족이나 고려대학교 명예를 더럽힌다는 인식이야말로 성폭력 주범은 아닐까요? 성폭력을 사회 명예 문제로만 보고 거기서 피해자 여성을 배제시키는 것이야말로, 여성이 성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자신의 성적 결정권을 향유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관계의 도래를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이번 집단성폭력이 ‘고려대학교 명예를 실추시킨’ 사태가 아니라, 남성들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한 사태이자 여성을 배제하는 고려대학교 학생사회 현실을 폭로하는 사태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출교조치가 행해지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가해자를 ‘징계’한다는 의미만을 지니며, 그러한 징계가 고려대학교 학생사회의 ‘정상성’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때문에 방점은 언제나 징계 이후에, 혹은 징계와 무관한 이 학생사회의 변화 그 자체에 찍혀야 합니다.

 

고려대학교 학생사회에서는,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서의 성폭력이 우리가 인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빈번하게 자행되고 있습니다. 성폭력은 고파스 익명게시판에서, 결코 여성 교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어떤 남성 교수 발언에서, 남성 학생에게는 편하기만 할 술자리들에서, 어떤 여성 학생 자취방에서 끊임없이 벌어져왔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성폭력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성폭력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고려대학교 남성 학생들은, 여성을 소유의 대상으로 보고 여성을 음식물에 비유하고 여성을 ‘더 나은 자위도구’로만 보는 행태를 즉각 중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성 학생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학생사회에 기입함으로써 고려대학교 학생사회와 여성-남성 관계를 전화시키려 할 때, 남성 학생은 그들의 행위에 냉소하는 것이 아니라 반성적 위치에서 자신을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고려대학교 석순    /    법과대학 김푸른솔

 

1) 물론 여성 학생들도 형식적으로는 학생사회에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폭력 사건 자체가, 그 형식적 포함이 기만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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