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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중심주의를 옹호하며

  • 분류
    단상
  • 등록일
    2014/01/04 23:35
  • 수정일
    2015/04/17 18:34
  • 글쓴이
    푸우
  • 응답 RSS

서울대 사회과학대 성폭력 사건이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성폭력 개념과 피해자 중심주의가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사회과학대 학생회는 반성폭력 회칙을 개정하며 피해자 중심주의를 폐기했고 성폭력 개념을 수정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1. 피해자 중심주의가 도입된 맥락과 무죄추정의 원칙, 2. 성폭력 희화화와 대중운동을 다루겠습니다. 마지막으로 3. 서울대 사회과학대 성폭력 사건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겠습니다.

 

이 글은 동시에 관악 여성주의 모임 달에 대한 답변이기도 합니다.

 

1. 피해자 중심주의가 도입된 맥락과 무죄추정의 원칙

 

(1) 사건 해결과 당사자의 진술

 

과거 일어난 사건을 둘러싸고 당사자들의 진술이 엇갈릴 때 제3자는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을 할까요? 바로 당사자 진술의 신빙성입니다. 진술이 얼마나 일관적이고 구체적인가, '상식'과 '논리'에 부합하는가를 두고 누구 진술을 더 신뢰할지 결정하게 됩니다. 그게 우리들이 일상에서 겪는 다툼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법정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주장과 증명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어느 정도로 증명을 해야 하는지를 두고 많은 이론과 판례가 있으며, 각종 절차법이 우리 일상보다 정교하고 세밀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진술과 진술이 엇갈릴 때 누구 말이 더 신빙성 있는지 판단해야만 하는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2) 성폭력 피해자 진술과 피해자 중심주의

 

성폭력 사건은 당사자 진술 이외 다른 증거가 없고, 당사자 진술이 자주 갈리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오늘날까지도 피해자 진술은 부당하게 공격받고, 편견과 잘못된 사회 통념을 바탕으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은 깎입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와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성관계 동의를 간주하려거나, 피해자가 여러 사람과 성관계를 가져왔다는 점을 들어 피해자 신뢰성을 낮추려는 시도가 그렇습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이런 공격들을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통념에 기반한 부당한 시도로 규정합니다. 이런 공격들이 피해자의 경험과 느낌, 아울러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성폭력 피해자를 부당한 의심과 불필요한 질문으로부터 보호하는 장치입니다.

그런데 한 두 개의 질문이나 공격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이미 수사기관들부터 남성중심적인 시선에 갇혀 있고, 피해자에게 전혀 협조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피해자는 위축되고 자기가 겪은 일을 제대로 진술하기 힘들어집니다. 여기서부터 피해자 대리인 제도와 신뢰관계인 동석, 피해자 진술 녹화제도가 도출됩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남성중심적인 사회구조 자체의 변화 없이는 피해자의 경험과 느낌이 제대로 진술될 수 없고, 진술되더라도 사건 해결에 제대로 반영될 수 없다는 최종적인 고민을 안고 있습니다. 그 고민을 정리한 표현이 바로 "피해자 진술을 1차적으로 신뢰한다"입니다. 남성중심적인 사회 안에서 피해자의 경험, 진술은 부당한 의심과 공격에 끝없이 노출되므로 그에 대항하는 원칙으로, 피해자 진술에 대한 신뢰를 강조한 것입니다.

 

(3) 무죄추정의 원칙에 대한 설명

 

형사절차에서 검사는 권력독점체인 국가의 대리인으로서 체포, 구속, 압수, 수색, 검증을 통해 피고인에 비해 압도적인 증거수집능력을 지닙니다. 아무리 피고인이 변호사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피고인과 검사가 동등하게 대결하는 한 힘의 균형은 절대적으로 검사에게 쏠립니다.

 

힘의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한 장치 중 하나가 무죄추정의 원칙입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범죄사실을 주장하고 치밀하게 증명할 책임을 모두 검사에게 돌리는 원리입니다. 만약 검사가 합리적 의심을 지울 정도로 범죄사실을 증명하는 데 실패한다면, 피고인에 대한 혐의가 남아 있더라도 무죄를 선고해야 합니다.

 

아무리 무죄추정의 원칙을 엄중하게 적용하더라도 여전히 양 당사자 진술의 신빙성은 요구됩니다. 즉 법관은 여전히 누구 진술이 더 합리적이고, 일관적이며 구체적인지를 기준으로 죄를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다만 피고인 진술의 신빙성이 낮더라도 함부로 유죄를 선고하지 못하게 만들고, 검사 측 증인들의 증언을 상당한 수준으로 신뢰할 수 있는 때에야 유죄를 선고하기 만듭니다.

 

형사절차가 아닌 경우에도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는가요?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 이래로 무죄추정의 원칙은 형사절차에만 적용되어 왔습니다. 애초에 권력독점체인 국가를 견제하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에 그런 권력독점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민사절차를 비롯한 다른 법 영역에서는 무죄 추정의 원칙을 적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걷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일반적인 증명책임입니다. 주장하는 자가 증명할 책임이 있습니다. 증명이란 결국, 글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 누구 진술이 더 신빙성 있는가 문제로 복귀하게 되며, 피고인을 더 유리하게 취급한다든가 할 필요는 사라집니다.

 

(4) 무죄추정의 원칙과 피해자 중심주의

 

만약 "피해자 진술을 1차적으로 신뢰한다"를 형사절차에도 도입한다면 무죄추정의 원칙과 충돌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현재 형사절차에서 성폭력 피해자 진술을 1차적으로 신뢰해야 한다고 규정한 입법례는 전세계적으로 거의 전무합니다. 여성주의자들조차 형사절차에까지 피해자 진술에 대한 1차적 신뢰를 도입하라고 주장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여성주의자들이 주목하는 부분은 앞서 소개한 대로 수사과정과 법정에서 피해자에 대한 부당한 공격을 막는 것입니다. 피해자의 옷차림이나 직업을 이유로 피해자에게 불리한 편견을 형성하려는 시도를 규제하려고 합니다. 미국 등 몇 개 국가는 이런 규제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니지만 피해자 신뢰관계인 동석 등은 특별법으로 받아들인 상태입니다.

 

그런데 반성폭력 자치규약은 형사절차가 아닙니다. 학생사회에 국한해서 보자면, 학생회가 강제수사권을 갖는 권력독점체도 아닙니다. 반성폭력 자치규약을 형사절차와 동일시하는 오류가 발생하는 까닭은 "성폭력 = 범죄 = 형사처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폭력은 범죄일 뿐만 아니라 민사상 불법행위이며 각종 단체의 내규에 따른 징계 사유입니다. 민사상 불법행위로서 성폭력을 판단할 때 무죄추정의 원칙은 적용되지 않으며, 징계 사유에 대한 검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때 남는 것은 일반적인 증명책임이며, 피해자의 진술이 더 신빙성이 있는가, 가해자의 진술이 더 신빙성이 있는가 문제로 귀결될 뿐입니다.

 

형사법 분야에서 국가가 권력을 독점하기 때문에 피고인을 유리하게 다루듯, 다른 법 분야에서도 권력의 편향이 나타날 경우 증명책임을 수정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의료분야나 기업을 상대로 하는 환경소송이나 제조물책임소송 등은 한 쪽에 권력이 편향되었기 때문에 도리어 기업이나 의사를 상대로 소송하는 측의 증명책임을 완화시켜주는 법리들이 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 진술을 1차적으로 신뢰해야 한다는 원칙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합니다. 남성중심주의가 사회를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남성인 가해자 측에 권력이 편향되기 쉽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정으로서 피해자 진술을 1차적으로 신뢰한다는 차원입니다. 형사절차라면 무리가 있겠지만 자치규약에서 이런 원리를 도입할 수 없다고 단정지을 수 없을뿐더러, 피해자 중심주의에 의한 증명책임의 보완 내지 수정은 오히려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권력관계를 시정한다는 점에서 필요합니다.

 

(5) 피해자 중심주의와 자의적 판단 문제

 

오늘날 피해자 진술을 1차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은 피해의 호소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기존 남성중심적인 시선에서 탈피해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개정된 사화과학대 반성폭력 회칙은 “이[피해자 중심주의]에 기반한 정책은 피해를 호소하기만 하면 누구에게든 자의적 사유로 누군가를 성폭력 가해자로 낙인찍고 재단할 권력을 쥐어주는 명백히 폭력적이고 비민주적인 결과를 낳는다.”라며 피해자 중심주의를 거부합니다.

 

하지만 성폭력상담소 등이 피해자 중심주의를 근거로 피해자의 주장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고, 피해자가 피해를 주장한다고 그것을 곧이곧대로 수용하진 않습니다. 설령 피해자의 호소가 있더라도, 그리고 피해자 중심주의가 도입되었더라도 피해자와는 다른 결정을 내리는 경우는 분명 있어왔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피해자 중심주의가 유발할 수 있는 자의성이 존재하는 것은 맞습니다만, 실제 적용에서 우려했던 것만큼 자의적으로 적용되진 않았다는 것입니다.

 

개정된 반성폭력 회칙은 서울대 사회과학대 성폭력 사건을 염두에 두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 혹은 몇 가지 사건을 근거로 피해자 중심주의가 자의적인 판단을 불러일으킨다고 단정하는 것은 피해자 중심주의가 도입된 맥락을 너무 단순화시킵니다. 개정 전 사회과학대 반성폭력 회칙이 피해자 중심주의를 다소 애매하게 규정했고, 서울대 사회과학대 성폭력 사건 처리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에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피해자 중심주의 자체의 문제이며, 피해자 중심주의를 폐기할 수밖에 없는 근거가 된다는 점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2. 성폭력 희화화와 대중운동 

 

(1) 성폭력에 대한 희화화

 

반성폭력 운동은 전진된 성폭력 개념을 제시해왔지만 항상 좋은 반응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때로 희화화와 조롱이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원인이 성폭력 개념을 포괄적으로 잡았기 때문은 아닙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3회 이상 상대방에게 교제나 만남을 요구하는 방식의 스토킹을 처벌하는 경범죄처벌법 개정을 둘러싼 희화화입니다. 이런 유형의 스토킹은 경찰청조차 성범죄로 분류할 정도로 ‘좁은’ 의미의 성폭력에 해당하는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경범죄처벌법 개정에 대해서 “이젠 무서워 고백도 못하겠다”, “여성분들 앞으론 두 번만 튕기는 걸로 합시다” 등의 조롱도 상당했습니다.

 

두 번째는 부부강간입니다. 흉기를 들어 폭행을 하는 부부강간이 처벌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사회적으로 별다른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폭행이나 협박을 동반하지 않은 동의 없는 부부간 성관계도 성폭력으로 규정하는 반성폭력 운동의 주장에 대해서는 숱한 희화화가 일어납니다.

 

세 번째는 성노동자의 성폭력 피해입니다. 성노동자도 당연히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노동자가 자기 성폭력 피해사실을 고발한 대자보에 대해 쏟아진 야유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스토킹과 같은 ‘전형적’인 성폭력조차 조롱의 대상이 됩니다. 만약 포괄적인 성폭력 개념이 희화화의 원인이었다면 스토킹에 대한 희화화가 없었어야 함에도 운동권 내에서조차 조소가 이어졌습니다.

 

(2) 희화화와 운동에 대한 진단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은 포괄적인 성폭력 정의가 성폭력의 무게감을 없애 희화화를 촉발했다고 말하지만, 문제가 있는 분석입니다.

 

우선 포괄적인 성폭력 정의가 성폭력을 흉악하고 잔혹한 범죄로만 취급하는 통념적인 시각을 없애려 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반성폭력 운동은 포괄적 성폭력 정의를 통해 성폭력이 뿌리깊은 사회구조적 문제이며, 우리가 진지하게 접근해야 할 대상으로 정의하려 했습니다. 무게감을 아예 없애는 게 아니라 그 내용과 방향을 바꾸려는 시도입니다. 

 

무게감을 없앤 건 반성폭력 운동이 아니라 성폭력에 대한 반성폭력 운동 진영의 주장을 희화화한 당사자들입니다. 당연합니다. 희화화 자체가 상대방 주장을 조롱하면서 그 무게감이나 진지함을 없애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무게감을 없애기 위한 희화화는 끝없이 이루어집니다. 전현직 대통령의 이름을 비꼬거나, 좌파들이 조금만 반자본주의적인 이야기를 하면 북한이나 가라며 윽박지르는 반응들이 그렇습니다. 희화화하는 측은 상대방이 어떠한 빌미를 제공하기만 하면, 때론 빌미를 제공하지 않아도, 희화화를 합니다. 그걸 가지고 대중운동의 성패 여부를 판단하기에는 너무 성급합니다.

 

(3) 젠더 기반 폭력과 대중운동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은 반성폭력 운동이 그 동안 고수해온 젠더 기반 폭력을 바탕으로 한 성폭력 개념은 실패했으며, 서울대 사회과학대 성폭력 사건이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고 주장합니다. 이제 젠더 기반 폭력으로서 성폭력이 아니라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서 성폭력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주장을 보면 마치 반성폭력 운동 전반이 여태까지 젠더 기반 폭력으로서 성폭력을 주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199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성폭력 법제화 운동이 시작되면서 반성폭력 운동 진영은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서 성폭력 개념을 관철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게 됩니다(신상숙, 젠더, 섹슈얼리티, 폭력, 2008, p. 30). 이후 성폭력을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 규정하고, 그런 사회적 인식을 확산시키려는 노력이 20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여전히 성폭력을 젠더 기반 폭력이라고 정의해오는 경우가 오히려 소수였던 셈입니다. 

 

학생사회나 운동사회 중에서도 이미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서 성폭력을 받아들인 곳이 존재합니다. 사회 전반에 비추어 보면 성폭력은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라는 인식이 더더욱 압도적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언론기사는 물론이고 보수적이라고 평가하는 법원조차 판례에서 이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일반 대중이 젠더 기반 폭력으로서 성폭력에 거부감을 느끼고, 성폭력을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젠더 기반 폭력으로서 성폭력이 모순을 내포하기 때문이 아니라, 애당초 반성폭력 운동 진영과 여타 미디어, 법률 교과서, 판례, 공공기관 주도 성교육이 성폭력을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라고 규정하고, 가르치고, 홍보해왔기 때문입니다. 

 

학내 반성폭력 운동이 젠더 기반 폭력으로서 성폭력을 주장해왔으나 실패했다는 진단 역시 놀라울 것이 없습니다. 그 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심지어 반성폭력 운동 진영마저도 성폭력을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와 동일시하는 마당에 학내에서 젠더 기반 폭력으로서 성폭력을 주장한다고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요? 아무리 학내 반성폭력 운동의 초점을 젠더 기반 폭력에 맞추더라도, 사회 전반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이상 학내 반성폭력 운동이 곧바로 효과를 나타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4)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서 성폭력이 남긴 과제

 

20년 넘게 성폭력이 성적 지기결정권 침해라고 주장해서 얻은 것과 아직 얻지 못한 것이 각각 있습니다. 우선 정조를 침해한 죄로서 성폭력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피해자에 대한 비난도 일정 부분 줄어들었습니다. 

 

부부강간에 대한 유죄 판결을 받아냈으며 친고죄 역시 폐지되었습니다. 대중들의 인식 역시 적게나마 바뀌었습니다. 

 

반면 구조적 성격으로서 성폭력은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성폭력을 개인의 문제로 보는 시각은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줄어들진 않았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성폭력 범죄 형량이 늘어났으며, 언론 보도는 갈수록 선정적으로 흘러갑니다.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서 성폭력이라는 관념이 남성 편향적 섹슈얼리티를 바꾸지 못했다는 것이 이 지점을 반증합니다. 여전히 사회는 성폭력을 야기하는 구조를 바꾸는 데 주저하고, 성폭력이 일부 사이코패스에 의한 범죄라는 인식은 오히려 증가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학내 성폭력 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반성폭력 운동이 다시금 젠더 기반 폭력으로서 성폭력을 강조하고 쟁점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개인 대 개인 문제로 치환되는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를 젠더 기반 폭력이라는 사회적 이슈로 옮겨오는 작업입니다. 

 

이에 비해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은 학내 반성폭력 진영이 도리어 젠더 기반 폭력으로서 성폭력을 포기하고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서 성폭력을 도입해야 비로소 대중이 성폭력을 구조적 문제로 바라볼 수 있는 매개가 생긴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지난 20년 간 반성폭력 운동이 한계를 드러낸 지점을 반복하자는 것입니다. 반복이라고 하기도 애매합니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성폭력 정의인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에 학내 반성폭력 운동의 정의를 끼워 맞추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변화’가 대중이 성폭력을 구조적 폭력으로 이해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5) 성폭력 사건 공론화 문제

 

대중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은 성폭력의 민주적 해결을 강조합니다. 그 방법 중 하나로 무엇을 성폭력이라고 볼 것인지 구성원 사이에 합의하고 결정하면 된다고 합니다. 성폭력 사건은 공론장 안에서 평가되고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정 반성폭력 회칙 역시 사건이 성폭력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을 포함한 평가 절차를 공개적으로 하도록 강제합니다(제10조 제1항 제5호, 제2항). 피해자가 이런 공개 과정을 원하지 않는다면 아예 처음부터 신고를 하지 말거나, 신고를 반려하도록 요청해야 합니다(제9조 제3항 제1호).

 

물론 진상조사 결과에 대한 공개 범위를 조절할 수 있다고 하지만, 사건이 성폭력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애매한 경우, 공론화를 통해 성폭력 여부를 결정하는 이상 구체적 사실관계 공개가 불가피하게 됩니다. 구체적 사실관계도 모르는 상태에서 성폭력 여부를 결정하고 사건을 평가하라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다소간의 사실관계를 포함한 진상조사 결과 공개가 필수적이고, 그 공개된 진상조사를 가지고 어느 구성원이든 참석해서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평가회가 열리는 이상 피해자의 생존권은 매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자기 사건이 일반에게 공개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고, 공동체 내에서 어디서든 자기 사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피해자에게는 고통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정 회칙은 심지어 평가의 권한을 전문가에게 위임하는 것을 경계합니다(제10조 제2항 제1호 해설). 그러나 반성폭력 운동은 대중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맥락의 복잡함이나 피해자 심리에 대한 적절한 대처를 위해 전문성 역시 동시에 추구합니다. 성폭력 상담원 교육과정이 존재하는 까닭도 바로 이 전문성 확보를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전문가에 의한 판단을 경계하고 공론장에서의 토론을 통해 사건을 평가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개정 회칙이나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은, 성폭력 사건에는 구체적 피해자가 존재하며, 그 피해자는 대중에 대한 공개가 아니라 훈련을 받은 전문가에 의한 판단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등한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3. 서울대 사회과학대 성폭력 사건에 대한 재평가

 

(1) 미비했던 제도적 장치

 

기존 회칙이나 대책위원회 운영에 문제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우선 기존 회칙은 피해자의 진술이나 발언에 대한 2차적 판단의 여지를 주지 않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피해자 중심주의란 곧 피해자의 말에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대단히 문제가 많습니다.

 

다음으로 가해자 대리인 제도가 도입되어 있지 않아 각 당사자가 대책위원회 테이블에서 직접 대면해야 하는 상황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는 피해자만이 아니라 가해자에게도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불러 일으키고, 사건 해결에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학교 상담소를 비롯한 전문 상담소와의 연계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어렵거나 애매한 사건의 경우 도리어 외부 단체와 공동 테이블을 모색하거나 적어도 조언이라도 구해서 보다 수월한 해결을 도모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런 미비점들은 각 당사자들의 감정적 충돌이나 갈등을 부추기거나 완충 지대를 마련해주지 못하며, 피해자에 대한 ‘설득’을 어렵게 합니다.

 

(2) 성폭력이었는지 여부?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은 이런 미비점과, 그런 미비점으로 인한 결과들이 모두 피해자 중심주의와 젠더 기반 폭력으로서 성폭력 개념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서울대 사회과학대 성폭력 사건은 절대 성폭력이 아니었다, 나아가 “잘못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가해자로 지목”된 사건으로 확정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젠더 기반 폭력에서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 성폭력 개념을 바꿔오면 당연히 그 사건이 성폭력이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된다는 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성적 자기결정권이 자기 성적 행위를 스스로 선택하고 구성할 권리이듯, 어디까지를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볼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그 침해로 규정할 것인지는 정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은 ‘성별 발언권이 충분히 보장된 상태에서 이별을 맞이하는 것’이 자기 성적 행위를 스스로 구성하는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는지요? ‘성’을 섹슈얼리티로 해석하는 것 같은데, 자기 섹슈얼한 행위의 구성이 어디까지인지, 섹슈얼리티의 한계가 어디인지를 그렇게 단정적으로 정할 수 있는가요? 연애 관계 끝에서 이별하는 것이, 성별 발언권의 보장을 요구하는 것이 섹슈얼리티와 상관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요?

 

이런 문제에 대해 개정 회칙은, 그리고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은 공론장에서 평가하면 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설령 공론장에서의 토론에 맡기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지라도, 섹슈얼한 행위의 구성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발제하고 토론해도 그런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확답이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3) 사건에 대한 재평가

 

오히려 서울대 사회과학대 성폭력 사건에서는 그 사건을 성폭력으로 규정하는지 여부가 핵심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사건의 맹점은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고 반드시 대책위원회가 구성되어야 하고, 그 테이블 안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각 성폭력 사건은 그 사건만의 해결방법이 있을 수 있고, 어떻게 하면 피해자가 제대로 치유될 수 있고 고통이 최소화될 수 있는지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피해자 중심주의입니다. 그래서 피해자 중심주의란 상황에 따라서는 피해자에 대한 설득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피해자에 대한 설득을 시도한 류한수진 씨의 행동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다만 과연 그런 설득이 성폭력인지 여부를 둘러싸고 일어났어야 했는지, 그리고 그런 사항들을 SNS에 독자적으로 공개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대책위원회 구성이 과연 최선의 방법인지, 다른 방식의 치유는 어려운지 더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고 보지만, 이를 단지 류한수진 씨만의 책임으로 돌리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별개로 피해자의 의견에 반하는 행동을 취한 것이 곧바로 피해자 중심주의에 어긋난다는 식의 판단을 허용한 기존 회칙의 미비점은 마땅히 비판되어야 하고, 여타 전문 상담가가 대책위원회 테이블에 참여하는 길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점은 개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지점들이 개선되어야 하는 것이지, 피해자 중심주의 자체의 폐기와 성폭력 개념의 축소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4) 피해자 중심주의 자체의 폐기가 필요한가?

 

직접 참여하지 않은 제가 3자적 위치에서 이 사건을 다 정리하고 평가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 과연 가능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 위치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한 사건을 둘러싼 미비점이나 문제점 때문에 피해자 중심주의를 폐기하고 성폭력 개념을 축소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논리적 비약과 성급한 결정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리하자면, 기존 회칙에 문제점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그런 문제점은 피해자 중심주의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문제점들을 고쳐나가면 될 뿐, 피해자 중심주의 자체를 폐기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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