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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5/15
    '스승의 날'에 부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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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8/05/14
    2.0세대와 386세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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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8/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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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에 부쳐

 

 

언젠가 부터 5월은 '따뜻한' 달이 됐다. 기온만 따뜻한 것이 아니라 마음도 '따뜻'해졌다.

 

굳이 누군가가 정한 날이기 때문에 따라야 한다는 것에서 비롯되는 저항감은 차치하자.

 

그게 ‘국가’면 어떻고 ‘근대’면 어떤가 감사한 마음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스승의 날'을 맞이한 오늘의 나의 기분은 찹작하다.

 

'스스로 존재한 날' 때의 기분과는 다른 그런 것?

 

나에게 '스승'이 있는가라는 정말 피곤한 물음을 던져야 하는 것?

 

이런 기분을 달래기 위해 국어사전에서 '스승'을 찾아보았다.

 

 

 

"스승 - 자기를 가르쳐서 인도하는 사람" 네이버 국어사전

 

오! 이런 세상에, 뭐 어느 정도 이런 느낌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막상 활자를 마주하니 이 놀랍도록 '경건'한 뜻 앞에 움찔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나에게 '스승'은 존재 하지 않는다.

 

내친김에 '선생'도 검색해 보았다.

 

선생 [先生] [명사]

1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

2 학예가 뛰어난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

3 성(姓)이나 직함 따위에 붙여 남을 높여 이르는 말.

4 어떤 일에 경험이 많거나 잘 아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5 자기보다 나이가 적은 남자 어른을 높여 이르는 말.

6 <역사>조선 시대에, 성균관에 둔 교무 직원.

7 <역사>각 관아의 전임 관원을 이르던 말.

- 네이버 국어사전

 

그렇다 나에게 선생님은 참 많이 계신다.

 

 

'선생'과 '스승'의 차이는 무엇일까? 의미만을 놓고 보자면 인도하는 자와 인도하지 않는 자 이다.

 

그렇다면 ‘스승의 날’은 ‘가르치며 인도하는 자’의 날일 텐데…….

 

애석하게도 지금 나의 주변에 ‘가르치는 자’는 있을지언정 ‘가르치며 인도하는 자’는 없다.

 

스승이 ‘계몽주의’의 산물이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나의 태도가 오만함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이런 ‘스승’에 대한 욕망에 시달리고 있는 내 자신에게 솔직하고 싶을 뿐이다.

 

대학원에 와서 느끼는 것이지만 이상하게 ‘정교수’로 부임하여 꼬박꼬박 월급을 타고 계시는 ‘분’들 보다 매주 학교에 찾아와서 ‘시간강사’ 노릇을 하고 계시는 분들이 더 열성적이고 진지한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물론 모든 ‘정교수’가 그러하고 모든 ‘시간강사’가 그러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곳에 와서 유난히 이런 비합리적인 ‘사념’에 시달리곤 한다.

 

삐딱선을 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오늘 갑자기 고등학교 시절 ‘스승의 날’ 아침 조회 시간에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합동 절을 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나는 그렇게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는 ‘절’(하물며 설날 때는 ‘돈’이라도 받을 심산으로)이 형태와 의식만 바뀐 채 그대로 반복되는 현실이 씁쓸하다.

 

바란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스승’을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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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대와 386세대

 

 

‘어느새 어영부영 살아오게 돼버린 나의 머릿속에는 잡다한 개념들과 황망한 이상들로 가득 차 있다.’

 

 

지금 소위 20대를 마무리하는 29살이 된 나에게 지난 20대를 돌이켜보는 일은 마치 소독차 연기 속에서 뭣도 모르고 좋아하다, 멀어져 가는 차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허망하다.

 

 

누군가는 취직하고 누군가는 결혼하고 누군가는 백수로 지내고 있는 나의 친구들의 삶이 어떻든 간에 그(녀)들은 아직 살아있다.

 

아니 그렇지 않고 20대가 언론들의 글 노리개 감으로나마 산화되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것은 전적으로 미디어의 책임이지 20대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탓이 아니다.

 

 

한국사회는 유독 세대담론이 많다. 멀게는 X세대에서부터 지금의 2.0세대 그리고 그 ‘잘난’ 386세대 등등 까지…….

 

 

누구하나 규정을 바라지도 않고 규정의 필요성이 제기 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있어 보이는 글을 쓰고 싶어 안달 난 혹은 마치 세대 담론이 그럴싸한 사회과학적 용어라도 되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조합논리를 내세우며 세대론을 제시하는 ‘과학자’들과 비평가들을 마주하게 될 때 본의 아니게 나는 어느 세대에 속하는 지 자문하게 된다.

 

 

88만원 세대 그 것이 나를 규정하는 ‘사회과학’적 ‘용어’다. 아니 ‘88만원을 벌지도 못하면서 매달 88만원에 가까운 돈을 써야하는 세대’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늘 놀라운 기사를 접해야 했다. 한겨레 2008년 5월 14일자 8,9면에 걸친 기사

 

‘2.0 세대’ 386부모 ‘뜨거운 피’ 물려받았다

 

자유분방하게 크며 사회비판 의식 배워 송경화 기자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10대들의 ‘배후’는 누굴까? 전문가들은 이들 10대의 부모인 이른바 ‘386 세대’를 지목한다. 1980년대 민주화 시대를 거친 부모의 사회비판적 ‘유전자’가 자녀들한테 자연스럽게 전이됐다는 것이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사회학)는 “386 세대의 부모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보수화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자녀들에게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아라’고 가르치진 않는다”며 “386부모 아래서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사회비판의식을 의식·무의식적으로 학습했던 10대들이 지금 촛불을 들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지난 10일 중3 딸과 함께 서울 청계광장 촛불집회에 참가한 김상철(42)씨는 “현장이야 말로 살아있는 교육이라고 생각해 참가했다”며 “현장에서 현실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아이와 함께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지난 2004년에도 가족과 함께 탄핵반대 촛불집회에 참가했다. 촛불집회에 참가한 김지인(18·진명여고3)양은 “집안 분위기가 엄숙하지 않아 어떤 문제든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다“며 “아버지에게 ‘청계광장에서 자유발언을 했다’ 말했더니 무슨 말을 했는지 아버지가 먼저 관심을 가져줬다”고 말했다.

 

하지만 20대에게 10대들의 이런 ‘당돌함’은 낯설다. 취업준비생 안경원(26)씨는 “우리 때는 (부모들한테) 의견을 말해면 ‘버릇없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렇게 몇 번의 좌절을 겪으면 스스로 체념하게 된다”고 말했다. 김은수(27)씨도 “집에서 부모님과 깊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한 일이었고 지금도 어색하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386 세대인 40대의 진보적 성향이 보수성향의 20대를 뛰어넘어 그들의 자녀인 10대에게 영향을 끼치는 ‘격세유전’이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실제 지난해 17대 대선의 투표 성향을 보면, 20대는 당시 이명박 후보에 42.5%, 이회창 후보에게 15.7%의 표를 던졌다. 이명박 후보 지지율에선 30대(40.4%)를 앞섰고, 이회창 후보 지지율에서는 어떤 연령대보다 가장 높게 나타났다. 김 교수는 “이른바 ‘88만원 세대’로 불리는 20대와 달리 지금의 10대들은 경제적 결핍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측면도 있다”고 지적했다.

 

 

(노파심에 적기는 하지만) 현재 정부의 무능한 협상을 반대하는 집회의 의미를 훼손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도 심지어 이들의 ‘배후’가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설사 있다고 한들 그 것이 이 집회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 기사에서 인용되는 소위 전문가들의 논리가 무척 터무니없음에 놀랄 따름이다.

나는 솔직히 10대들의 ‘배후’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런 배후를 알아야 하는 사회적인 요구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만약 그 ‘배후’가 있다면 그 것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비합리적이고 비인권적인 교육과 저 무능한 정치집단의 실체가 본격적으로 드러남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지 ‘격세유전’을 거치면서 형성되는 ‘진화론’적인 ‘배후’가 아니다.

 

 

기사 제목만 보고 차마 민망해서 제대로 글을 읽기도 힘들었지만 그 내용을 보면 볼수록 실로 ‘진보’ 일간지 기자가 쓴 기사가 맞는지 의구심이 든다.

 

 

386세대의 개념적 정의가 무엇인가?

 

 

'386' 세 숫자에는 각각의 뜻이 들어 있어, '3'은 1990년대 당시 30대를, '8'은 1980년대에 대학에 다닌 1980년대 학번을, '6'은 1960년대에 태어난 사람을 뜻한다. 즉,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고, 1990년대에 30대였던 세대가 바로 386세대이다.

 

두산백과사전

 

 

당당히 백과사전에도 기재된 386세대의 개념적 정의는 익히 알다시피 이렇다.

일부 ‘학출’ 정치인들과 1987년 6월 항쟁을 이끌었던 세대들을 일컫는 데 주로 ‘쓰이’는 말이다.

 

단순히 말해서 대단히 협소한 정의이다.

 

 

정말 멍청하게 물어보자면 소위 386세대 부모님을 두지 않은 10대의 학생들 혹은 학생이 아닌 청소녀(년)들이 이글을 봤을 때 어떤 생각을 할 것인지 염두 해 두지 않았는가?

 

 

만약 이 기사의 의도가 부모님의 ‘뜨거운 피’를 물려받았다고 자랑스러워하는 ‘학생’들을 북돋아 주는 거라면, 그래서 지난 노무현 정권 때 욕이란 욕은 다 얻어먹었던 386세대들의 그 ‘뜨거운 피’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라면, 그래서 ‘보수’ 성향의 20대들의 잠자고 있는 ‘진보성’을 일깨우는 것이라면, (이 기사는) 유감스럽게도 지난 수년간 ‘운동권’이 탈피하지 못했던 ‘자위행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리라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우후죽순처럼 번져나가던 진보진영의 반성논의는 이제 사라지고 10대들의 자발적인 집회참여가 다 386부모를 뒀기 때문이라는 ‘멘델의 유전법칙’같은 논리가 등장 하는 것을 보면 그 간 진보진영이 엄청난 ‘피해의식’을 겪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20대의 보수화 경향에 대해서 어떤 대안적 분석이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분명 20대들 중에서도 386세대 부모를 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더 많을 것이다.

 

 

그네들에게 88만원 세대라는 저주스런 딱지를 안겨주고서는 ‘격세유전’에 따라 2.0세대와 386세대 간의 화합의 장을 마련해주는 것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기만적인 행태 속에서 ‘진보’ 일간지가 해야 할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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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

계획을 잡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할 수 있는 일이든 할 수 없는 일이든 일단 적고 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무엇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무엇이 할 수 없는 일인지 시작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계획을 잡을 때는 오로지 자신의 이성에 의지 하게 된다.

 

 

계획을 잡는 다는 것은 위선적인 자위 행위이다. 마치 자위를 혐오하면서 자위행위에 물드는 것처럼, 해야 되고 할 수 있다는 충동적인 이성의 재현이다. 하지만 그 어떤 계획도 실천되고 실현되지 않는다.

 

 

그 것이 실천되고 있고 실현되고 있다고 느낄 때 계획의 위선적인 ‘스티그마’는 빛을 발한다. 그 어떤 것도 실천되고 있지 않으며 실현되고 있지 않음을 ‘위선의 스티그마’는 알고 있다.

 

 

어쨌든 사람들은 계획을 잡는다. 단순히 시간표를 짜는 행위에서부터 ‘고귀’한 예술작품을 만들려고 하는 것에 이르기 까지 우리들은 계획을 잡고 그 계획에 따라 현실에서 자신의 행동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 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들은 계획을 잡는다.

 

 

‘계획을 잡는 것’은 가장 극명한 형태의 사회화, 그것의 첫 발걸음이다. 시간의 순서를 믿고 대화의 가치를 존중하며, 3차원의 공간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모든 문명들의 기능의 사용을 전제로 하며, 어떠한 우연성도 배제하고 ‘정상적’인 흐름을 따라간다.

 

 

계획은 근대적인 사고방식의 총체이며 발현이고 재현이다.

 

 

계획은 그 것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그리고 계속 만들어 나가면 나갈수록 자신(그들)의 삶은 억압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이제 계획을 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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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실명제와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다시 총선이 눈앞에 다가오면서 새삼 떠오르는 이슈가 있다. 바로 인터넷 실명제이다. 2005년 한나라당 원희룡, 이재오 의원 등이 공직 선거법을 개정하면서 도입되어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부터 적용되고 있다.

 이 법은 이번 4.9 총선에서도 바로 오늘부터 4월 8일까지 적용되어 이 기간 동안 인터넷 언론사에 댓글을 달거나 게시판에 글을 쓸 때 실명인증제시스템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

실명제와 관련된 논의는 심심찮게 제기되어왔었다. 익명성을 무기로 한 수많은 네티즌들이 한 개인(주로 연예인이나 정치인 그리고 범죄자)의 인격을 모독하는 댓글을 달고, 특정 담론에 대한 일 방향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등에 대한 대안으로 실명제가 등장한 것이다.

 

 

 궁금한 질문은 세 가지일 것 같다. 왜 공직선거법안에 인터넷 실명제가 포함되어 있는가? 그리고 왜 실명제를 선거 기간 외에는 실시하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과연 실명제를 도입하면 악성 댓글과 광적인 여론몰이는 없어지는가? 이다.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소위 대한민국의 기득권 세력들은 유난히 기이한 현상에 직면해야 했다.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온라인을 통해 집결되고 그 힘이 대통령을 만들어 내고 그 마저도 끌어내려 ‘정치적 결단’(탄핵)을 내렸지만 인터넷 여론 앞에 힘없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한나라당을 비롯한 기성 정치세력들은 인터넷이 가지고 있는 실질적 힘 앞에 너무나 무력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런데 그러면 인터넷을 통한 자율적인 정치세력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텐데 오히려 인터넷을 ‘얼마나’ 통제할 것인가로 머리를 굴렸다.

 요컨대 이는 ‘전근대적’ 보수 권력 집단의 선택이다. 이들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이해할 생각도 받아들일 생각도 없다. 그저 문서와 도장 그리고 판사봉으로 이루어진 교통형식만을 추구하고 그 것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통해 권력을 유지해야 하는 그네들에게 기존의 선거 판도를 완전히 뒤엎는 새로운 형태의 참여 형식은 일단 막고 봐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선거기간 외에는 (인터넷 언론사 외에는) 실명제를 실시하고 있지 않는가? 이것도 역시 간단하다. 국내 소위 대형 포털 사이트들이 이미 사실상 잠재적 실명제를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원가입을 하는 동시에 주민등록번호를 통한 실명확인 절차를 거쳐야 하는 시스템을 차용하고 있는 포털사이트들이 굳이 댓글을 달고 게시판에 글을 쓰면서 일일이 실명을 확인 하고 달아야 하는 실명제를 실시할 이유가 별로 없다.

 그렇게 되면 아마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저항감에) 댓글의 개수가 급격히 감소할 것이고 댓글을 보고 다시 댓글을 다는 재미로 들어오던 많은 회원들이 이탈 할 것이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지로 기업의 가치를 평가받는 포털 사이트들은 망할 것이다.

익명의 공간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혹은 남의 의견을 공격하는 댓글을 다는 행위자체가 이미 보편화된 상황에서 이런 실명제는 인터넷 미디어 자본과 정치권력간의 전략적인 선택이고 일종의 타협이다.

 

 그렇다면 실명제를 도입하면 악성 댓글이나 광적인 여론몰이는 사라지는가? 확인할 수 있는 통계자료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실명제가 이런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기 되었다는 점에 있다.

 

 

 빌렘플루서의 커뮤니케이션 구조론에 따르면 담론의 구조는 4가지로 나눌 수 있고 대화의 구조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담론의 구조와 대화의 구조는 서로 다양한 짝짓기로 결합하여 작동한다.

담론의 구조중 하나로서 ‘피라미드 구조’가 있는데 이 구조는 어감에서 느껴지듯 위계질서를 갖는 담론 구조로서 상명하복식의 의사결정 형태를 띤다. 이 구조는 군대, 교회, 파시즘, 공산주의 형태의 정치정당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며 한 정보에 집중되는 효율성은 있지만 대신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정보는 차단시켜 버린다. 이런 구조를 ‘선택’했던 체제들이 몰락했다는 것은 역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인터넷은 분명 이런 망해버린 커뮤니케이션 구조가 아니다. 인터넷은 말 그대로 망으로 이루어져 있는 공간이다. 정보를 제공하는 자와 정보를 제공받는 자의 관계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리고 상호간의 자율적인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어떤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상상해야하는가? 인터넷이 스스로 지닐 수밖에 없는 정보의 방대함과 자율적인 상호 접근성 이것은 빌렘 플루서가 말한 대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시스템이다. 물론 완벽한 시스템은 없다. 자율성에 잠재된 폭력성은 언제 어떻게 발현될지 모른다. 그것이 아마도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구조에는 그에 알맞은 대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인터넷 실명제는 ‘피라미드형 담론 구조’속 권위자의 새로운 등장이다. 인터넷을 잡담만을 가능케 하는 공간으로 바꾸려는 기획이고 불만을 저항으로 상상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작지만 큰 타격이다.

 

 

- 사실 그 대안이 무엇일지는 잘 모른다. 그리고 그 대안이 건강한 댓글 문화 캠페인이나, 자정운동 과 같은 것들이라고 ‘쉽게’ 얘기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철학의 부재, 혹은 윤리의식의 상실등과 같은 공허한 담론으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보다 구체적인 대안제시가 실명제와 같은 과거로의 기획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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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선과 오만

독선은 말그대로 자신의 행동과 판단만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 오만은 행동거지나 말투가 건방지게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이 두가지는 공통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데서 비롯하거나 타인의 능력을 업신여기는 데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흔히 이 두 단어를 조심히 쓰거나 남발하는데 이런 모순이 발생하는 이유는 생각해보건데 자신에게는 쓰지 않으려 하고 남에게만 쓰려고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남'은 십중팔구 잘 알지도 못하는 경우가 태반인데 그건 아마도 '남'을 잘 알면 알수록 그 '남'이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독선과 오만은 언제나 같이 공생한다. 아니 공존한다. 독선적인 행동에는 오만함이 뒤따르고 오만한 말투속에는 독선적인 행동이 자리하고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데 있다. '내가 독선적인지 오만한지 잘 모른다는데 있다.' 물론 알아야될 필요성이 당위적으로 제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행동을 하면서 그렇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 만큼 역겨운 일도 없기에 이 것이 왜 문제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야기 하고 싶다. 오만의 반대말이 뭘까 생각해보면 아마도 겸손이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마치 숟가락의 반대가 젓가락일까? 짜장의 반대가 짬뽕일까? 와 같이 오만의 반대가 겸손일까는 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겸손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남을 존중하는 태도를 일컫는 것인데 그럼 오만이 자신을 내세우고 남을 존중하지 않는 것인가? 솔직히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 오만은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럼 응원단장을 하고 싶어 손을 들었던 (자신의 끼를 주체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모두가 오만했던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오만은 남을 존중하지 않는 행위로 설명되기에는 보다 수위가 높다. 남을 존중하지 않는 다는 것이 남을 깔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길을 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서로 마주보면 인사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하철에 만나는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럼 우리들은, 나는 그들에게 오만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만은 남을 깔보는 것이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니가 뭔데 손을 들어?' 이런거다. 독선의 경우도 비슷하다. 이런 말장난을 왜 하는가? 바로 독선과 오만이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작용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독선과 오만은 타인과의 관계를 배재시키는 원리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이 존재 하지 않고서는 작용되지 않는 감정 상태 혹은 논리적 상태이다. 그래서 흔히 독선적이고 오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왕따를 당하거나 비 사회적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전혀 그렇지 않다. 독선적이고 오만한 사람들은 지극히 사회적이며 왕따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왕따를 조장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독선적이고 오만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처럼 하고 다닌다. (사실 이게 가장 역겨운 점이다.) 그리고 이게 아마 가장 놀라운 것일것 같은데 독선과 오만은 지식이 높은 그룹에서 나타난다. (지식이 많은 것이다. 결코 지혜로운 집단이 아니다.) 오만과 독선이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임에 동의 한다면 위 말이 아마 좀더 와닿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혹은 알 수 있는가? 사실 그것은 알수 없다. 왜냐하면 능력을 평가하는 것은 인간의 작업이므로 어느 누군가가 누군가를 평가하는 기준과 채점은 이미(드러나는 순간) 인간상태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어차피 알 수 없는 얘기를 왜 하는가 자신의 능력을 애시당초 판단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 사람들은 흔히 외부 평가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가늠하곤 하는데, 이것에 동의하는 순간(이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오만과 독선의 터널속으로 들어가는 원웨이 티켓을 끊는 것이다. 설사 그런 평가를 굳이 거부하지 않더라도(사람들이 주는 합격과 상 그리고 인정을 굳이 거부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능력이 판단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해서는 안된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독선과 오만은 타인을 배제시키는 원리이다. 타인의 생각을 배제하는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는 기본적으로 소외를 발생시킨다. 소외된 노동, 소외된 인간... 뭐 이런 대단한 개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자신과 세계 그리고 나와 타자를 분리시키는 일을 담당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이 존재하지 않으면 작용될 수 없는 원리이기에 계속적으로 타인을 생산해낸다. 독선과 오만이 그저 7살짜리 꼬마애가 징징되는 것정도의 감정상태 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나이 많은 어느 마초 혹은 꼰대가 지껄이는 헛소리정도의 비논리적 상태라고 치부해서도 안된다. 이 것은 자신의 능력이 판단되고 있다고 여기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머리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독선과 오만을 벗어나고자 하는 일이 겸손을 통해서 혹은 더 많은 노력(인정을 받고자 하는 모든)을 통해서 극복된다는 환상은 깨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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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통행로

「일방통행로」- 발터 벤야민

 

 

 

I 회고

 

 

  새삼 ‘문학’이라는 것을 안본지 오래 됐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 읽은 소설 제목이 무엇인지 이름도 가물가물하다. 고등학교 때는 시집도 사고 그랬었는데, 심지어 군대에 있을 때는 매일같이 잡시나 잡소설을 쓰면서 보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마치 나를 지키려는 듯 그런식으로 발악 했던 것 같다.

  “단 한줄이라도 글을 쓰지않고 보내는 날이 없도록 할 것”이 희미해져 버린지 오래라는 것을 알게 됐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를 억압하는 것들이 구체성을 잃어버려서 그런 거라고 술자리에서 떠들었던 기억이 난다.

계속 나를 관념으로 무장하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경험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련의 독립 다큐멘터리를 보고 감동 받은 척 했는지 모른다.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든 영상은 독립애니메이션에 관한 것이었다. 별로였다.

  추상에서 보편을 이끌려고 했다. 바라보는 척하고 알 수 있는 척 했다.

 

 

  요즘에는 아무 펜이나 집고서 메모를 한다. 펜에 집착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라고 20대 중반을 넘으면서, 그 것이 일종의 사소한 깨달음이라고 생각 했다.

편리하고 합리적이며 효율적이고 직관적인 사고를 하길 원했다. 아니 그런 줄 알고 있었다.

 

벤야민의 삶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불행한 삶. 그런 수사들 속에 침전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Ⅱ 감상

 

 

  수년전에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의 조그만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거리의 시인들’이라는 그룹이 있었다. 댄스음악계와 우리사회를 조롱하는 내용과 거친욕들의 가사로 대중들의 이목을 끌었던 이 그룹은 제 자신들이 조롱하던 대중음악계의 시스템에 휘말리며 어느 샌가 관심에서 멀어졌다.

이 책을 보고 나서 ‘거리의 시인들’이 왜 거리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거리의 시인들’을 떠올리니 나도 그랬던 것 같다. 대중음악과 대중문화 대한 부정과 무시 뭔가 저급하다고 치부했던 적이 있었다. 그럼 지금은 그러하지 않은가 자신하기는 어렵지만 그저 내가 좋아하는 장르가 다르다고 생각할 뿐이다.

 

  따뜻한 시선을 갖고 거리를 걸어본게 언제 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머리가 굵어질 수록 차가움만 더해지는 것 같다.

「일방통행로」의 전체적인 느낌은 따뜻함이다.

 

 

 

Ⅲ 바람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공간을 훑으며 지나가면서 다큐멘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막연하게 생각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됐다. 「일방통행로」를 읽으면서 그 막연함은 피상적인 관심이 낳을 수밖에 없는 당연함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나의 관심이 피상적이고 막연하다고 말하는 것이 뻔하다 수사일지도 모르지만 상상력의 부재와 경험의 빈곤을 반성하는 것은 이후에 나의 다큐멘터리 작업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리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거리의 지표와 소리를 엮어 나가는 글쓰기 같은 다큐멘터리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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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생크 탈출

희망은 좋은 거에요. 그리고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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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발터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서론 - 벤야민과 도시

 

 

I 사소하고 복잡한 도시바라보기

 

 

  서론에서 질로크는 벤야민이 도시를 어떻게 바라보고자 했는지를 개괄한다.

  다섯 개의 주제어 관상학, 현상학, 신화, 역사, 그리고 정치학은 벤야민의 도시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단어들임을 강조한다.

 

  이 단어들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성격이 있다면 바로 벤야민이 도시를 접근하는 태도 즉 아름답고 매혹적이지만 비참하고 슬픈 공간 으로서의 도시안의 놓치고 있는 것들을 바라봄 이라 할 수 있겠다.

벤야민의 일방통행로에서 느껴졌던 그의 도시 일상의 구체적 바라보기는 신화에 둘러싸인 도시를 구해낸다.

  사소한 것들과의 마주침은 놀랍도록 구체적이고 ‘기민한’ 글쓰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은 또한 벤야민이 지식인 혹은 비판 이론가들에게 강조하고자 했던 부분이다.

 

 

① 관상학 - 도시속에 있는 모든 것들 하나하나가 도시이고 그 집합 또한 도시이다. 도시를 분석할때는 세부적이고 포괄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도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가라고 물었을때 벤야민은 자세히 봐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도시를 구성하는 모든 개인들은 하루하루 흔적을 남기고 도시를 바라보는 것은 그런 모든 다양한 흔적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읽어져야 되는 ‘텍스트’들을 놓치지 않는 세심함이 필요하다.

 

 

② 현상학 - 인간들의 삶으로 이루어진 풍경 그것이 도시의 풍경이라고 한다면 도시를 그리고 만들어가는 것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벤야민은 거리의 변화와 그것들이 가져오는 대중의 심리적 변화들에 관심을 갖는다. 전통적 맑스주의자들에게는 생산양식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벤야민은 그 거리의 진열된 상품들의 변화와 가격에 열망하는 소비자들이 분석이 대상이 된다.

 

 

③ 신화 - 벤야민에게 신화는 먼저 거짓과 위선 그리고 억압이다. 근대도시는 부르주아 신화의 전형이다. 흙과 풀들을 걷어내고 그 위헤 보도블럭과 아스팔트를 깔고 동산을 깍아내리고 아파트를 지어내는 도시는 자연을 정복한 것만 같다. 도시는 그런 것들을 이미지로 약속한다. 앞으로도 계속 죽 이어질 것이라고, 신화화된 도시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벤야민에게 신화는 또한 긍정적인 요소와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신화적 경험들은 유토피아의 요소들을 담고 있다. ‘보방과 놀이 열중과 본능’

 

 

④ 역사 - 과거의 역사는 현재의 위선을 폭로한다. 역사를 통해 도시를 바라볼 때 그 지점을 놓치지 말아야한다. 한 도시 아주 옛날, 좀 전 그리고 가장 최근의 모습들의 상호 연관성을 파악하는 것은 현재의 도시를 파악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⑤ 정치학 - 도시는 다양한 계급을 품고 있다. 그리고 계급간의 갈등이 전면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드러나 있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벤야민은 도시내의 집합체들의 가능성에 대해 확신했지만 대도시 군중을 비관적으로 거부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Ⅱ 도시공간을 구체적으로 담아내는 매체로서의 카메라

 

 

  다큐멘터리는 확실히 현실을 기반으로 한다. 현실없이는 다큐멘터리는 시작조차 할 수 없다. 표현해 내는 방식이야 여러 가지 겠지만 그게 설사 애니메이션이라 할지라도 현실의 조각들을 이어붙이고 있다면 그 것은 다큐멘터리이다.

 

  지금의 6미리 카메라를 아마 벤야민이 보게 된다면 그는 아마 펜을 던지고 카메라를 잡았을지도 모른다. 일방통행로에서 보여지는 그의 글들은 그런 카메라를 쥔 다큐멘터리스트의 느낌이었다. 자신의 시선이 고정되는 곳의 변화와 일상을 카메라는 카메라를 쥔 주인의 의도대로 잘 움직여 준다. 벤야민은 아마 좋은 다큐멘터리스트가 됐을지 모른다.

 

  현실을 담아낸다고 다 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애국가가 울려퍼질 때 나오는 영상처럼, 그런 환상의 도시를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길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오락을 하고 있는 초등학생을 보며 왜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은 계속 열악해지는 것일까를 담아내는 카메라가 적어도 현실을 담아내려는 카메라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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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갈이

 

옛날에 개구리 왕눈이 라는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개구리 소년 밤바밤 개구리 소년 밤바밤 ~~

 

누구나 한번씩은 들어봤을 법한 주제가로 유명한 이 애니메이션은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이겨내는 한 꼬마 개구리의 좌충우돌 모험담을 그리고 있는데

 

저 유명한 주제가의 한구절은 아직도 내 가슴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아니 그냥 자리하고만 있는 줄 알았다.

 

그냥  그 구석에서 나올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을 줄 알았다.

 

그 구절은 바로 '일곱번 넘어져도 일~어서라~~ 울지말고 일어나 밤바밤 피리를 불어라 밤바밤~'

 

그렇다 이 가사가, 멜로디가 옛 성현의 심오한 가르침이 되어 현재의 나의 귓가에 휘몰아 칠 줄이야

 

그래 좌절금지 아니겠는가!

 

요즘 이 노래가 이렇게 절실히 마음속에서 울리는 이유는 뭘까?

 

이렇게 끄적거리면서 깨닫는 기분이지만

 

아마도 진짜 좌절이 뭔지 넘어진다는 것이 뭔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입버릇 처럼 좌절이 어쩌구 저쩌구 하더니 정말 일어서야 할때를 모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피리를 불어라 밤바밤

 

띠릴리 띠릴리리 띠릴릴리

 

띠릴리 띠릴리리 띠릴릴리

 

무~지개 연~못에 웃~음꽃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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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이제 새학기가 시작이다.

 

내 나이 29 아직 학생이다.

 

그리고 지금 멍청히 앉아있다.

 

이 '빌어먹을' 학교를 얼마나 빨아먹을 수 있을지는 '저엉말' 미지수지만

 

300만원이나 들이부었으니 뭐라도 하여튼 뭐라도 얻어내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 1년 남았다. 1년 동안 나는 뭐라도 할 것이다. 미친듯이 똥을 싸든 개같이 술을 마시든

 

뭐라도 할 것이다. 일단 똥은 너무 많이 쌌고 술은 이제 고만 마셔도 될 것 같다.

 

다른 것을 해야 한다.

 

안했던것

 

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것

 

할 수 있었지만 못했던 것

 

 

그리고 여기에다 글을 쓰기는 처음이다. 가입은 오래전에 했지만 왠지 진보넷에는 들어오고싶지가 않았다.

 

지금 적으면서 생각해보면 그냥 습관이 안들어서 인것 같은데

 

정말 바보같다. 여기 들어오지 않았던 게 바보 같다는 것이 아니라 습관이 안들었다는 이유를 대는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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