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자가 만드는 일터" 2009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산재피해자 권리를 위한 아시아 네트워크 회의 참가 후기(3)

 

 

노동조합과 피해자 조직화 - 각국의 경험, 고민, 꿈

 

하여간 네 가지 주제 가운데 각자 원하는 주제를 골라서 들어가면 된다길래 저는 노동조합의 역할에 대한 소집단에 들어갔어요. 아무래도 한노보연에서 주로 노동조합을 통한 활동들을 해온데다가,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로 시작된 반올림 활동을 하면서도 미조직사업장 피해 노동자를 조직하는 일에 기존 노동조합들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할 수 있는지가 점점 고민되는 중이었으니까요. 저 말고도 캄보디아, 홍콩, 미국, 한국 활동가들이 함께 했어요.

 

캄보디아
; 노조운동을 바로 세우고 산안법이 제대로 지켜지게 하고 싶다

 

캄보디아 참석자들은 다들 캄보디아노총(CLC) 활동가들이었어요. 총 6천명 정도의 조합원이 있는데 주로 의류, 여행, 공공서비스, 식품, 건설 부문의 노동자들이라고 하더군요. 노총에서 추진했던 피해자 조직화 경험은 대부분 의류업종에 몰려있고, 특히 바늘에 찔리는 사고성 재해 문제가 많았대요.

 

이들이 노동조합의 피해자 조직화 장애물로 꼽은 건 첫째, 정부의 규제나 역할이 거의 없고 노동조합도 안전보건문제에 관심이 거의 없으며 사실은 노동조합 활동 자체가 물리적 폭력을 동원한 탄압 때문에 심하게 제약을 받는다는 점이었어요. 둘째는 안전보건체계가 부실하고 무책임하다는 건데, 예를 들어 산업안전보건법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고, 산재 보상 범위도 너무 협소해서 손이 절단되어도 보상금은 1천 달러 정도에 불과하다더군요. 셋째 장애물은 산재보상에 대해 노동자들이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현실이구요. 넷째 장애물로 꼽은 건 폭력적인 탄압을 일삼는 캄보디아 사회의 정치적인 불안정, 그리고 다섯 번째로는 상당수 노동조합이(특히 섬유 부문 노동조합들은 거의 모두) 어용이거나 자본과 정권에 매수되어 있다는 현실이었습니다.

 

캄보디아에서 노동조합의 안전보건활동은 단위 사업장 수준으로 꼼꼼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산별교섭도 없고, 총연맹 수준에서 사업주와 직업안전보건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 정도라고 하더군요. 가까운 미래에 갖추어야 할 역량과 과제에 대해서는 조만간 제정될 산업안전보건법을 사업주들이 준수하도록 감시하고 현장의 요구를 조직하는 일이라고 했어요.

 

홍콩
; 건강권과 노동기본권의 사각지대, 마카오 건설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싶다

 

홍콩에서 온 참여자는 건설업 노동조합 활동가 출신이었는데, 건설노조 차원에서 교섭이 이루어지고, 산업안전보건에 대한 법과 제도가 비교적 명확하며, 대부분의 산재 노동자들은 건설노동조합을 통해 상담하고 조직된다고 해요.

 

하지만 홍콩 건설 노동자들 중 약 2만 명이 마카오에 가서 일하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홍콩의 안전보건제도가 적용되지 않아 큰 문제라고 합니다. 홍콩의 건설노조에서 마카오 현장의 상황을 잘 알기도 어렵고요.

한번은 여러 단체들이 연대해서 마카오에서 일하는 건설 노동자들의 산재 투쟁을 함께 벌여 보상을 쟁취하고 사업주의 책임을 물었던 적이 있었지만, 이런 투쟁을 조직하는 일이 쉽지 않다더군요. 자신조차 2007년 건설 노동자 파업을 조직했던 뒤로 마카오 입국이 금지되어 답답하다는 얘기도 했어요. 앞으로 강화되기를 바라는 역량 역시 마카오의 피해 당사자들과 가까이에서 돈독한 관계 맺기, 건설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피해자들을 직접 조직하기, 그리고 제대로 교섭을 할 수 있는 역량이라고 하더군요.

 

미국에서 온 활동가들은 ‘안타깝지만 산재 피해자 조직화에 대한 미국의 노동조합운동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노동조합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지 오래되었다’라고 간단히 소개했어요.

 

한국
; 다수의 직접행동으로, 현장을 바꾸는 예방투쟁으로 확장시키고 싶다

 

한국의 노동조합과 피해자 조직화에 대해서는 제가 간단히 소개했어요. 전문가와 외부 단체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산재추방운동의 역사가 있었고, 80년대 말부터는 노동조합이 직접 조직하고 투쟁하면서 해묵은 법제도를 개선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는 점, 그 뒤로 노동조합이 주도권을 잡았지만 인적, 조직적 역량이 넉넉지 않은 현실이라구요.

 

노동조합의 피해자 조직화 투쟁 사례 중에는 여러 역사적인 일들이 많지만, 얘기할 시간도 적고 제가 잘 아는 것도 아닌지라, 비교적 최근에 직접 경험한 근골격계 집단요양투쟁에 대해 얘기했어요. 이 투쟁을 통해 산재인정투쟁이 현장개선・예방투쟁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과, 소수의 노동보건 담당 활동가를 넘어 다수의 현장노동자들의 실천으로 조직해가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확인했다는 것. 지금 자본은 전략적으로 전국 수준의 대응을 공세적으로 펼치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노동은 그런 태세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아픈 얘기도 했어요.

 

그렇게 얘기를 해나가다가 문득, 내가 피해자 조직화 운동에서 조만간 시도해보고 싶은 일이나 한층 강화하고 싶은 역량은 뭐지? 하는 질문에서 탁 막히더군요.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뭐지? 반올림 활동을 통해 만나온 삼성반도체 암 피해 노동자들과 더불어 하고 싶은 건 과연 뭐지?

 

답은 간단하더군요. ‘여럿이 함께 꿈꾸기, 싸우기, 만들기’예요. 뿔뿔이 흩어져있던 피해 노동자들이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고, 함께 그리고 직접 행동하면서, 자기 자신의 요구를 발견하고 확장해가는, 그래서 다수의 현장 노동자들에게 울림을 만들고 그들이 자기 일터를 바꾸기 위해 스스로를 조직해가는, 그런 거요.


 

어디서나 똑같은 - 이주 산재 노동자

 

1.5일을 꼬박 진행한 워크샵, 그 마지막인 23일 오후에는 모두 모여 네 개의 소집단으로 나누어 진행한 토론들을 정리해서 한 팀씩 발표하며 정리했어요.

 

모든 팀의 발표 내용이 공감거리, 고민거리, 토론거리를 던져주었지만, 농업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 산재 피해자를 조직하는 문제를 다룬 첫 번째 팀의 발표를 들으면서는 무엇부터 고민하고 토론해야 할 지 먹먹해지기만 하더군요. 어쩌면 이렇게 국제적으루다가 똑같은 건지.

 

사진5 - 소집단 토론을 마치고 나면 언제나 그 결과를 요약하여 벽보를 만들고, 모두 한자리에 모여 함께 내용을 공유했다. 서너 개의 소집단이 발표를 하고, 서로 질문하고 토론하다보면 반나절이 훌쩍 지났다. ‘짧고 굵게’ 강사 혼자서 족집게 강의를 해야만 하는 우리의 노동자 교육은 과연 그 효율성만큼 효과적이긴 한 걸까. 그나마 노동자 교육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지덕지하며 자위하다보면 언제 달라질 수 있을까.
 

 

 

 

 

이들이 발표한 이주노동자 산재 피해자 조직화의 어려움은 지방정부건 중앙정부건 전혀 이주노동자의 산재 문제에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 이주노동자 스스로 안전보건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거나 그럴 수가 없다는 것, 노동조합이나 운동조직들의 지원도 없다는 것, 그리고 이주노동자 산재 피해자들을 조직하려는 시도는 곧바로 강제출국으로 이어진다는 것이었어요. 어디서나 똑같죠 정말.

 

이런 국제적(비록 제가 직접 들은 건 몇 개 나라의 상황이긴 하지만) 동일성은 무얼 뜻하는 걸까요. 이주 산재 노동자들이 태어난 나라와 일하다 병들고 다친 나라를 잇는 연대를 얘기할 수 있으면 참 좋겠어요. 내년 아니면 내후년의 안로브 회의에는 이주 노동자 운동 주체들이 함께 참여해서 얘기를 시작해볼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투쟁의 현장에서 다시 만나자 친구야

 

24일 오후, 안로브 공식 일정을 마치고 나니 사흘 동안 낮이고 밤이고 사람들을 만나 숱한 얘기를 듣고, 잘 통하지 않는 영어와 손짓 발짓으로 그만큼 숱한 얘기를 해서 그런지 기력이 완전히 소진된 기분이었어요.

 

그치만 또 재미있는 건, 일할 때는 바닥난 것 같던 힘도 노는 자리에서는 다시 샘솟는다는 거. 둘쨋 날과 세쨋 날 저녁은 내내 중국과 타이완에서 온 젊은 친구들과 보냈는데요. 처음에는 서로 자기 지역에서 해온 활동과 투쟁에 대해 얘기해주느라 바빴지만, 나중에는 일상의 소소한 얘기들을 손짓발짓 섞어가며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답니다. 그러다보니 불과 사흘 만에 퍽 친해졌어요.

 

마지막 날 밤, 우리는 호텔 로비에서 ‘참이슬’ 한 병을 돌려가며 한 모금씩 마신 뒤 사진 몇 장을 함께 찍으며 헤어지는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제3의 지역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지역에서, 우리 자신의 투쟁에 직접 연대하며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인사를 서로에게 건넸습니다. 영어로 뭐라고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마디로 이런 인사였지요. ‘투쟁의 현장에서 다시 만나자 친구야’. 

 

사진6 - 마지막 날 저녁, 다르면서도 비슷한 환경 덕분에 부쩍 친해진 중국과 대만의 활동가들과 ‘좀 웃긴 모습’을 컨셉으로 사진을 찍었다. 수줍음 타던 지준, 쉬는 시간마다 흡연구역에서 담소를 나누던 제니퍼, 반올림에 대해 궁금한 게 참 많았던 ‘공룡 발가락’ 웨이펑, 조만간 꼭 타이완-한국의 연대사업을 이뤄보자던 니엔윤, 그리고 조용히 도와준 트리스탄. 다음에는 각자의 투쟁에 직접 연대하며 만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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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2 02:03 2010/02/22 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