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성 암 산재인정 현황 및 문제점
- 삼성 백혈병 사례를 중심으로

 

1. 직업성 암 인정 현황과 심각성

 

직업성 암은 전체 암 발생 수의 5~10% 정도를 차지할 것이라고도 하며, 미국 국립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전체 암의 4% 정도를 직업성 암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실제로 보고되는 직업성 암은 이보다 훨씬 적다. 프랑스나 영국의 경우 전체 암의 4%가 직업성 암이라고 가정할 때 매년 약 1만 명이 직업성 암에 걸린다고 추정할 수 있는데, 실제로 이 가운데 직업성 암으로 보고되는 비율은 8~9% 수준이며, 독일은 12.9% 정도라 한다. 어떻게 해야 직업성 암의 보고율을 높여 보상과 예방을 강화할 것인가는 유럽 국가들에서도 중요한 숙제다.

 

한국의 경우 직업성 암이 공식적으로 보고되는 창구는 아직까지 산재보험 통계가 유일하다. 이 통계를 이용하여 직업성 암 보고(인정)율을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면 다음 표와 같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2007년 산업재해원인조사에 따르면 2007년에 산재로 인정되어 공식 보고된 직업성 암은 7건이다(언론을 통해 2007년 직업성 암은 유해인자 노출 질환자 7명, 기타 작업 관련성 질환자 17명이라고 보도된 바 있으나, 기타 작업 관련성 질환자 17명은 암이 아니라 양성 종양이다). 이는 2007년 직업성 암 발생 추정치의 0.1%다. 산재보험 직업성 암 인정 건수는 2008년 10명, 2009년 7명(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산업재해발생현황 통계)이었으며 직업성 암 추정치는 인구 규모와 암 발생 수에 따라 증가했을 것이므로 직업성 암 보고율은 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국가

인구

(백만명)

연간 암발생

(명)

직업성 암

추정치(명)*

직업상 암

인정(명)

직업성 암

인정 비율(%)

프랑스

57.3

250,000

10,000

900

9.0

영국

57.5

241,875

9,670

806

8.3

독일

79.1

367,641

14,700

1,889

12.9

한국(2007)

48.5

161,920

6,477

7

0.1

 [출처] 유럽 자료는 Jacques Brugère, Claire Naud, Recognition of occupational cancers in Europe, TUTB Newsletter(2003)에서, 한국의 인구는 통계청, 연간 암 발생 수는 국가암정보센터, 직업성 암 인정 건수는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2007년 산업재해원인조사에서 발췌하였으며, 직업성 암 발생은 전체 암의 4%로 추정함.
 

 

이처럼 직업성 암의 산재인정(보고) 비율이 낮은 원인으로는 환자 본인이나 의료인, 그리고 건강진단 등의 제도를 통해 ‘직업성 암이 발견되기 어려운 구조’와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여 ‘직업성 암이 인정받기 어려운 구조’로 나누어 볼 수 있다(이상윤, 직업성 암 발견 및 보상체계 개선방향). 다음 표에서 보듯 2003, 2004년에 직업성 암에 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1만여 명 가운데 산재보상을 신청하는 경우가 5% 미만인 현실은 ‘직업성 암이 발견되기 어려운 구조’를 반영하는 것이고, 산재를 신청한 이들 가운데 산재로 인정받는 경우가 20% 정도에 지나지 않는 현실은 ‘직업성 암을 인정받기 어려운 구조’를 반영하는 셈이다.
 

 

연도

발생*

산재신청

승인

발생 중 승인율

2003년

4,993

247 (발생 중 4.9%)

56 (신청 중 22.7%)

1.1%

2004년

5,341

257 (발생 중 4.8%)

47 (신청 중 18.3%)

0.9%

[출처] 이상윤, 직업성 암 발견 및 보상체계 개선방향, 직업성 암 현황과 역학조사·산재보험 문제점 및 대안 찾기 공청회(2009)에서 재구성. 발생 건 수는 연간 암 발생 수(국가암정보센터)의 4%로 계산함.
 

 

앞에서 소개한 2003, 2004년과 2007년 자료를 비교해보면 각 해당 연도의 직업성 암 발생 추정 건수 중 산재로 승인되어 공식적으로 보고되는 비율은 각각 순서대로 1.1%, 0.9%, 0.1%로 낮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직업성 암이 발견되기 어려운 구조와 인정받기 어려운 구조 때문에 직업성 암의 심각성이 사회적으로 인지되지 못하고, 그로 인하여 발견과 인정의 문턱이 높아져 더욱 보고율을 낮추는 악순환을 의심케 한다. 이처럼 직업성 암 승인율(보고율)이 너무 낮고 점점 낮아지는 악순환은 피해 노동자들의 치료와 생계에 대한 정당한 권리가 제한되고 있으며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음을 뜻한다. 또한 직업성 암을 예방해야 할 기업과 정부의 사회적 책임과 의무는 너무 적게 부여되고 있으며, 다양한 직업성 암 사례가 드러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위험 요인을 찾고 예방하기 위한 연구도 그만큼 제한될 수밖에 없어, 그에 따라 수많은 노동자들이 직업성 암의 위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야 하는 현실을 말해준다.

 

또한 사회적 권리와 책임이 올곧게 서지 못한 영역에는 으레 그러하듯, 이런 현실에는 부도덕한 뒷거래가 판치기 십상이며 그로 인해 현실의 모순은 더욱 심각해진다. 산재보상을 청구할 수 있는 노동자의 권리를 알려주지 않거나, 산재 신청이 불가능하다고 속이거나, 치료비나 보상금을 조건으로 산재 신청 포기를 종용하거나, 산재를 신청하면 계약 해지나 강제 퇴직을 시키겠다며 협박하거나, 실제로 산재를 신청한 비정규직 노동자를 본보기 삼아 해고하여 자살로 몰고 간 사업주들의 부도덕하고 반인권적인 범죄들이 바로 그것이다. 삼성 반도체 백혈병 집단 발병 사건에서도 회사가 피해 노동자들에게 ‘산재 신청이 불가능한 사안이다’라고 거짓말을 하거나, ‘어차피 산재 인정이 안될 게 뻔하니 산재 신청을 포기하라, 그러면 산재 보상금에 해당하는 돈을 주겠다’라며 산재 은폐를 시도한 일들이 2010년 7월 피해 노동자들의 입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따라서 노동자의 건강권과 기업이나 정부의 사회적 책임을 바로 세우고 제도와 현실의 한계를 악이용하는 부도덕과 반인권적 행태를 근절하기 위해서라도 직업병은 더 쉽게 발견되고 더 쉽게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암이나 뇌심혈관계 질환처럼 병이 중하고 그에 따른 경제적 부담이 심각한 질병들은 물론, 근골격계 질환이나 피부 질환처럼 병 자체는 중하지 않으나 그로 인한 일상의 침해가 심각하고 많은 노동자들이 고통받는 질병들도 마찬가지다.

 

이 글은 토론회의 주제에 맞추어 삼성전자 피해 사례를 중심으로 직업성 암과 그 인정 과정에서의 문제점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이런 전체적인 중요성을 염두에 두고 토론이 진행되기를 바란다.

 

2. 직업성 암 판정 절차

 

업무상 사고와 달리 업무상 질병의 경우 그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가 한눈에 알아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근로복지공단은 산업안전보건법 제43조와 동법 시행규칙 제107조에 따라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업무상 질병 여부의 결정을 위하여 역학조사를 요청할 수 있다. 이 때 역학조사를 수행하는 기관은 대개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하 산안공단) 산업보건연구원(이하 산보연)이며, 산보연의 역학조사는 역학조사 평가위원회를 거쳐 근로복지공단으로 통보된다.

 

근로복지공단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규칙 제8조에 따라 ‘판정위원회의 심의가 필요한 질병에 대하여 심의를 의뢰하여야’ 하며, 산재법 시행규칙 제7조에 의하면 ‘진폐, 이황화탄소 중독증, 유해·위험요인에 일시적으로 다량 노출되어 나타나는 급성 중독 증상 또는 소견 등의 질병, 그 밖에 업무와 그 질병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는지를 명백히 알 수 있는 경우로서 공단이 정하는 질병’ 말고는 모든 질병이 판정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판정위원회는 권역별로 변호사 또는 공인노무사, 고등교육법 제2조에 따른 학교에서 조교수 이상으로 재직하고 있거나 재직하였던 사람, 의사, 치과의사 또는 한의사, 산업재해보상보험 관련 업무에 5년 이상 종사한 사람 등의 자격을 갖추고 산안공단 이사장이 임명한 70명 이내의 위원으로 구성되며, 이 가운데 회의를 개최할 때마다 위원장이 지정하는 위원 6명으로 구성된다. 의결은 구성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위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이루어진다.
 

2007년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 노동자 고 황유미씨는 한국 반도체 산업에서 직업성 암으로 산재를 신청한 최초 사례였다. 2008년 4월에는 삼성반도체 출신의 황민웅, 이숙영, 김옥이, 박지연씨의 백혈병에 대한 산재신청이 있었고, 이후 삼성반도체 림프종 피해 노동자 송창호씨가 산재를 신청하였다. 이들은 황유미씨의 건과 병합되어 2009년 2월 역학조사 평가위원회, 5월 근로복지공단 자문의사회의를 거친 불승인과 이후 심사청구 제기 및 기각, 행정소송까지의 과정을 동일하게 밟고 있다.

 

이들이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가 아니라 자문의사회의를 거친 이유는 판정위원회가 2007년 12월에 개정되어 2008년 7월부터 적용된 산재법에서 신설되어 그 이전에 산재를 신청한 노동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자문의사회의는 어떤 법적 근거도 없이 근로복지공단이 만들어낸 임의 기구이며, 혈액종양내과 의사 4명과 산업의학과 의사 1명으로 구성되어 사실상 반도체 산업이나 보건학과 통계학에 대한 일정한 수준의 이해를 바탕으로 주의깊게 해석해야 하는 역학조사 결과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우려가 제기되었다. 2009년 5월, 개정 산재법이 시행된 지 1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판정위원회가 산재 불승인률을 높이는 기구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높아지고 있었던 당시에 불승인에 대한 사회적 비판의 화살을 판정위원회나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익명의 소수 전문가들에게 돌리려는 근로복지공단의 고육지책이었다고 평가한다.

 

황유미, 황민웅, 이숙영, 김옥이, 박지연, 송창호씨 이외에 산재를 신청한 삼성전자 반도체의 백혈병, 재생불량성 빈혈, 유방암, 뇌암, 웨게너씨 육아종 등의 직업병 피해자들과 삼성전자 LCD공장의 뇌종양, 생식세포종 피해자들은 산보연 역학조사 이후 근로복지공단에서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를 열어 최종 승인 여부를 결정하였다(일부 피해 노동자들의 경우 산보연에서 역학조사 자체를 실시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기도 하였다).

 

황유미씨의 최초 요양 신청과 판정 과정을 포함하여 이후 심사청구와 기각, 행정소송에 이르는 전체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007년 6월 산재보상을 청구한 이후 두 차례의 역학조사와 역학조사 평가위원회, 근로복지공단 평택지사 자문의사회의를 거쳐 2년 만에 불승인 통보를 받았으며, 2009년 7월 심사청구를 제기한 뒤 근로복지공단 산재심사위원회를 통해 4개월 만에 기각 통보를 받았고, 2010년 1월 행정소송을 제기하여 11개월째 소송을 진행 중이다.

 

 

2003년 10월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기흥공장 입사

2005년 06월급성골수성백혈병 진단

2007년 03월사망

2007년 05월삼성전자, 산보연에 황유미씨의 작업환경 평가 의뢰

산보연, 1차 조사

2007년 06월근로복지공단 평택지사에 유족보상 및 장의비 청구

근로복지공단 평택지사, 산보연에 역학조사 의뢰

산보연, 황유미씨의 작업환경에 대한 역학조사

2007년 12월산보연, 역학조사 평가위원회 ; 업무상질병 여부에 대한 평가 보류, 추가 조사 실시 결정

2008년산보연, 반도체 제조업 림프조혈계 암 발병위험에 대한 역학조사

2009년 02월산보연, 역학조사 평가위원회 ; “업무관련성이 있다는 의견 3명, 업무관련성이 있다는 증거도 없으나 명백한 반증도 없다는 의견 1명, 업무관련성이 낮다는 의견 9명, 유족 추천 산업의학 전문의 2명은 업무관련성이 있다는 의견”으로 결과를 정리하여 근로복지공단에 회신

2009년 05월근로복지공단 평택지사, 자문의사회의 ; 혈액종양내과 의사 4인과 산업의학과 1인으로 구성. 5명 모두 ‘작업환경이 백혈병의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객관적 증거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반대로 해당 작업환경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반증할 근거가 없다’는 결론

근로복지공단 평택지사, 부지급 결정

2009년 07월근로복지공단에 심사청구 제기

2009년 11월근로복지공단, 심사청구 기각 결정 ; ‘업무와 백혈병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가 미흡하다’는 이유

2010년 01월행정소송 제기

 

너무 길고 복잡한 판정 절차

 

지금까지 4년, 최초 신청에서 불승인 결정까지만 보더라도 2년. 사회보장제도로서 이른바 ‘4대보험’ 중 하나이며 ‘근로자의 업무상의 재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산재보험제도의 혜택을 요구하는데 걸린 시간으로서는 너무 길다. 황유미씨의 경우 반도체 산업 최초로 산재보상을 신청한 직업성 암 사례라 예외라고 치더라도, 다른 피해자들 역시 수개월의 시간이 걸리고 있다. 이처럼 처리 기간이 길어지면 피해 노동자들과 가족들은 피를 말리는 듯한 고통을 겪는다. 국민건강보험이나 고용보험에서 보험금 지급을 결정하는데 수개월 혹은 수년이 걸린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최종 판정까지의 소요 시간이 길어지는 배경에는 복잡한 판정 절차가 있다. 그 때문에 조사와 논의 과정에서 당사자의 권리도 위축된다. 피해 노동자들이 각각의 단계에서 과연 언제 어떤 이들이 어떻게 조사를 진행하는지, 언제 어떤 이들이 어떤 자료들을 가지고 산재승인 여부를 결정하는지를 알기란 대단히 어렵고, ‘그들’이 필요로 할 때 조사 대상으로서 정보를 제공하고 질문에 대답하는 역할 밖에는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절차가 복잡하기 때문에 최종 판단에 대한 책임도 모호해진다. 행여 처리 과정의 잘못을 발견하여 일차 책임 기관인 근로복지공단 해당 지사에 문제를 제기해도 ‘산보연 역학조사에 따랐을 뿐이다’, ‘자문의사들의 전문적 소견에 따랐을 뿐이다’, ‘판정위원회에서 하는 일이라 우리는 모른다’, ‘심사청구나 행정소송을 하면 되지 않느냐’와 같은 답변만을 얻기 일쑤다. 질병과 간병에 따르는 생활의 어려움을 견디며 심사청구를 하면, 또다시 길고 복잡하고 폐쇄적인 절차를 거쳐 다시 한번 불승인 통보를 받을 뿐이다.

 

이런 직간접 경험들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쌓여가는 한, 일 년 동안 복권 1등 당첨자 수보다도 적은 직업성 암 보고율 0.1%의 현실은 좀처럼 바뀌기 힘들다.


3. 직업성 암 산재 불승인의 논리와 문제점

 

삼성전자 직업성 암 사례들에서 확인되는 산재 불승인의 논리는 크게 세 갈래로 볼 수 있다. ①산재보험법 시행령의 업무상 질병 인정기준에 해당되지 않는다, ②산업안전보건공단 역학조사에서 업무 관련성에 대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③업무상 질병 판정 위원회에서 업무관련성이 낮다고 판정했다. 이 글에서는 ①과 ②의 문제를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1) 산재보험법 시행령 업무상 질병 인정기준의 한계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 제34조에서는 다음 세 가지 요건 모두에 해당하면 업무상 질병으로 본다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① 업무수행 과정에서 유해ㆍ위험요인을 취급하거나 유해ㆍ위험요인에 노출된 경력이 있을 것

② 유해ㆍ위험요인을 취급하거나 유해ㆍ위험요인에 노출되는 업무시간, 그 업무에 종사한 기간 및 업무 환경 등에 비추어 볼 때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고 인정될 것

③ 유해ㆍ위험요인에 노출되거나 유해ㆍ위험요인을 취급한 것이 원인이 되어 그 질병이 발생하였다고 의학적으로 인정될 것

 

그리고 이 법과 관련하여 산재법 시행령 별표 3에서는 뇌혈관질환 또는 심장질환, 근골격계질환, 피부질환, 간질환, 그리고 물리적인 요인, 이상기압, 소음, 진동, 화학물질, 병원체 등에 의한 질환 등을 23개 항목으로 분류하여 각각의 경우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하는 구체적인 인정기준을 제시해두고 있다. 이 가운데 직업성 암과 관련된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 검댕·타르·피치·아스팔트·광물유·파라핀 등으로 인한 원발성 상피암

• 염화비닐에 노출되는 업무에 4년 이상 종사한 근로자의 원발성 간혈관육종

• 타르에 노출되는 업무에 10년 이상 종사한 근로자의 원발성 폐암이나 원발성 피부암(편평세포암, 기저세포암)

• 크롬 또는 그 화합물에 노출되는 업무에 2년 이상 종사한 경력이 있는 근로자의 원발성 폐암이나 비강·부비강·후두의 원발성 암

• 벤젠 1피피엠(ppm) 이상의 농도에 10년 이상 노출된 근로자의 백혈병, 골수형성 이상 증후군, 다발성 골수종, 재생불량성 빈혈. 다만 노출기간이 10년 미만이더라도 누적 노출량이 10피피엠 이상이거나 과거에 노출되었던 기록이 불분명하여 현재의 노출농도를 기준으로 10년 이상 누적 노출량이 1피피엠 이상이면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

• 석면에 노출되는 업무에 종사한 경력이 있는 근로자의 원발성 폐암 또는 악성 중피종 중 석면폐증과 동반하거나 늑막비후, 초자성 비후, 판상석회화, 담액증, 석면소체 또는 석면섬유를 동반하거나 발견되는 경우, 또는 석면에 10년 이상 노출된 경우, 또는 석면에 노출된 기간이 10년 이하라도 흡연 기간, 석면에 노출된 기간, 노출 후 발병까지의 기간 등을 고려하여 석면으로 인한 질병으로 인정되는 경우

• 작업환경에서 유해물질에 노출되거나 중독, 혹은 병원체에 감염되거나 업무상 사고나 질병 때문에 기존의 간질환이 자연적 경과 속도 이상으로 악화되거나, 바이러스성 간질환을 지닌 근로자가 업무와 관련하여 다른 간염 바이러스에 중복 감염되어 원발성 간암이 발병 또는 악화된 경우

 

이 기준에 명시된 발암물질이나 암의 종류는 매우 제한적이다. 따라서 이런 ‘열거방식’의 기준은 이에 해당하는 경우 조금이라도 신속하게 인정하는 가이드라인 정도로 사용해야지, 기준에 정확히 맞지 않다는 이유로 직업성 암이 아니라고 판정하는 배제 기준으로 쓰면 안된다. 참고로 산업의학 교과서에는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화학물질의 발암성을 규명하는 가장 강력한 과학적 근거가 된다고 보는 역학적 연구조차 여러 한계로 인해 ‘위음성(실제로는 발암성이 있는데도 연구 결과에서는 발암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발생할 위험이 대단히 높다. 때문에 과학자들은 역학적 연구에서 연관성이 없다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이를 그 화학물질의 비발암성에 대한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Current Occupational & Environmental Medicine, 3rd. Edition, McGraw-Hill, 2004).

 

또한 법 취지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기준에 포함된 발암물질과 직업성 암의 종류를 늘려야 한다. 발암물질 종류의 경우, 2010년 2월 발암물질감시네트워크와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발암물질정보센터에서 IARC, ACGIH, EU, NTP, EPA 등 국외 5개 기관의 발암물질 목록을 정리하여 ‘발암물질목록1.0’을 발표하였는데, 이 목록에는 ‘암을 일으키는 것이 사람에 대한 연구조사에서 이미 확증된’ 1등급 발암물질 34종이 소개되어 있다. 세계보건기구에서도 ‘World Cancer Report 2008’를 통하여 IARC(국제암연구소)의 자료를 바탕으로 여러 발암물질 가운데 직업성 노출이 주된 것이라 여겨지는 29개의 인체 발암성 확정 물질과 15개의 인체 발암성 확정 산업(혹은 직업)을 제시하고 있다. 최소한 이처럼 국제적으로 공식 인정되고 있는 발암요인들과 해당 암종은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쉽게 산재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겠다.


삼성전자 직업성 암 사례들의 경우, 산재법 시행령 별표 3에 국한하여 논의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산재법 시행령 제34조의 한계에 대해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우선 34조의 내용을 직업성 암 문제로 정리하면 ‘발암물질을 취급하거나 노출된 경력이 있는가?’, ‘그 노출의 수준이 암을 일으킬 만한가?’, ‘그 발암물질이 그 암을 일으키는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모두 ‘예’라고 말할 수 있으면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 골자다. 그런데 직업성 암의 경우 노출로부터 발병까지 걸리는 기간이 다른 질병보다 훨씬 길다. 따라서 산재보상을 신청하는 노동자나 가족들이 과거의 작업환경과 노출 수준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제출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 삼성전자 직업성 암 피해 노동자들의 경우, 자신이 취급하거나 노출된 화학물질들이 무척 많다고만 기억할 뿐 그 이름은 알지 못하는 일이 허다했다. 회사에서 화학물질에 대해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고, 우연히 한두 가지 이름을 알았더라도 이미 오랜 시간이 흘러 잊어버리기도 했다. 피해 노동자가 이미 사망한 뒤에는 말할 것도 없다. 몇 가지 화학물질의 이름을 알고 있는 노동자들조차 전체 사용 물질 가운데 극소수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2) 산보연의 업무관련성 평가 역학조사의 한계

 

이런 경우 근로복지공단의 단순한 재해조사로는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에 산보연에 역학조사를 의뢰한다. 전문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과거 발암물질 노출을 평가하여 업무관련성을 판정하기 위함이다. 삼성전자 직업성 암 피해자들의 경우도 대개 이런 역학조사를 거쳤다. 이 조사는 한마디로 피해 노동자가 암 유발 요인에 노출되었는지, 그 노출이 상당한 수준인지를 판단하기 위한 것이며, 이를 위해 본인 및 유족 진술, 회사 제공 자료, 현장방문, 과거 기록 등을 바탕으로 직업력, 작업 내용, 유해요인에 대한 과거 및 현재 노출 평가 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직업성 암의 업무 관련성을 가늠할 수 없다. 그 한계를 삼성전자 직업성 암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역학조사의 한계 1. 공정과 작업환경의 변화

뇌종양 환자 한혜경 씨의 경우 납이 함유된 솔더크림을 사용하며 인쇄회로기판을 제조했지만, 그녀가 일했던 설비는 2001년에 다른 업체로 팔려나갔고, 그 업체가 폐업하면서 공정 자체가 사라졌다. 이에 산보연에서는 현재 삼성LCD 공장에 납품 중인 업체를 방문하여 국소배기장치와 환기시설이 잘 갖추어졌음을 확인하고 이를 근거로 과거 노출이 낮았을 것이라 추정했다. TCE를 맨손으로 만지며 반도체칩 마무리 공정에서 일했던 백혈병 환자 김옥이 씨나 바로 옆의 도금공정 림프종 환자 송창호 씨가 기억하는 1990년대의 작업환경은 지금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비교적 최근에 일했던 다른 피해자들도 몇 년 사이에 공정설비가 바뀌었거나 없어졌고, 예전에는 없었던 환기 장치나 개인 보호구 등이 추가되었다.

 

역학조사의 한계 2. 과거 작업환경기록이나 유사 업종에 대한 연구 문헌이 없음

산보연은 삼성전자가 제출한 목록에 근거하여 과거 발암물질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평가하였으나, 2009년 시점에서 회사가 파악하고 있는 화학물질들의 성분은 해당 물질 제조사가 제공한 자료에 근거했을 뿐 실제 확인한 바 없으며, 제조사의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성분은 삼성전자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산안법에 의한 작업환경측정 기록을 통해 과거 노출을 추정하는 것은 거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작업환경측정의 한계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서술). 기타 반도체 산업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이나 구체적인 작업환경에 대한 문헌 정보를 통해 정보를 얻을 가능성도 낮다. 우선 반도체 공정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며, 그에 따라 제조 설비는 물론 소위 ‘레시피’라고 부르는 화학물질 사용 양상도 수시로 변화하기 때문에 이런 연구 문헌들이 생산되기란 대단히 어렵다. 그나마 존재하고 있는 관련 문헌들은 주로 질병 발생률이나 사망률에 대한 역학연구인데, 이 가운데 상당수는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 등 반도체 회사의 연구지원금을 받아 이루어졌고, 연구 대상 설정과 분석 방식 등의 문제점에 대한 학계의 논란이 이어져온 것들이다.

 

따라서 현재 시점의 측정이나 문헌 자료를 통해서는 과거에 발암물질에 노출되었음을 입증할 수도, 노출되지 않았음을 입증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산보연은 “과거 발암물질에 노출되었는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지 않고 “노출되지 않았다”고 해석했다.

 

역학조사의 한계 3. 당사자와 동료 노동자들의 진술을 무시함

이런 경우 노동자들의 진술은 과거의 작업환경을 재구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정보가 된다. 그러나 피해노동자들은 과거의 작업환경에 대해 상세한 정보와 신뢰할만한 근거를 제시하기 어렵다. 대부분 자신이 사용한 화학물질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X선을 이용한 제품 검사를 했던 노동자는 X선이 방사선의 일종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평소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이 안전보건에 대한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산재를 신청한 노동자들 중 일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피해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산재 신청에 나선 이후 과거 동료들로부터의 연락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두절되었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피해 노동자들의 작업환경에 대해 진술을 해 줄 수 있는 동료들을 구할 경우에도 이들의 진술은 회사에서 선정한 다른 노동자들의 진술을 통해 반박되었다. 예를 들어 한혜경씨의 경우 “작업장에서 납땜 냄새가 하루 종일 진동했고, 고열로 납땜을 마친 회로기판을 검사하느라 얼굴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아야 했다”는 진술이 “국소배기장치가 잘 되어 있어 노출수준이 낮았다”라는 회사측 진술을 근거로 반박되었다. “바쁠 때는 반도체 구조 검사용 X선 발생장치를 끄지 않은 채 설비에 제품을 넣거나 빼고는 했다”는 박지연 씨의 진술도, “문을 열면 X선 발생이 저절로 멈추므로 절대로 노출이 일어날 수 없다”라는 회사의 주장을 통해 반박되었다.

 

역학조사의 한계 4. 작업환경 측정의 한계

산보연에서는 삼성반도체의 과거 작업환경측정 결과에서 발암물질이 있었는지를 검토하고, 직접 현장을 방문하여 몇 가지 발암물질을 측정해보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업장들은 작업환경측정을 할 때 설비 가동을 줄이거나 작업장을 깨끗이 치우기 때문에 실제 작업환경을 그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유해요인을 저평가할 가능성이 크며, 이는 작업환경측정의 고질적인 병폐로 널리 알려진 문제점이다. 실제 삼성반도체의 2006년 작업환경측정 결과 보고서에서도 실인원 20인이 배치된 공정에서 1명만 작업할 때 측정을 수행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설령 제대로 측정이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작업환경측정은 산업안전보건법에서 지정하고 있는 몇 가지 물질에 대해서만 측정이 이루어지며, 간헐적인 비정형 업무나 사고로 인한 ‘순간 고농도 노출’, 그리고 호흡기 노출 이외에는 피부 등 다양한 흡수 경로가 고려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발암물질 노출 가능성을 정확히 파악하기에는 너무 제한적이다.  따라서 과거 작업환경측정 결과에서 특정 발암물질을 찾아냈다면 이를 근거로 백혈병의 업무 관련성을 인정할 수 있지만, 반대로 작업환경측정 결과 특정 발암물질이 없었다고 해서 백혈병 유발 요인에 노출되지 않았으리라 단언할 수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개별역학조사 과정에서 산보연이 직접 현장을 방문하여 실시한 측정 역시 과거 작업환경측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이었다는 점이다. 좀처럼 밝혀내기 어려운 백혈병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도록 면밀하게 짜여진 조사라기보다는 벤젠이나 방사선 등 ‘널리 알려진 발암물질’을 몇 개 뽑아서 공기 중 농도를 한번 재보았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결국 설비와 공정 기술이 변하고 그에 따라 사용 물질이 바뀐 공정, 예전에 없던 환기 장치가 생기고 개인 보호구가 지급된 상태에서 몇 시간 동안 공기 중 농도를 측정한 뒤 ‘허용기준 이하이므로 업무관련성이 낮다’라고 결론내린 것이다.

 

얼마 전 모 신문을 통해 삼성반도체 퇴직 엔지니어는 ‘외부에서 방문할 경우 통상 쓰던 화학물질을 아예 치우기도 한다’라고 고백했다. 이런 문제들을 방지하기 위해 피해 당사자 혹은 추천인의 참여를 요구했지만, 조사 과정에서 확보한 자료들을 열람할 수조차 없었고, 고작 형식적인 입회가 전부였다. 그나마 조사 당시 생존해 있고 건강이 허락하는 당사자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일방적으로 회사 편에서 진행되는 작업환경 평가를 통해 발암물질을 찾아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산재보상을 구한 삼성전자 직업성 암 사례들은 대부분 산보연의 역학조사를 거쳤으며, 역학조사 결과를 놓고 평가위원회를 개최하여 업무관련성을 판정하였다. 다음은 삼성전자 반도체 백혈병 피해 노동자 5명에 대한 역학조사 평가위원회의 결론이다.
 

 

 

 

업무관련성이 있다는 견해

업무관련성이 낮다는 견해

전체 반도체업종에 대한 역학조사 결과(발생률과 사망률)에 대한 해석

①일부 림프조혈기계암에서 통계적으로 유의한 증가가 있었고 분석방법에 따라 백혈병 역시 증가될 수 있음.

②통계적으로 유의하지는 않았으나 백혈병 사망률, 발생률이 높았고, 건강근로자 효과를 고려하면 위험도가 높다고 판단됨.

③유사한 환경 (다른 라인)에도 백혈병 사례가 존재함.

④조립공정은 림프종이 유의하게 높았던 공정으로 림프조혈기계암의 위험이 존재하는 것으로 판단됨

반도체 근로자의 백혈병 발생이 높다는 증거가 충분치 않았음

산보연 작업환경평가 결과에 대한 해석(노출수준 저평가, 복합노출, 비정상적인 상황의 노출)

①근로자들의 일관된 진술에서 나타나는 잦은 사고, 피부노출의 가능성, 화학물질의 대량 사용 등을 고려할 때 산보연의 일회적인 측정결과보다 높은 수준으로 다양한 화학물질 및 백혈병 유발물질에 노출되었을 개연성이 있음.

②전리방사선 노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

③[오퍼레이터] 여러 화학물질을 취급하며 30년 가까이 오래된 설비, 수동작업, 전체환기에 의한 복합적인 노출 [엔지니어] 장비 유지 보수 과정, PM 업무 등에서 고농도로 노출되었을 개연성, 셋업과정에서 불안정한 상태의 테스트 등 고농도의 화학물질 노출의 가능성 있음

④복합물질로부터 생성된 부산물 노출 가능성이 있음

⑤작업중 사용한 화학물질에 의해 두통, 오심 등 건강영향이 일어날 정도로 노출수준이 높았음.

⑥방사선발생장치를 끄지 않고 여는 등 산보연 측정 결과보다 높게 노출되었을 개연성이 있으며 낮은 농도의 방사선노출에서 암이 발생하였다는 보고들이 있음.

①벤젠과 전리방사선의 측정결과는 미리 예고된 일회적인 측정이었으나 그 결과가 매우 낮음

②방사선 발생기와의 거리 등을 고려할 때 백혈병을 일으킬 수준으로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낮음

③비정상적인 상황에 의한 방사선 노출 가능성이 있다하더라도 거리로 보아 매우 노출수준이 낮을 것이며, 그 정도의 사고성 노출이라면 다른 임상적 증상이 나타났어야 함

④산과 알칼리 등 다양한 화학물질에 노출되고 있으나 백혈병 유발물질은 아님. 그 외의 백혈병 유발물질에 대한 노출근거가 없고, 다른 물질들이 혼합되어 생성되는 발암물질이 근로자에게 노출되어 백혈병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은 낮음

기타

①트리클로로에틸렌은 간암과 림프종에 대해 국제암연구소에서 Group 2A 로 지정한 발암 가능 물질이며 백혈병과 연관성이 있다는 보고가 있음. 과거 사용되었던 트리클로로에틸렌에 불순물로 벤젠이 함유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고 판단됨.

②화학물질 및 전리방사선 간의 상호작용, 개인의 감수성 차이, 심한 노동강도 하에서의 면역력 저하 등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됨

③직업적 요인 외의 개인적 위험요인이 없음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 반도체 업종과 백혈병의 원인적 연관성이 밝혀진바 없음

 

반올림에서 앞에 열거한 역학조사의 한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산보연은 ‘역학조사를 통해서는 의학적인 업무관련성을 판단할 뿐이며, 산재보상에 대한 판정은 근로복지공단의 몫’이기 때문에 산재 불승인에 대해 산보연에 항의하는 것은 ‘성동격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산보연의 역학조사와 평가위원회의 결론이 불승인 결정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근로복지공단은 직업성 암 산재보상 청구 건에 대한 업무관련성 평가를 대부분 산보연에 의뢰한다. 1992년부터 2005년 사이에 산보연에서 심의한 318건 가운데 직업성 암으로 판정이 이루어진 경우는 99건으로 31.1%에 이른다. 전체 직업병 심의 건 가운데 인정률 47.1%에 비하여 상당히 낮고 질환군들 중 가장 낮다고 볼 수 있다. 산재보상을 신청한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가장 넘기 어려운 문턱이라 할 수 있다.

 

직업성 림프조혈기계 암에 대한 산보연의 업무관련성 평가를 분석한 자료를 보면 이처럼 높은 문턱의 원인을 추론할 수 있다. 2010년 6월 산보연의 안전보건 연구동향에 게재된 안연순의 분석글에 따르면 1992년부터 2009년까지 산보연에 역학 조사가 의뢰된 건 중 역학 조사가 완료되고 보고서 확인이 가능한 림프조혈기계 암 113건 가운데 29건(25.7%)이 업무 관련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되었다. 업무 관련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 29명의 노출인자는 벤젠 26명, 전리방사선 2명, 항암제 1명이었고, 벤젠에 노출된 29명 중 3명은 1,3-부타디엔, 포름알데히드, 전리방사선에 복합적으로 노출되어(또는 노출 추정) 모두 국제암연구소에서 충분한 발암 증거를 갖는 그룹 1 물질에 노출된 사례들이었다. 또한 발암물질의 노출은 “피재자가 직접 취급하던 중 노출된 경우만 일관되게 인정”하였고 이런 노출을 확인한 근거 자료는 “역학조사 시 개인시료측정에서 노출이 확인된 경우 25건, 원시료 분석에서 확인된 경우 24건, 과거측정자료에서 확인된 경우 9건, 노출 확인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사용 기록으로 업무 관련성을 추정한 경우 5건”이었다고 한다. 벤젠이나 전리방사선, 항암제에 대해 노출이 되었음을 알고 있고, 현재의 작업환경에서 그 물질이 남아있어 개인시료측정, 원시료 분석 등을 통해 확인이 되거나, 과거에 사업주가 그 물질의 사용을 인지하고 작업환경측정을 통해 기록을 남겨놓은 경우에 승인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자료가 없거나 충분치 않아 직종이나 상황으로 노출을 확인한 경우에는 모두 업무관련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4. 직업성 암 산재인정을 둘러싼 문제점과 개선방향

 

앞에서 살펴본 산재법 시행령의 업무상 질병 인정기준과 산보연 역학조사를 통한 업무관련성 평가 현황은 우리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발암물질을 취급하거나 노출된 경력이 있는지, 노출 수준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는 경우에는 어떻게 업무관련성을 판단해야 하는가? 현재 발암물질이 남아있지 않고 과거 기록으로도 남아있지 않은 경우 업무관련성을 인정할 만한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산재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정당한가?

 

아울러 앞에서 길게 논의하지는 않았지만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도 답해야 한다. 근로복지공단의 불승인 판정이 주로 산보연의 역학조사 결과를 토대로 이루어지며, 그 구성원들이 만일 산보연이 주장하는대로 역학조사는 단지 과학적인 측면에서의 업무관련성을 평가하는 것이고 산재 인정 여부는 온전히 근로복지공단만의 책임이라면, 어째서 근로복지공단의 판단은 산보연의 조사 결과를 주된 근거로 삼는가? 이를 분리하기 위하여 산보연이 역학조사 평가위원회의 결론을 명확히 제출하지 않으면 과연 근로복지공단에서는 이 문제를 무엇을 근거로 처리할 것이며,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그럴 수 있는 충분한 역량과 조건을 갖추었는가? 이 모든 기준과 절차와 관행들은 과연 산재보험제도의 취지에 적합한가? 그리고 0.1%에 지나지 않는 직업성 암 보고율(승인율)은 이대로 내버려 두어도 상관없는가?

 

미처 글로 풀어내지 못하였으나 직업성 암 산재 인정 과정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문제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층으로 나누어 정리해볼 수 있다.

 

1) 판단의 근거 ; 무엇이 과학적인가?
- ‘(충분히)노출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Vs. ‘(충분히)노출되지 않았다고 보기 어렵다’
- ‘해당 질병의 원인이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 ‘제시된 유해요인이 발암과정에 충분히 강력하게 작용했다고 보기 어렵다’
- ‘해당 노동자 집단의 유병률이 충분히 높지 않다’
- ‘51% 이상의 기여도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2) 판단의 목적과 기준 ; 무엇을 위하여 판단하는가?
- 형사 사건 조사와 결론의 철학(유죄임을 입증해야 한다)과 사회보장제도의 차이
- 사회 안전망으로 기능하기 위해 적절한 그물눈의 크기
- 산업보건에서 사전예방의 원칙으로 확장해가기 위한 방향 부재

 

3) 판단의 과정 ; 누가 어떻게 판단하며 누구에 의해 감시되는가?
- 다층의 의사결정구조 ; 다양한 의견 수렴과 검토의 기회가 아니라 책임 떠넘기기, 피해 노동자의 부담 가중
- 정보의 차단, 피해 노동자와 시민사회의 의견을 수렴하는 구조의 부재
- 회사의 개입 ; 보편적인 (공)보험 구조에서는 수용불가능한 ‘이해당사자’ 논리

 

끝으로 이 문제와 관련된 법원의 입장을 간단히 소개한다. 법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기관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현재의 법 테두리 안에서도 근로복지공단이 산재법의 취지를 살려 충분히 직업성 암의 문턱을 낮출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 백혈병과 관련된 대법원의 결정 취지
 

 

①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결과에 국한되거나 이에 한정되어 업무기인성을 판단하지는 않음 (대법원 96누14883 판결 참조)

② 벤젠, 방사능, 고압전기, 바이러스, 다른 발암화학물질 등으로 그 유발 가능한 발암물질을 폭넓게 판단하고 있음 (대법원 2003두12530판결 참조)

③ 초기부터 판결문상 “다른 발암물질”이라고 하여, 백혈병 등의 유발물질을 국한되어 판단하고 있지 않음 (대법원 2003두12530판결 참조)

④ “노출수치가 낮더라도 장기간에 걸쳐 벤젠에 노출됨으로써 이 사건 상병의 유발인자로 작용하기에 충분하므로”(대법원 2003두12530 판결)라고 하여, 산재법 및 시행규칙상의 노출기준에 구속되어 판단하고 있지 않음

⑤ 벤젠 등 노출이라는 요인에 구속되지 않고, 타 유해물질(당해 사건에서는 중금속인 납, 유기용제인 IPA, 1,1,1-TCE)로부터 상병이 발생된 것으로 추정한 것으로 “백혈병=벤젠”이 아닐 수 있음을 명확히 판시함(대법원 2008두3821 판결 참조)

⑥ 근무기간이 1년이 채 되지 아니하였더라도 유해물질 등에 노출되었다면 상병이 발병할 수 있다고 판단함 (대법원 2007두11450 판결 참조)

⑦ “허용기준 미만의 노출로도 개인의 면역력 차이에 따라 이 사건 상병이 발병할 수 있다”고 판단함 (대법원 2007두11450 판결 참조)

⑧ 피부질환 등을 유해가스 노출의 중요한 근거로 삼고 있으며, 적절하지 않은 보호 장구의 착용을 중요한 노출 위험인자로 판단함 (대법원 2007두11450 판결 참조)

⑨ 직접적인 자료가 없다고 하더라도 간접적 사실이나 의학적 회신으로부터 유해물질 사용을 추정하여 이로 인해 업무기인성을 인정함(대법원 2006두15233판결 참조)

⑩ 벤젠의 공식적 노출이 없었으며 작업환경 측정결과도 모두 기준치 이하였던 사안에서도 업무기인성을 추정하여 인정함(서울고등법원 2005누10615 판결 참조)

⑪ 아날린이나 방사선 등의 노출에서도 백혈병 등이 발생할 수 있다고 보고 있음 (서울고등법원 2004누15613판결 참조, 수원지방법원 2008가합8617판결 참조)

 

 

(2010년 11월 30일 참여연대/민주당 이미경의원실 공동주최 토론회 발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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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1 22:50 2010/12/01 2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