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주세요

from 콩이 쓴 글 2010/09/28 22:00

상을 받는다고 좋아할 나이도 한참 지났고, 더불어 함께 해온 많은 이들의 눈물과 땀과 불면의 시간들 앞에 내 이름을 걸게 되는 게 못내 불편하고, 세계지도에서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이름의 작은 나라 작은 모임이 아니라 "미국의 큰 학회"에서 준다는 이유로 심지어 조선일보 열독자 한나라당 지지자인 아부지마저도 자랑거리라고 생각하실 지경인 게 씁쓸하지만...

 

그래도 한 명이라도 더 알게 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지는 않을까, 조금이라도 그분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계기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기대했다.

그런 마음을 미리 읽어주시고 애써준 분들도 있으니 다행이고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00919214936&Section=02), 그런 기대를 실현하기 위한 나의 노력도 이제 시작해야 할 때고.

 

그 시작의 말은 "기억해주세요"인 것 같다.

 

여러분 이 사람들을 기억해 주세요.

아프고 무겁고 답답하고 막막하고 뻘쭘하고 불편해도

그래도 기억해 주세요.

 

제대로 기억해 주세요.

피해자, 투사, 혹은 소녀, 누이, 고인, 그런 명칭 말고요.

당신들이 기억을 조금 더듬으면 금새 되살아나는 같은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

잘 살려고 일하다가 그 일 때문에 병들고 죽어간 사람들,

병들고 죽어가야했던 까닭을 알아낼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세상을 향해 자기 목소리를 내놓을 틈도 갖지 못한 채 쓰러진 사람들,

그게 나였더라면 얼마나 아플지 짐작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서러운 사람들,

차라리 무슨 큰 뜻이라도 세우고, 차라리 무슨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이루어 보기라도 하고,

무슨 이름이라도 남기고 떠나면 덜 억울했을,

아니, 그래도 너무도 억울했을 사람들.

 

하지만 우리가 이제는 알아버렸잖아요.

그 고통과 억울함이 이미 수십년째 풀리지 못한 채 이어져왔다는 사실을,

한번쯤 '디지털 강국'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곳들마다 똑같은 사람들이 똑같이 죽어갔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 사실을 알아버린 다음에는 도리가 없잖아요.

지금까지 쓰러져간 분들의 아픔 앞에서야, 차마 알지 못했다고 변명이라도 하지요.

앞으로 더 병들고 죽어가는 분들을 만나게 된다면 우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이런 못된 회사가 아니더라도,

이런 고약한 병이 아니더라도,

하루에 일곱 여덟 명이 일터에서 죽어갑니다.

그것도 정부 통계가 말하는 숫자일 뿐이니

얼마나 더 많은 이들이 고통을 떠안고 있을지 모릅니다.

실은, 저만 하더라도 이 얘기를 들은 게 벌써 16년입니다.

 

그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하지만 혼자서 부끄럽고 미안해 하는 건 감상일 뿐,

실은 이 세상의 깊은 뿌리를 흔들어 엎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을 그 마음을,

제대로 기억해 주세요.

 

지금, 답할 수 있는 일들만 얘기할 뿐이라는 것 때문에 자책하거나 회의하지 마세요.

지금 답할 수 없는 문제들이라 해도 기억해 주세요.

그 해답은 어쩌면 미래의 당신 손에서 발견할 지도 모릅니다.

 

기억해 주세요.

공유정옥 이름으로 했던 몇 차례의 인터뷰, 그 자리에 있어야 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스물 두 살에 아버지 택시 속에서 숨진 유미씨,

지금도 그 택시를 몰아야 하는 아버지 황상기님,

둘째 아이 출생신고를 마치고 서른 한 살에 숨진 민웅씨,

두 아이라는 '보석'을 품은 채 싸우는 정애정님,

부모님을 위해 빨리 나아서 돈을 벌고 싶다던 지연씨,

그 이쁘던 '아가'를 아직 가슴에 묻지도 못한 부모님들,

첫 아이를 낳고 공장에 돌아와 서른 하나에 숨진 숙영씨,

남은 삶을 장애1급으로 살아야 하는 혜경씨,

딸을 업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며 삼성의 수많은 아들 딸들을 걱정하는 김시녀님,

참 따스한 아들과 오빠, 참 다정한 약혼자였던 제욱씨,

오빠의 영정을 꼭 끌어안고 거대한 삼성공장 앞에 섰던 연미정님과 어머님,

너무 평범하고 너무도 우리 자신과 닮아서, 일일이 다 말하는 게 힘겨운 그 사람들의 이름을.

 

아래 글은 건강한사회를 위한 약사회 회지 2010년 봄호  http://healthysociety.tistory.com/251 에서 퍼왔습니다. 우리가 그/녀들의 삶과 죽음 앞에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하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죽은 자를 위한 추모, 산 자를 위한 투쟁

삼성 반도체 노동자 故 박지연씨, 스스로 권리를 주장하고 노력했던 노동자

 

 

 

 

지난 3월 31일,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투병하던 박지연 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반올림 인터넷 카페에 ‘꼭 다시 건강해질께요, 감사해요~ ㅎㅎㅎ’라는 덧글을 남긴 지 두 달 만의 일이었지요. 반올림 활동가들에게 2년 이상 함께 해온 지연 씨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누군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이의 처지가 가련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우리가 힘든 까닭은 지연 씨가 불쌍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지연 씨를 처음 만났던 날을 돌이켜봅니다. 통원 치료를 위해 서울에 올라왔을 때, 서울 모처 친척집에서 만났더랬지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연방 마스크를 추어 올리며 조금 부끄러워하던, 스물 한 살 아가씨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사진을 한 장 찍는 것도 부담스러워했고, 특히나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머리가 빠지고 합병증에 시달리며 초췌해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더랬지요. 그러던 그이가 내 얘기를 좀 알려달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산재 인정이 정당하고 절실하다는 걸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겁니다. 산재 신청을 한 지 꼬박 1년 만에 열린 근로복지공단 자문의 협의회에, 투병 중인 몸으로 지연 씨는 직접 출석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제 재발할지 모르는 불안감에 떨며 살아가야 하고, 재발이 되기라도 한다면 더 이상 치료할 비용도 없을 뿐더러, 밥벌이도 못하고 이대로 병원비, 약값으로 엄마가 식당일로 벌어오는 생활비를 다 쓰기만 한다면 생계유지가 안 될 것 같고 살 수가 없을 것 같아 아프고 불편한 몸 이끌고 답답한 마음에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 더 이상 저와 같은 병에 걸리는 사람이 나오지 않길 바라며, 앞으로 제가 병원비, 생활비 걱정만은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근로복지공단은 치료비 보상과 생존권 보장을 마땅히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2009년 5월, 박지연씨의 진술서)

 

그이는 질병과 가난의 고통을 짊어지고 숨진 가엾은 ‘반도체 소녀’가 아니라, 그 뼈아픈 경험을 통해 스스로 권리를 주장해야겠다고 깨우치고 힘껏 노력했던 노동자였습니다. 늘 어서 나아서 반올림 투쟁에 힘을 보태겠다고, 지금 함께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곤 하던 책임감 있는 동지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이의 마지막이 서럽고 안타깝습니다.

 

지연 씨가 세상을 떠난 후 반올림에는 언론의 관심과 제보 전화가 부쩍 늘었습니다. 퇴직 노동자들은 암에 걸렸던 옛 동료들의 소문을 전해오기도 했고, 라인 안에 얼마나 악취가 심했으며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화학물질 누출 사고는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지 모를 거라며 가슴을 쳤습니다. 어떤 일을 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내 가족도 그 곳에서 일하다가 암에 걸렸다며 젊은 아내를 잃은 남편, 언니를 잃은 동생의 전화도 이어졌지요. 그래서 2010년 4월 현재 반올림이 알고 있는 삼성반도체 림프조혈기계 암 피해 노동자 수는 최소 26명, 이 중 사망자는 최소 10명으로 늘었습니다. 반도체 뿐 아니라 LCD 등 삼성전자 다른 계열의 노동자들, 그리고 뇌종양, 유방암, 피부암 등 다른 종류의 암 피해 제보까지 합치면 그 수는 더 많습니다.

 
 

 


아마도 지연 씨가 그 동안 소위 주요 언론의 무관심 혹은 ‘삼성 눈치보기’ 때문에 반올림의 투쟁을 알리거나 피해 노동자들을 찾아내는데 몹시 어려움을 겪어왔던 우리를 위해 힘을 불어넣어 주고 갔나 봅니다. 3년 전, 백혈병에 걸려 스물 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황유미 씨가 반올림을 결성하는 계기를 만들었듯이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몸의 고통은 어찌 덜 길이 없었지만, 가난한 부모님에게 치료비와 생계비 부담을 안겨드려야 하는 마음의 고통만은 덜어줄 수 있었을 텐데. 생전에 산재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힘차게 싸워 이기지 못해서 미안하고, ‘암에 걸릴 만큼 충분히’ 발암물질에 노출되었다는 것을 입증하지 않는 한 보상받을 수 없는 이 따위 산재보험 제도밖에는 마련해두지 못해서 부끄럽습니다. 이미 몇 년 전에 사라졌거나 변해버린 공정에서, 회사가 내놓는 자료만을 근거로, 당사자들의 참여 요청은 철저히 묵살한 채 역학조사가 진행되는 걸 막지 못해 미안합니다. 이런 식으로라면 삼성반도체 백혈병이 아니라 그 어떤 직업성 암 피해자들도 산재보상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분합니다. 집회장과 거리에서 발품을 팔아가면서 모은 돈, 살림살이 뻔하고 자기 역시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 주머니에서 나온 천원짜리 만원짜리로 모은 우리의 후원금으로는 하루 치료비도 댈 수 없었던 우리, 살림살이가 어슷비슷한 단체들이 모여 한두 푼 분담금을 모아야 하는 처지라 유인물를 5천 장 찍을까 3천 장 찍을까 고민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가 분합니다. 그에 비해 산재 신청만 포기하면 치료비를 다 대주겠다고 큰소리 치고, 하루 아침에 기자 여든 명을 불러다가 ‘공장 투어’를 시키며 백혈병 논란을 잠재우겠다고 설치는 삼성전자의 부당한 권세가 분합니다.

 

분한 건 또 있습니다. 디지털 강국이라는 껍데기를 벗겨놓고 보니 이미 미국 실리콘밸리의 IBM 공장에서, 영국 그리녹의 내셔널반도체 공장에서, 대만의 RCA 공장에서 수백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암에 걸리고 유산과 불임으로 고통받아왔던 역사를 21세기 이 땅에서 그대로 되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분합니다. 직업병과 환경오염 문제, 노동권을 탄압하는 무노조 정책은 어느 나라 출신이건 전자산업 자본들 모두의 문제였는데, 어느 하나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규제가 적은 아시아 개도국으로 옮겨온 것이더군요.

 

그럴 때마다 되새깁니다. 정당한 산재보상을 통해 생존권을 보장받는 일,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삼성에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세우는 일, 그리고 이런 고통의 역사를 세계화해온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일이 바로 반올림 활동 목표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리고 미안하고 부끄럽고 분한 마음들을 꼬옥 끌어안습니다. 그 마음이야말로 사람다운 마음이니까요.

 

2010년 5월 18일은 박지연 씨의 49재입니다. 죽은 이가 더 나은 세상에 갈 수 있도록 기원하는 것이 49재라고 하더군요. 지연 씨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더 나은 세상이란, 건강하고 안전한 일터에서 노동자들이 자기 권리를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는 세상, 혹시라도 병들거나 다쳐도 가난과 질병의 고통을 개인에게 떠넘기지 않고 사회가 충분한 돌봄을 제공하는 세상, 극소수의 자본가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지 않고 뭇 사람들이 평등한 관계 속에 자유로운 세상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직업병으로 죽어간 노동자들을 진정으로 추모하는 일, 그들의 죽음 앞에 사람으로 마주하는 일, 바로 지금 살아있는 이들이 힘을 모아 싸우는 것 말고 뭐가 또 있을까요. 그래서 반올림은 다시 한번 외치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위한 추모! 산 자를 위한 투쟁!”

 

 

 <반올림에 힘을 보태는 방법>

1. 삼성의 책임을 촉구하는 국제청원운동에 참여하기 (it.nodong.net/petition)

2. 반올림 카페에 응원글 남기기 (cafe.daum.net/samsunglabor)

3. ‘사진 한 장의 연대’ 참여하기 (자세한 내용은 카페 참조)

4. 피해 노동자들을 위한 헌혈증, 치료비 모금에 참여하기 (피해노동자 후원 계좌 : 489701-01-472635 국민은행 김재천(삼성반도체대책위))

5. 반올림 활동 후원하기 (반올림 투쟁기금 계좌 : 489701-01-479168 국민은행 김재천(삼성반도체대책위))

6. 반올림 투쟁과 반도체/전자산업 노동권 문제에 대한 책 읽기 ; “Challenging the Chip-세계전자산업의 노동권과 환경정의”(메이데이출판사), “삼성반도체와 백혈병”(삶이보이는창 출판사)

7. 여러 소모임을 통해 간담회, 강좌 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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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8 22:00 2010/09/28 2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