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5일, 서울행정법원에서는 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이 소송을 제기한 원고는 황유미(1985년생, 백혈병으로 22세에 사망)씨 등 다섯 명의 삼성반도체 혈액암 피해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었다.

 

원고 측은 노동자들의 진술과 반도체 제조 공정의 특징을 바탕으로 피해 노동자들이 과거에 일했던 작업환경에서 발암물질에 충분히 노출될 가능성이 있음을 주장했다. 또한 발암물질은 아주 낮은 농도에서도 암을 일으킬 수 있으며, 화학물질에 대한 법적 노출기준은 ‘거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현재 믿고 있는’ 농도일 뿐 직업병 발생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특히 근로복지공단이 산재 불승인의 근거로 내세우는 한국산업안전보건연구원 역학조사가 갖는 한계를 조목조목 짚고, ‘과거의 작업환경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현재 최상의 상태인 작업환경을 보고 판단할 수는 없음을 강조했다.

 

실제로 지금까지 백혈병 산재소송에서 법원의 판결들은 역학조사 결과에 의존하지 않았고, 벤젠과 방사선 뿐 아니라 혈액암의 유발물질을 폭넓게 인정하였으며, 노출기준 이하의 농도나 1년 미만의 짧은 노출기간에서도 암이 발생할 수 있다고 판단해왔다. 특히 벤젠 등 대표적인 백혈병 유발물질에 노출되었다는 공식적인 근거가 없더라도 간접적 사실들을 바탕으로 업무기인성을 추정하여 인정해왔다.

 

한편 이 소송의 피고는 이 노동자들에게 산재 불승인을 결정한 근로복지공단이었지만, 실제 재판정에서 피고 측 주장을 펼친 이는  ‘피고 측 보조 참가인’ 삼성이 고용한 법무법인 율촌의 변호사들이었다.

 

삼성 측의 주장은 ‘피해 노동자들은 화학물질을 다루지 않았다’, ‘화학물질을 취급한 경우에도 발암물질은 전혀 없었고, 노출 가능성도 낮다’라고 주장했다. 공기가 천정에서 바닥으로 흘러가는 ‘탑 다운’ 방식의 환기가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보여주는 시뮬레이션 실험까지 실시하여 동영상으로 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현재 갖추어진 최신 설비들에 대한 것일 뿐, 피해 노동자들이 일했던 과거의 작업환경과는 무관한 자료였다. 심지어 삼성 측은 피해 노동자들이 일하던 공정이라며 그들이 실제로 일했던 구식 수동 설비가 아니라 최신식 자동화 설비를 동영상으로 틀기도 했다. 재판과 직접 관계되지도 않은 자료들을 반복하여 보여줌으로써 최상의 작업환경을 재판부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삼성 측의 의도에 피해 노동자들과 가족들은 어이없는 탄식을 참을 수 없었다.

 

끝으로 삼성 측은 클린룸 종사자들에게 암 위험이 증가하지 않았다는 미국 벤더벨트 대학의 최근 역학조사 결과를 보여주면서, 2008년에 이루어진 한국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 결과와도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이 역학조사는 삼성반도체를 포함하여 미국에 공장을 두고 있는 기업들의 조직인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에서 750만 달러의 연구비를 지원하여 수행한 연구였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는 1980년대부터 반도체 노동자들의 유산, 불임, 암에 대한 연구들을 지원해왔으며, 이 연구들은 대개 ‘아무 문제가 없다’, ‘정확한 결과를 얻으려면 장기간에 걸친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라며 기업 측에 유리한 결론을 내려왔다.

 

12월 27일에 열릴 다음 공판에서는 삼성반도체 전직 노동자들이 증인으로 출석하여 사실관계를 증언할 예정이다. 또한 재판부는 삼성반도체 기흥, 온양 공장을 방문하여 현장 검증을 실시하고, 내년 1월 경에는 산업의학 전문의들을 증인으로 세워 인과관계를 심문하기로 했다.

 


 

<노동자가 만드는 일터> 2010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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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4 23:03 2011/01/04 2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