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

from 콩구르기 2012/08/28 08:55

르귄은 이야기꾼이다. 그녀는 이야기 만드는 걸 즐긴다. 그걸 엿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집에 가서 어스시 전집 5권을 들고 왔다. 피로에 지쳐 오직 눕고싶은 생각만 드는 밤이면, 자리에 누워서 이 책을 펼친다. 잠에 떨어지기 직전까지, 조금씩 조금씩 읽으면, 작가의 즐거움이 전해져 나도 즐겁다.

 

5권 "어스시의 이야기들"은 어스시 이야기를 해나가던 작가가 잠시 부연설명을 하듯 쓴 짧은 글들의 모음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테하누(어스시전집 4권)>가 출판되고 칠판 년 후에 어스시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써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그 장소에 눈길을 주자마자 내가 그곳을 보고 있지 않던 동안 거기에선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역사를 파고들어 볼 필요가 있었다. (...) 존재하지 않는 역사를 조사하는 그 방식은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내며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 존재한 일이 없는 세계, 처음부터 끝까지 허구인 역사를 건축하고 재건할 때 조사의 순서는 다소 달라지지만 기본적인 추진력과 기법은 거의 똑같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이해하려고 한다. 그곳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지켜본다. 그에 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고, 정직하게 이야기하려고 애쓴다. 그러면 그 이야기가 무게를 갖게 되고 사리에 맞게 된다."

 

르귄은 이런 작가다. 이야기를 만든다기 보다는, 자기가 만든 이야기를 관찰하고 기록한다. 이런 머리말을 통해 르귄은 나 또한 "어스시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지?"라는 궁금증을 갖도록 이끈다. 즐겁다. "어스시의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 작가의 머리말이다.

 

머리말 뒷 부분에 르귄은 판타지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현실을 꼬집는다. 

"판타지는 기능성 상품이 되었고, 하나의 사업이 되었다. 기능화된 판타지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 아무것도 창안해 내지 않는다. 원래 것을 베껴서 하찮게 만들 따름이다. 그것은 지적이고 이국적인 복잡성을 지닌 옛이야기들을 강탈하여 전개해 나가며, 그 이야기들 속의 행동들을 폭력으로 바꾸고, 배우들을 인형으로, 그 이야기가 말하는 진실된 말들을 감상적인 상투어구로 바꿔 놓는다. 주인공들은 그들의 검이나 광선검, 마술 지팡이를 추수용 수확기처럼 기계적으로 휘둘러 대어 돈다발을 베어 들인다. 심원한 고뇌를 동반한 도덕적 선택은 삭제되어, 이야기는 귀엽고 안전해진다."

 

무지하게 꼬집는구나. 르귄 할머니가 어스시를 들여다보고 어스시 사람들의 말에 귀기울이는 장면은 쉽게 상상이 가지만, 이런 글을 쓸 때의 모습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르귄 할머니... 가까이 살았으면 친구먹자고 들이댔을텐데 ㅎㅎ.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2/08/28 08:55 2012/08/28 08: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