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10

from 콩구르기 2013/02/10 23:31

1. 강물같이 흐르라는 정의는 안흐르고, 콧물이 비처럼 흐르니 이를 어쩌랴. 나가야할 보고서 진도는 안나가고 사흘째 감기몸살 진도만 쭉쭉 나가니 이를 어쩌랴. 일할 시간은 하루밖에 안남았고 밤을 새도 모자랄 판에 잠만 쏟아지니 이를 또 어쩌랴.

 

2. 결국 이 밤중에 타이레놀 털어넣고 오래전에 사두었던 기침가래약을 삼켰다. 정작 이번 주증상은 비오듯 흐르는 콧물과 비강 속 통증이지만, 뭐 어쨌든 상관없어. 일 좀 할 수 있게 해준다면.

 

3. 감기 앓은지 꽤 된 것 같은데. 안정을 찾아가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니 몸도 와르르 무너지는 건가.

 

4. 미움이다. 뒤늦게나마 애써 쌓아온 무언가를 와르르 무너뜨려버린 그 이기성이 밉다. 술먹고 기분좋을 땐 사랑한다 말하고, 제 심사 뒤틀릴 땐 화풀이해대는, 그 몇십년간의 폭력과 일방성도 서서히 용서해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렇게 황당하게 허물어지다니. 가슴 깊이 미움을 안고 사는 건 참 고되다. 기를 쓰고 그 고됨을 벗어나려 애썼건만. 그걸 이렇게 허무하게 짓밟다니.

 

5. 그나마 불지옥 속 냉수 한모금 같은 게 있다면, 이번에 처음으로 내 속의  아이가 목소리를 냈다는 거다. 무슨 얘기를 듣고 싶은 거냐, 내가 뭘 어떻게 해야 그만하겠냐, 이렇게 계속하면 나는 죽을 것만 같다, 제발 그만해달라... 이십오년만에 처음인건가.

 

6. 밤새 흐느끼는 나를 달래던 엄마가 신기한 얘기를 했다. 그만 울어라. 네가 그렇게 울면 엄마는 어쩌니. 엄마는 매일 보고 사는데.

 

7. 하하. 그러니까 너보다 내가 더 불행하니 그만 울라는 말씀. 하하. 그래서 제가 몇년간 방패막이 해드렸잖아요. 하하. 지금 나를 돌보러 오신 건가요, 불똥 튈 게 싫어서 제 방으로 피신하신 건가요. 이렇게 울던 수백번의 밤들이 있었다는 걸 당신도 몰랐다면서요. 이십오년만에 처음 보시는 거잖아요. 

 

8. 그게 서러워서 또 울고. 앞으로 또 나를 그렇게 쓰고싶어하는 느낌에 또 울고. 노랫말처럼, 왜 슬픈 예감은 틀린적이 없나. 다음날부터 하루가 멀다하고. 그 자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얼굴이라도 비추러 오라는 연락을. 급기야 감기몸살에 열도 난다 하는데, 그게 뭐 대수랴 하는 태도로.

 

9. 복종이 골수까지 배어있어서인지, 그처럼 힘들어하면서도 난 또 쿨하게 그게 뭐 어려운 일이랴, 한두번 해본 일도 아닌데, 이런 생각으로 결국 쭐래쭐래. 도착해 마주친 순간 후회했다. 못되게 구는 건 하나도 다르지 않은데 '그래도 난 널 사랑한다'고 어필하고픈건지 내내 비맞은 강아지 표정을 하고있는 그 모습이, 그래도 감추어지지 않는 잔인함이, 아, 딱 구역질났다.

 

10. 그러니까 이건 어디 통속소설이나 막장 드라마에 나옴직한 흔하디 흔한 상황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기며 나를 위안하는 수 밖에. 이런 흔하디 흔한 일 때문에 정말 죽어버리면 인생이 심하게 아까우니, 어찌되었건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11. 공연히 평화를 가장하여 무럭무럭 자라나는 원망과 미움을 방치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멀리 떨어져 내 영혼이라도 지키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 쓰라린 가시투성이 함정에서 이십년을 울다가 간신히 한 발 빠져나왔는데, 저 안에서 내 발목을 꼬옥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면 발목을 자르고라도 도망가는게 낫지 않겠나. 일주일에 일곱번을 울며 살 순 없다.

 

12. 운다. 피부를 얇게 저민 듯 쓰리다. 어떻게 이 상황을 끝낼 수 있을지 답이 없다는 절망감. 애써 기어나온 함정에서 한참 걸어나왔지만 결국 다시 이십여년 전의 지옥으로 돌아왔다는 그 기막힘. 어떻게든 죽지 않고 견딜지라도 혹시 내 속에 흐르는 저 괴물의 피가 나를 저렇게 만드는 건 아닌가 하는 그 공포. 자존감도 자긍심도 모조리 허물어버리는 이 깊은 절망을, 간절히 벗어나고 싶어서 운다. 살고 싶어서,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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