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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을 것과 잃을 것

  2005년 첫 사업장 방문을 했다. 두 개의 일정가운데 하나는 사업장 사정으로 취소. 정확하게 말하면 내 사정으로 연기되었다가 최소된 것이다. 내 사정이란 공공기관의 국가 설문조사 자문회의 참석. 그런 일정은 사업장 방문일정보다 나중에 통보받기 마련이다.  그런 자리에 가는 것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사업장 방문일정까지 연기해가며 나름대로 책임감을 가지고 참여한 이유는



내가 최근에 나랏돈을 받아 유사한 조사를 했었기 때문에 그 경험과 교훈을 나누어야 하며, 성인지적 관점이 결여된 산업보건 관련 통계의 개선을 촉구할 의무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회의에 참석해서 내가 얻는 것은 내 의견을 피력할 기회(내 의견이 받아들여진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란 점에 유의할 것), 최신 고급정보, 동종 업계 종사자들과의 친목도모이다. 내가 잃는 것은 시간, 감정노동에 쓰이는 에너지, 현장감각이다. 

 

  살아오면서 얻을 것과 잃을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내가 2년전 이 병원에 와서 우리 과 과장이 되는데 우선권이 있지만 하지 않은 것이 그렇다. 나는 여러가지 이유에서 그것을 포기했지만 대신에 내 입장에서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관리'노동을 하지 않을 자유와 소중한 시간, 그리고 '우정'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재의 과장은 나의 오래된 친구이다. 내가 잃은 것은 권력, 과장업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관리자로서의 자기발전의 기회, 산업보건에 대한 시야를 넓힐 수 있는 지역사회 활동의 기회 등등이다. 그렇다고 내가 과장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조직의 관리에는 남다른 자질이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얼마전 상당히 큰 규모의 코호트 연구를 지속할 기회를 사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내가 그것을 했을 때 얻?수 있는 상당히 가치있는 결과를 포기 또는 유보시킨 가장 큰 이유는 객관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에 휘둘려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자기 페이스를 잘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2004년의 내 경험은 일주일에 삼사일은 사업장에 나가는 병원업무를 하면서 세 개의 연구 프로젝트를 하는 것은 무모하다는 것을 가르쳤다.  특히 적절한 연구인력이 부족한 시골 대학에서 국민의 세금으로 형성된 연구비를 받는 두 개의 프로젝트와 사업장에서 연구비를 받은 작은 프로젝트의 연구책임자로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더군다나 나는 이 모든 것에 올인할 수 없다. 내가 돌보아야 할 8세, 6세의 어린 아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를 저버릴 수 없다.

 

 오늘 사업장 건강상담에서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내상과염과 손의 (아마도 퇴행성 관절염을 동반했을) 비특이적인 통증에 대한 온전한 치료를 위해서는 작업을 중단하고 적절한 물리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아주머니는 용역업체 소속이었는데 '의료보험도 안되고 신고나 하고 영업하는지 의심스러운' 회사이므로 산재같은 건 안될것이라고 말했다. 산재보험가입이 안되어 있는 사업장도 환자가 발생한 순간부터 소급해서 돈을 내서 하면 된다고 알려주고 명함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그 작업자가 얻을 것과 잃을 것을 정리해서 알려주었다.  "노동조합도 없이 단독으로 산재신청을 하게 되면 겪을 고난이 있지만 산재를 하게되면 3개월 통상임금의 70%와 치료비를 받고 약 두 달간 쉬면서 치료를 받을 수 있고 당분간 해고되지 않는다. 산재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경우는 모든 것을 다 잃을 수도 있다." 휴, 조직이 없는 비정규직 여성 고령 노동자가 산재신청을 한다는 것은 80년대 비합전위조직에 가입하는 것 만큼의 비장한 각오와 결의가 필요한 세상인 것이다.  이런 경우 산재신청을 할 수 있는 조건은 회사를 그만둘 수 밖에 없는 상황과 이런 아픔을 공감해줄 지지자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 분한테 산재신청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할 수 없다. 최악의 경우 그 작업자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효과적인 치료법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 여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또 하나 만약 그 작업자가 산재신청을 하러 나를 찾아온다면 내 의무는 아니더라도 회사측 담당자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그 결과를 낙관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건강상담을 끝내고 회사측 담당자에게 산업보건사업에 대한 노동조합의 요구도 수렴을 위해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대표성이 없으므로 만날 필요가 없다고 거절당했다. 이 회사는 약 2년전에 20여명의 조합원들이 모여 노조를 결성했고 한차례 파업도 했다. 그 뒤에 우여곡절을 겪어 위원장, 부위원장, 대의원 한명 이렇게 셋만 남고 나머지는 탈퇴했다고 한다. 떠난 자들도 남은 자들도 각각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노조측 인사를 만나겠다고 고집을 피우지 않는다. 마음같아서야 단 세명이 남아 조합을 지키는 사람들을 만나서 손이라도 잡고 힘내시라고 말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세 사람 모두 외부현장근무중이므로 더 이야기하기가 곤란하다. 나는 늘 이런 상황에서 갈등을 한다. 내가 더 강력하게 요구해야 하는 게 아닐까? 무엇을 위해서? 내가 마음편하자고? 그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일까? 등등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 것인가를 판단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은 언제나 선택을 강제하며, 얻을 것과 잃을 것을 명확히 하는 일은 행복해지는데 중요한 삶의 기술이다.  다가지려고 하면 불행해지니까.  나는 얻은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격려하고  잃은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 그 두가지를 구분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이렇게 쓰면 내가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인생을 선택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 처럼 생각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적을 수록 어쩔 수 없이 잃을 것만 더 많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특히 물질적인 측면에서. 위에서 언급한 아주머니의 경우가 그러한 예이다.  그걸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나? 그러니까 나의 선택이론은 가능한 경우에만 적용되는 것임을 밝혀둔다. 때로 선택의 자유조자 없는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첨언하는 것이다. 

 

 요즘 나의 '선택이론'에 새로운 탐구과제가 추가되었다. 

얻을 것과 잃을 것을 구분하는 것이 '계산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흔히 계산적이라는 말이 나쁜 뜻으로 쓰이지만 ...... 자신이 얻을 것과 잃을 것을 제대로 계산하지 못하고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식으로 지내다가 어려운 상황이 되면 불행해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오히려 나는 자신의 인생에서 소중한 것을 늘 의식하고 그것을 먼저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느낀다.  선택의 여지가 있는 상황에서 마땅히 얻을만한 것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면 진실하지 못하거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또 한가지, 개인의 선택은 어느 선까지 존중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타적인 의도라면 타인의 선택을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더 많은 고민을 해야겠지만 이타적인 의도에서의 선택이라도 자신에 대한 사랑과 타인의 선택에 대한 존중의 원칙이 지켜지지 못했을 때 오는 '지저스 컴플렉스+ 독재'의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는 오래된 깨달음에는 변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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