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각서와 외주

* 이 글은 뻐꾸기님의 [알 권리와 일할 권리] 에 관련된 글입니다. 그리고 님의 [직업병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옮겨질 뿐 ]에도 약간 관련된 글입니다) (시끄러운 곳에서 말을 많이 해서 목이 아팠던 금요일에 시간이 부족해 쓰다만 이야기를 다시 이어서 썼음)

   노말헥산에 의한 말초신경병증(앉은뱅이병) 집단 발생 사건을 계기로 사업장의 화학물질관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동안 우리 병원도  사업장 화학물질관리를 좀 신경써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질적인 활동이 부족하여 찜찜했었다. 그래서 어제 우리 팀 회식을 하면서 보이지 않은 곳까지 구석구석 잘 들여다보자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소기업에서도 유해한 공정은 주로 외주를 주거나 이주노동자에게 맡기는 경향이 있어, 보건관리대행을 하는 전문가들의 입장에서 원청에서 보여주지 않으면 접근하기가 더 어렵다. 또 두시간 이내의 짧은 방문에서 계약당사자인 원청에 관한 사항도 다 처리하지 못할 때가 많아 사내하청업체에 대해서 자꾸 미루게 되기도 한다.

 

  오늘 방문한 **전기. 

현장으로 들어가려는데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나를 보더니 "썬그라스 좀 벗으세요" 하며 친한 척을 한다. 지난번에 코일이 너무 무거워 허리가 아프다고 하여 한참 동안 이야기했던 친구이다. 2단 적재하던 코일을 1단 적재만 하라고 권고했는데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보니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옆에 있던 담당자가 펄쩍 뛰며 그거 1단적재해서  납품하도록 하기 위해서 관리과랑 하청업체랑 애많이 쓴 거라고 하자 일시적으로 그런 건지 앞으로도 계속 1단으로 들어오는 건지 몰라서 그랬다며 씨익 웃었다. 사실 이런 거 하나 처리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담당자가 협조전을 관리과로 보내고 관리과가 하청업체에 공문보내고 1단 적재시 물류비용증가에 대해 대책세우고.. 등등.  담당자가 얼마나 성의를 가지느냐도 중요하다. 이 담당자는 현장출신이어서 내용을 잘 알고 있고 성의가 있는 편이다.  

 

2단에 있는 중량물을 내릴 때 허리에 부담이 된다고 하여 남품업체에 1단적재해서 보내주도록 요구함. 작업빈도가 높지 않아서 공학적인 개선은 비용효과적 측면에서 검토하지 않음

 

  현장으로 들어서면서 담당자가 다른 사업장은 개선을 많이 하냐고 물으면서 이것 저것 노력은 했는데 큰 변화가 없다며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1단적재로 바꾼 것도 큰 일이었을 것이라며 우리도 작업개선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고 격려했다. 그러면서 우리 과의 대표적인 작업개선사례인 미는 가방을 보여주었다. 사실 이 가방을 간호사 모두에게 지급하는데도 수개월이 걸렸다.

간호사들의 가방이 무거워서 미는 큰 가방과 메는 작은 가방으로 바꾸었음. 마음착한 담당자가 큰 가방을 들어주는 모습임. 이 가방안에 혈압계, 혈당계, 채혈도구, 체지방계, 보건교육자료 등등이 잔뜩 들어있음. 

 

  언제나 어깨와 손목이 아픈 제품검사작업부터 돌아보았다.(위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부스안에서 작업함). 의자를 보다 편한 것으로 교체하기 위해 테스트용을 지급했다고 하면서 담당자가 문을 열었는데 웬 걸 작업자는 옛날 의자에 앉아 있다. 새 의자가 팔이 덜 아파서 좋기는 하지만 작업대가 여전히 낮아 새 의자에 앉으면 허벅지가 눌리고 자주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새 의자에 바퀴가 없어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래 사진 뒤에 있는 게 팔걸이에 높이조절가능한 새 의자이고 작업자가 앉은 의자를 자세히 보면 밑에 파란색으로 방석같은 것을 깔아서 의자 높이를 높힌 것이 보임). 담당자는 작업대 높이를 올리고 새 의자에 바퀴를 다는 문제를 빨리 해결하겠다고 했다.

 

  담당자는 이 '아줌마 노동자'들에 대해서 잘 해주려고 애쓰고 있다. 계약직이라 아프다고 하면 해고되는 상황을 진심으로 마음아파 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려고 한다. 의자교체에 대해서 품위를 올린 게 승인이 나지 않자 다른 명목을 돌려서 사용하려고 한다고 했다. 회사는 의자교체는 간단할 것 같지만 실제 작업자들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기 어렵다는 것은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알기 때문에 돈들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부스에서 손목이 심하게 아프고 저린 아주머니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물어보니

아대라도 원활하게 공급되면 좋겠단다. 수근관 증후군이 의심되는 증상도 있어 손목부목과 아대를 지급하도록 권고했다.  치료같은 건 바라지도 않고 자신이 아프다는 것도 회사측에 알리지 말아달라고 하면서 들어올 때 아픈 것을 감수하겠다는 각서를 썼다고 하며 서글프게 웃으신다. '그런 각서같은 건 법적인 효력이 없어요, 더 아프면 저희한테 다시 이야기하세요"하고 부스 문을 닫는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현장 휴게실에서 고혈압, 당뇨병 등등 건강진단 결과 요관찰자 상담을 마치고 지난 번 본딩작업의 물질안전보건자료를 확보했는가를 물어보니 담당자가 머리를 긁적 긁적. " 납품업체에 요청은 했는데..... "  제대로된 물질안전보건자료를 받으려면 여기 저기 전화를 수십통을 돌리는 일이 흔하다. 담당자는 국소배기시설을 개선하기 위해서 품위는 올린 상태라고 하면서 개선안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그 때 본딩작업자가 나타나서 정답은 자동화라고 한 사람 인건비로 그 비용 부담하면 된다고 역설을 했다. 작업자의 두통은 여전하다.

국소배기시설 개선안에 대해서 의논하는 모습,

작업개선은 이론만으로 되지 않으며 작업자의 의견이 반영되는 것이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다. 그런데 토론과정에서 누군가가 "야 그럼 이거 외주주면 되잖아"하는 말이 내 마음 한 자락을 날카롭게 베면서 스쳐갔다.  

 

  그렇게 작업장을 돌아보는데 노조 부지회장이 나타나서 혈압을 재달란다. 평소 우리를 보면 인사도 안할 뿐 아니라 상담하는 작업자들한테 이런 거 소용없으니 아프면 산재하라고 떠들기도 하는 자라 마음에는 안 든다. 부지회장은 우리더러 제대로 하고 있는 거냐고 요즘 앉은뱅이병때문에 난리인데 우리 현장의 파우더나 세척제 관리는 잘 되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 때부터 담당자와 부지회장은 옥신각신. 이번에 회사에서 노조를 무시하고 산업안전보건위원회를 구성한 건 등등. 결국 부지회장이 제기한 파우더 문제부터 확인해보자고 하여 같이 그 공정에 가 보았다. 

 

  그 공정에서 사용되는 파우더의 성분을 알기 위해 물질안전보건자료를 보여달라고 했더니 담당자가 사무실에서 찾으러 갔다. 그동안 작업자, 부지회장으로 부터 이 작업의 문제점을 들었다. 이 공정은 아크릴로 밀폐시켜서 일상적인 작업에서 파우더에 노출되는 양은 지극히 적으나 하루 15분 청소를 하거나 에러가 났을 때 가루가 심하게 날린다고 한다. 3년간 이 작업을 했던 노동자는 특별한 증상은 없으나 만성 노출시 문제가 발생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고 그래서 작년에 특수건강진단때 폐기능검사를 받아보았는데 정상이었다.

  

  부지회장은 이년전에 이 파우더가 상당히 유독하다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들었고 그래서 우리 병원에 성분분석을 의뢰했으나 지금까지 답이 없다는 것이다. 이야기도중 물질안전보건자료가 기계앞에 붙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읽어보았다. 대여섯가지 물질이 있었으나 만성 독성을 가진다고 알려진 것은 없어 그렇게 설명했으나 부지회장과 작업자는 믿기 어렵다는 반응. 그 자료가 96년에 작성된 것이니 최근 자료를 다시 납품업체에 받기로 하고 다음번 방문때 화학물질 관리에 대한 교육을 하면서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나중에 우리 산업위생사에게 확인해보니 노조의 문제제기이후 이 파우더를 가져다가 분석했고 유해성분이 없다는 사실을 사측에 통보했지만 사측이 노측에 알려주지 않은 것이었다. 이런 문제는 사측뿐 아니라 노측, 그리고 해당 작업자에게 정확하게 알려주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부지회장은 '이거 괜찮은 거면 외주 안 주어도 되겠네, 외주 안 줄꺼지?" 하고 담당자에게 말한 뒤 우리한테는 또 인사도 안 하고 사라졌다. 조직률이 25%밖에 안되어 번번히 회사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는 그에게 '외주'생산은 곧 조합원 수의 감소를 의미하기 때문에 민감한 문제일 것이다. 그는  우리 팀에도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그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볼 때마다 노골적인 적대감을 접하니까 안 그러려고 해도 나도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된다. 

장비에 붙어 있는 물질안전보건자료.

담당자는 이 자료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으니 자체적으로 화학물질 안전카드 형식으로 만들어 하나 더 부착할 예정이라고 했다. 다른 담당자들도 이 사람 정도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음은 세척공정 확인. 외주 업체가 들어와 있고 10여명 정도 된다.

방문때 마다 한 번 들여다보아야지 하면서도 시간이 부족해서 다음으로 미루었던 공정이다.


 

사진에 보이는 기계가 세척기계이고 물질안전보건자료와 카드가 잘 붙어 있다.  세척시에는 뚜껑이 닫혀서 노출을 감소시키도록 해 놓았지만 국소배기시설이 없었다. 작업자에게 TCE 노출 증상이 있는 지, 일하면서 무엇이 문제라고 느끼는지 물어보자 이 기계에서 나는 냄새는 아무것도 아니고 이 다음에 손으로 하는 2차 세척때 냄새때문에 힘들다고 했다.

 

 

사진에 보이는 노란 통에 TCE가 담겨있고 여기에 제품을 담가 씻는다. 여기에도 어떤 국소배기시설도 없다. 다행히 장갑은 유기용제용으로 제대로 끼고 있었지만 천마스크를 쓰고 있어 호흡용 마스크의 종류에 대해 설명하고 유기용제용을 써야 한다고 말했지만 힘들어서 못쓴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가능한 한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겨울에라도 쓰자고 했지만 그런 말은 약발이 먹힐 수가 없다. 이 작업자의 특수검진 결과를 확인하자고 했더니 3년째 특수건강진단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외주업체 관리자와 긴 이야기를 시작. 대화도중 틈틈히 원청 담당자 눈치를 보는 그가 안쓰럽다. 근본적인 대책은 환기시설을 잘 하는 것인데 없어질 공정이란다. 그 놈의 없어질 공정은 왜 그리도 많은 지, 그런데 진짜 없어지기는 하는 것인지 휴~. 이 공장에선 없어지더라도 어디선가에선 또 하겠지.


  각서를 쓴 계약직 노동자들에게나 환기시설없이 TCE 작업을 하는 사내 하청 노동자들, 우리가 일하면서 놓치기 쉬는 사람들이다. 일상적인 업무속에서 잊혀지기도 하지만 보건관리대행 계약인원 외의 인원에 대해서 성의를 가진다는 게 접근성의 측면이나 업무량 배분의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 (보건관리대행은 인원당 서비스 비용을 산정하는데 사내 하청 및 계약직은 포함안되는 경우가 많음).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 팀 원들과 좀 더 이야기 해보아야 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