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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만에 처음

오늘은 7시30분에 출발했다.

요즘들어 건강이 썩 좋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웬만하면 아침 일찍 방문일정을 잡지 않고 있다.

그런 내가 아침에 일정을 잡은 이유는 이 사업장이 워낙 보건관리가 잘 안되는 편이기 때문이다.  의사방문시 보건교육을 하자고 몇 번 말했지만 이 핑계 저 핑계대고 안 하더니 지난 번 방문때는 '우린 아침 일찍 밖에 못해요' 하길래 "좋다, 하자" 이렇게 대답했던 것.  참고로 안전보건교육은 산업안전보건법에 생산직 월2시간, 사무직 월1시간을 하도록 규정되어 있지만 시간이 곧 돈이기 때문에 교육 한 번 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 회사와 우리 병원의 관계는 썩 매끄럽지 못하다. 시작부터 노동조합이 요구해서 마지못해 산업보건기관을 바꾸었다고 하고, 지난 1년 내내 사건 연발이었으니.  그래도 늦게라도 보건교육을 하는 게 어디랴 싶어서 어렵게 자리를 마련하신 회사측에 감사드린다 어쩌구 하면서 교육을 시작했다.

 

  오늘의 주제는  '소음성 난청 예방'  

많이들 하는 교육이라 듣는 사람 입장에서 식상할 수 있는 주제이다.  특히 회사설립도, 노동조합 설립도 상당히 오래된 편이며 노동자들의 평균연령은 45세쯤 되는 사업장이라면. 

그래서 "여러분들 소음성 난청 예방 교육은 몇 번 정도는 받아보셨지요?" 하고 물었는데, 사람들이 일제이 고개를 흔들어 깜짝 놀랐다. 맨 앞줄에 앉은 이가 손을 번쩍 들더니 20년동안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휴~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하긴 이 사업장은 지난 번 특수건강진단을 할 때도 소음에 대한 특수건강진단 대상자 선정문제로 우리 병원측과 옥신각신했었다.  법에는 사업주가 보건관리자의 의견을 들어 선정하도록 하고 있고, 보통 작업환경측정치가 8시간 평균 85데시벨 이상이면 필수적으로 하고 있는데 이 사업장은 일부 부서만 검진을 하겠다고 우겼던 것.  알고 보니 얼마하지 않는 특검비용보다 단체협약에 규정된 유해수당(특검대상자에 지급)이 감당이 안되어서 그렇다는 것이 회사측의 설명이다.  물론 요즘에는 작업장 건강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어서 그런 회사가 줄어들었다고 하나 도대체 건강과 수당을 바꿀 수 있다는 발상은 정말 심각한 문제이다(좀 심하게 말하면 예방을 위한 적극적 조치는 안하고 돈으로 때우려는 것에 다름아니다.)

 

  그래서 지난 번 검진 당일 생쑈가 벌어졌다. 우리 병원 검진책임의사는 소문난 원칙주의자이고 불도저 타입.  끝내 회사측과 협의가 안되자 이 선생님은 검진 당일 사람들이 줄 서 있는 데로 가더니 "소음에 노출되는 사람 손드세요" 한다.  그리고는 담당자를 붙들고 이번엔 돈 안받아도 좋으니 검사를 꼭 해야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 결과 20년간 한번도 청력검사를 해본 적이 없던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검사를 받았고 거기서 많은 사람들이 소음성 난청 초기 소견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 작업장의 소음수준은 100 데시벨 가까이 되어 정말 심각하지만 공학적인 개선방법은 이 공장을 지은 비용의 80배가 든다는 계산이 나와서 회사로서는 감당할 수 없다고 한다. 70년대 화폐가치와 2000년대 화폐가치를 비교한 것으로 과장이 심하긴 하지만 우리도 공학적 개선을 주장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 돈을 들이더라도 5데시벨이상의 소음감소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공정이기 때문이다. 공학적 개선이 불가능하다면 노출시간을 줄여야 한다. 그런데 사업주가 이를 꼭 지켜야 할 의무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끙~

 

   20년만에 처음 들어보는 소음성 난청 예방교육이라 그런지 조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보통 보건교육을 하면 아무리 잘해도 20-30%정도는 존다. 왜? 피곤하니까. 

   다양한 질문도 쏟아져나왔고, 교육이 끝난 뒤 개인적인 문제를 상담하는 사람도 몇 분 있었다. 질문자 중에는 '왜 이런 이야기를 이제야 하는가?', ' 예방대책이 비현실적이다' 이렇게 화를 내시는 분들도 있었다.  그래도 사업장 보건교육에서 이 정도의 반응이면 큰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업장을 나서는 마음이 가벼울 수만은 없었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작업조건이 건강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알 권리, 그 너무도 당연한,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이다지도 어렵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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