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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설악산에서 있었던 일

  산업의학회에 다녀왔다. 이번 산업의학회에서는 ‘작업관련 근골격계질환 적정요양기간 연구’ 발표 심포지움이 있었는데, 행사장에는 두 장의 유인물이 뿌려졌고 긴장이 감돌았다.

  민주노총, 노동보건단체, 민주노동당은 ' 이 연구결과가 현행 산재요양제도의 문제를 구조적으로 고착시키는 심각한 결과를 낳을 것이므로' 이 연구발표를 철회할 것을 촉구했고, ‘노동자건강을 생각하는 양심적 산업의학 전문의 일동’은 ‘우리 손으로 재해노동자를 억압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이 연구는 우리 손으로 폐기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심포지움이 시작하기 전에 뿌려진 유인물을 여러 번 읽어보았다. 두 유인물에서 지적하는 핵심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으로 어렵게 산재를 받고나서도 제대로 된 치료를 못 받은 환자들이 강제요양종결로 고통 받는 현실에 눈을 감고, 산업의학자들이 ‘적정요양시간’을 산정하여 눈앞의 비용손실을 줄이려는 미봉책을 만드는 일에 기여하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저버리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산재환자들이 작업장으로 복귀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문제, 작업환경개선과 노동강도의 완화를 위해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옳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연구결과를 발표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하는 것은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학자는 연구결과를 발표할 권리가 있고, 학술대회장에서 토론하고 검증하면 되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연구는 한 조선회사가 근골격계 산재 환자의 요양기간에 대한 조정을 하기 위하여 노사합의하에 그 지역의 주요 대학에 의뢰하여 시작되었고, 연구비는 2억 5천만원정도로 알려졌다. 연구진들은 산업의학회의 내노라하는(?) 중견 연구자들로 ‘국가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연구이고, 누군가는 해야 할 과제라는 데 책임감을 느끼고’ 연구를 수행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연구방법은 조선소의 산재환자들의 요양기간을 조사하고 비슷한 질병의 자동차보험 및 의료보험 환자들과 비교하고, 외국의 작업 복귀 지침을 참고하여 적정요양기간을 산출하는 것이었다. 연구진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만성질환인 산재환자를 급성질환인 자보환자나 단기입원치료를 하는 의보환자와 비교하는 연구방법론은 무리한 것이었고, 질병의 중증도를 고려하지 않고 단순한 각 질병별 요양기간의 산술평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연구였다.

  이런 함량미달의 연구가 산업의학회의 심포지움에서 발표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 운영의 비민주성도 심각한 문제였다. 좌장은 연구진중 한 사람이었고, 토론자도 없었다. 원진노동환경건강연구소의 임상혁 소장이 반론기회를 요청하여 10분정도 시간을 얻었고, 조선대 이철갑 교수가 잠깐의 발언기회를 얻었을 뿐, 공정한 토론이 보장되지 않았다. 좌장은 소위 학회의 원로 몇 분과 회사측 입장을 대변하는 보건관리자에게 마이크를 넘겼는데, 산재보험재정파탄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한 원로는 이런 말을 했다. “저는 믿습니다. 우리들 중에 산업의학을 전공할 때 근로자의 건강을 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우리 편가르지 맙시다” 심포지움은 그렇게 끝났다.

  나오면서 사전에 훌륭한 반론을 준비한 임상혁 소장을 만나 인사를 하려는데 그가 화가 잔뜩 나서 묻는다. “너네들은 왜 아무말도 안하는 거야?” 우리 중의 하나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말할 기회도 없었고, 형이 할 말은 다 한 것 같아서......” (그는 학교선배이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평소에 이 주제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어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밑바닥에는 ‘누군가 말하겠지’ 하는 안일함이 있었다는 것을. 작업장에 복귀하지 못하는 산재환자들의 절박한 사정에 대한 무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나의 안일함과 무관심은  자본이 이런 연구결과를 가지고 병든 노동자들에게 휘두르는 무자비한 칼로 사용하는 것을 방관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뒤늦은 깨달음에 많이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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