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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 일하는 작업의 건강문제

   지난주부터 몸살에 눈병에 총체적 난국이었다.  겨우 출근은 했지만 아직도 눈이 빨개서 어디 돌아다닐 형편은 못된다.  아프면 흔히 이런 말을 듣는다. " 의사도 아프냐?", "몸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그모양이냐"  그런 소리 들으면 기가 팍 죽기 마련이다. 게다가 거의 일주일을  누워있었더니 일이 잔뜩 밀려있어 더욱 의기소침해졌다.  도대체 무슨 일부터 해야할 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편지함을 열어보고서 무슨일이 있어도 오늘내에 해야 할 일이 세가지가 있음을 확인하니 더 암담해진다. 그 중의 하나가 오래전에 의뢰받은 업무관련성 평가서를 작성하는 것.



사고와 달리 작업과 질병간의 인과관계가 뚜렷하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므로 산재요양신청을 할 때 그 인과관계에 대한 전문가의 판단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생긴다.  엄밀히 말해서 인간의 경험과 지식으로 한 개인이 작업때문에 어떤 질병이 발생했는지 입증해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확률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 

  "상기인은 어떠어떠한 작업을 하였고, 이 질병의 알려진 원인은 무엇무엇이 있고...... 이상에서 볼 때 상기인의 질병은 업무와의 관련성이 높은편이다" 이런식으로  일정한 서식의 문서를 작성하게 되는데 한쪽짜리 평가서이지만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런저런 자료를 한참 검토하고 써야 하므로 부담스러운 작업이다.  

 

   오늘 쓴 두 장의 업무관련성 평가서중 하나는 '오랫동안 서서 일하는 작업자에서 발생한 하지정맥류'에 대한 것이다.  50세 된 남자가 25년동안 매일 8시간 내내 서서 일을 했다.  자신의 키높이의 큰 제품을 수리하는 작업의 특성상 서서 할 수 밖에 없는 작업이다.  어느날 다리에 정맥이 구불구불 뱀처럼 튀어나오는 병이 생겨서 수술을 받았다.  이 질환의 가장 큰 위험요인은 유전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의 연구들은 서서 일하는 작업자의 경우 1.6-2.2배까지 질병 발생이 증가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하지 정맥류 환자들은 많은 작업장에서 만날 수 있지만 이런 병이 작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개인적으로 치료를 받고, 다시 서서 일하는 작업으로 복귀하게 된다. 혹 알더라도 노동조합도 없는 중소기업에서 이 정도의 문제로 산재요양신청을 한다는 것은 퇴직을 각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환자의 경우는 민주노총 소속의 노조가 있는 공기업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이런 요양신청를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서서 일하는 작업으로 인한 건강문제는 산업의학 전문의를 난감하게 하는 문제중의 하나이다.  서서 일하는 작업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는 다리가 퉁퉁붓고 발바닥에 불이 나는 것처럼 아프고 밤에 잘 때 쥐가 나서 깬다는 것이다. 이런 건 교과서에 없는 내용이다.  하지정맥류 처럼 진단이 명확하고 업무관련성이 뚜렷한 질병에 대한 인식도 부족한 상황에서 교과서에도 없는 건강문제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를 권고한다는 것은 씨도 먹히지 않는다.  가장 근본적인 예방책은 앉아서 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작업장에서 의자의 지급을 둘러싸고 노사간의 갈등이 있어왔다. 의자를 지급했다가 생산성저하를 이유로 다시 뺐는 사업장도 여럿 보았다. 요즘엔 스탠딩 체어라고 반쯤 앉아서 알할 수 있는 의자의 지급을 권하곤 하는데 그런 때 회사측의 반응은 대부분 택도없는 소리 뭐 이런거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문헌을 찾아보았더니 '아주 아주 천천히 걸어다니는 작업자에서 발생한 발바닥 통증'이라는 제목의 논문이 딱 하나 있었다.  발바닥 통증의 객관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장치를 개발해서 서서 일하는 여자들의 발바닥을 눌러가면서 통증의 정도를 평가한 것이다. 이걸 쓴 사람은 카렌 메씽이라는 캐나다에서 활동하는 인간공학자인데 정말 멋진 할머니이다. 이 분이 쓴 책을 읽어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아무도 웨이트리스나 상점의 판매원과 같은 사람들의 건강문제를 연구하거나 예방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연구하기 위한 계획서를 쓰더라도 어디서도 연구비를 받을 수 없다.'  이 책에 의하면  1980년대에 전세계 여성들의 건강문제를 토론하는 세미나를 했는데 1세계건, 3세계건 일하는 여성들의 건강문제는 어디서나 비슷했다고 한다. 다만 프랑스만이 앉아서 일할 권리를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 그럼 내가 이런 문제를 연구하고 대안을 촉구해야지' 하는 결심을 한 지가 몇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눈앞에 닥친 일을 처리하는데 급급하게 살고 있다. '기업살인'(=산재사망)이 만연한 사회에서 발바닥통증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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