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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개강이다.

  어제 예방의학과 산업의학교실 교수 회의를 했다. 한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모여서 강의계획, 교실 살림, 함께하는 세미나 등에 대해서 확정하고 같이 밥 한끼 먹곤 한다.

  산업의학교실에서 주관하는 강의는 본과4학년 1학점짜리 임상산업의학 실습 하나 뿐이다. 그 외에 내가 하는 강의는 다른 교실에서 주관하는 과목에 한 두시간씩 들어가는 것이다.  의과대학의 다른 임상교수들에 비해서는 적다고 볼 수 없지만 결코 많다고 볼 수 없는 양이다.



   속으로 뭐 내가 제대로 아는 게 있어야 누굴 가르치지 하는 생각을 한다. 전공의 수련시절, 한없이 어렵기만 했던 원로교수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책에서 읽은 내용은 아는 게 아니다.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깨달은 것이 아는 것이다." 어디가서 무슨 말을 하게 되면 그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과연 내가 무엇을 아는가 자신이 없어진다.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것을 말하는 용감함을 볼 때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면서도 내 차례가 되어 무엇을 말하고 나면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워 진다.  

 

  대학의 사명을 교육, 연구, 봉사라 한다. 하지만 지난 삼년간 나에게 양적인 측면에서나 내용적인 측면에서 비중이 높은 순서는 봉사(병원업무도 봉사에 들어감), 연구, 교육 순인 것 같다. 나만 그런게 아니고 대부분의 의대교수들이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의대교수도 교수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스스로도 좀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게 사실이다. 여기에 내가 경험한 학교교육에 대해서 그리 좋은 평가를 할 수 없었기에 학교 교육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을 하는 것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내 생각에 큰 변화를 준 계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하워드 진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은 것, 또 하나는 동료 선생님이 언젠가 교수가 하는 일 중에 사회변화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영역이 교육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것이다.  그래서 교육자로서, 연구자로서 스스로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하기로 했고 그러려면 실력과 내공을 쌓아야 할 것이다. 연구자로서 교수의 실력을 평가하는 가장 대표적인 지표는 논문의 양과 질이고, 교육자로서는 학생들의 강의 평가인데 오호, 이게 다 내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부분이다. 올해는 작년보다는 더 노력해야지, 그게 말로 그치지 않으려면 실제로 여기에 시간을 배정해야 할 것이다. 어디선가 한시간 강의에 최소한 10시간은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거기에는 못 미치지만 최소한 4시간은 준비해야겠다(너무 적은가?). 

 

   하루는 24시간이고 여기서 기본적으로 써야 하는 먹고 자고 이동하는 시간 10시간,  건강을 위해서 쓰기로 한 2시간, 엄마로서, 가정관리의 총 책임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한 3시간을 빼고 나면 9시간이 남는다. 현실적으로 최소한 5.7시간은 병원업무에 써야 하니 남은 3.3시간을 어떻게 쓸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본과 2학년 행동과학에 2시간 들어있는 직무스트레스 강의록 제출 마감이 다음 주 월요일까지라 그걸 먼저 할까 홍실이한테 약속한 원고를 먼저 쓸까 망설이다가 일단 홍실이 동향을 좀 살피자 하고 그 블로그에 들어가 보았더니 '전공이 뭐냐'는 글이 있었다.

 

  사회역학이 전공이며 노동건강연대 회원인 홍실이는 최근에 산업보건정책에 관한 연구와 사업에 시간을 꽤 썼는데 이 경험은 결코 그에게 마치 연구자의 자질 평가의 기준처럼 되어버린 SCI 급 논문을 쓸 기회를 주지 않고 오히려 그걸 써야 할 시간을 빼앗는다. 어떤 선택이 더 가치있다는 이야기를 하고픈 게 아니라 많고 많은 하고싶은 일, 해야 할 일 중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게 참 어렵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홍실이처럼 능력있고 부지런한 사람이 그럴진대 별 실력도 없고 잠많고 빈둥거리기 좋아하는 나야 오죽하겠는가. 쩝. 홍실아 넌 해 낼 수있을 꺼야. 돌아오기 전까지 SCI논문도 몇 개 쓰고, 우리랑 같이 산업보건정책연구도 하고 말이야. 히히

 

  토요일은 나와서 집중해서 일을 해야겠다고 꾸역 꾸역 나오기는 하는데 늦잠자고 늦게 나와서 일찍 들어가려니 이렇게 불질도 하고 이것 저것 손을 대보다가 그냥 간다. 오늘 저녁은 동네 사람 모임이 있어 일찍 들어가야 한다. 06년 학교운영위원회 조직에 관한 중대한 결의(?)가 예상되는 자리이다. 앗, 이것도 남은 3.3시간에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군요. 

 

  그런데 왜 알엠 흉내를 내고 싶지? --->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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