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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해지

  어느날 우리 병원에 보건관리를 위탁했던 한 100여명 규모의 콘택트렌즈 제조 회사 노동조합 산안부장이 어깨가 아픈 환자를 데리고 왔다.  진찰을 하고 작업력을 청취한 뒤 '심한 근막동통증후군이며 업무관련성이 높다'는 소견서를 썼는데, 며칠후에 회사측으로부터 보건관리 위탁 계약을 해지한다는 공문이 왔다.   분명한 이유는 쓰여있지 않았으나 들려오는 말로는 한쪽의 일방적인 이야기만 듣고 회사에는 상황을 알려주지 않아서 서운(?)했다는 것.   환자는 산재처리를 원했고 회사는 이를 막으려고 하는 상황에서 환자가 직접 말하기 전에 회사측에 먼저 알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했더라면 결과가 달랐을까?



  전에 일하던 병원은 사업장의 변동이 거의 없어서 계약해지라는 상황이 낯설었는데 이 병원은 지역 상황이 워낙 변화무쌍해서 그런지 계약해지통보를 종종 받는다.  계약해지에 대하여 기억에 남는 다른 사업장은 50여명 정도 일하던 어느 주방용품생산 회사인데, 공장이 문을 닫게 되었다.  처음 그 공장을 방문했을 때  100데시벨은 족히 넘는 엄청난 프레스 소리(참고-법적으로 소음은 8시간 기준 90데시벨이하로 작업환경을 관리해야 함)와  공장안을 가득채운 금속먼지를 보고 한숨만 나왔다.  게다가 생산라인에서 사람을 빼주지 않아서 건강진단 유소견자조차도 건강상담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 날 , 그때까지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남아았던 모든 사람(스물 다섯명정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에 건강상담 한 번 받을 시간도 못 내준것이 미안해서 그날 사람들을 다 불러모았던 것이다.  깊은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특별한 건강문제가 없는 사람들도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혈압과 혈당을 재고 건강에 큰 이상은 없는 지를 물어보고 고개를 끄덕거리고 돌아섰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본사로 자리를 옮기고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주고 건강해야 새로운 시작도 가능하니 건강관리를 잘하라는 당부...

 

  오늘 첫 사업장은 이번이 마지막 방문인 곳이었다.

햇수로는 벌써 2년, 대여섯번 정도 방문했던 사업장이었는데 갈 때마다 생산라인 사정상 건강상담도 할 수 없고 작업장 순회점검도 할 수 없어 답답했었다.  동행한 간호사선생님으로부터 회사측 보건관리 담당자가 새로 바뀌면서 좀 더 의욕적으로 해보기 위해 다른 병원과 계약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하다.  나보다도 자주 가서 열심히 일했던 산업위생사선생님이나 간호사 선생님 입장에선 속이 많이 상할 것 같다.  

  오늘 건강상담에서 단골손님(그동안 건강문제가 있어서 꾸준히 추적검사를 하고 건강관리를 해온 사람들)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데 어떤 아주머니는 괜히 병원을 바꾼다고 분개하신다.  사실 일하다보면 사업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정이 든다.  그래도 이렇게 건강관리를 잘 하고 계신 분들과 헤어질 땐 마음이 무겁진 않다.

   계약해지의 이유들은 가지가지이지만 해지할 때의 심정은 대체로 비슷하다.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떠오르고 마음이 무겁다. 그 연변에서 온 키작고 조용한 아가씨는 오늘도 목이 아프겠지(검사작업자의 목에 부담이 되니 모니터 높이를 낮추어 달라고 했는데 그렇게 단순한 것도 해결이 안되었다). PVC 용접하는 총각들은 이제는 방진마스크를 잘 쓸까?(그들은 용접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도 모르고 방진마스크가 필요하다는 것도 몰랐었다) 쇠를 깍는 작업자들에게는 보안경이 지급되었을까?(몇달전에 이야기 한건데...)

  사업장 안전보건의 일차적인 책임이 사업주에게 있기도 하지만, 노동자들의 조직률이 낮은 중소기업의 보건관리는 거의 전적으로 사업주에게 달려있다. 우리는 사업주가 산업안전보건법의 최소 기준을 준수하고 노동자의 건강보호를 위한 조치를 취하도록 권고하고 기술적인 지원을 한다. 다니다 보면 사업장의 상황이 천차만별이다.  최소한의 법적 기준을 준수하는 일조차 외면하는 나쁜 사업장도 보고  나름대로 노동자의 건강보호에  작은 노력이라도 하는 사업장도 만난다. 오늘 해지한 사업장처럼 가장 기본적인 것도 잘 되지 않는 곳을 다녀오면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다. 인내심을 가지고 일하다보면 작은 변화가 생기기도 하고 그걸 보람으로 일하는데 이렇게 끝나는 사업장은 정말 마음이 무겁다.   

 

*  목부담작업과 그 결과 발생가능한 근막동통 증후군: 아래 사진처럼 목을 젖히거나 숙이는 자세를 오래 취하거나 반복하는 경우 그 아래 그림처럼 근육의 X표부위가 통증유발점이 되어 그 부위나 빨간 점표시 부위까지 아플 수 있다. 이런 문제는 흔한 문제지만 큰 돈 안들이고도 고칠 수 있는 것인데...(사진은 다른 사업장임)


 

** 방진마스크와 보안경 - 개인보호구는 근본적인 대안은 아니지만 불가피한 경우에는 꼭 착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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