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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비가 온다.

  차끌고 검진가방들고 여기저기 다니는 우리같은 사람들에겐 특히 일하기 싫은 날이다. 오늘 마지막으로 50여명 정도 일하는 자동차 시트 제작 업체에 갔다.  앞의 두 사업장에서 보건교육도 하고 상담도 많이 해서 목이 아프고 파김치가 된 상태라 여기선 추적검사만 몇 건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차에서 내렸다.  마침 회사도 요즘 엄청나게 바빠서 건강상담이고 뭐고 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 보통 밤 9시까지는 일하고 지난 토요일은 일요일에 쉬기 위해서 밤 12시까지 일했다고 말하는 전무의 표정이 아주 밝다.



'애고 미싱하는 아주머니들, 진짜 많이 아프겠네’  이렇게 바쁜 날은 말시키기도 미안할 때가 많다. 그래서 그럼 작업장 순회점검만 하자고 하고 지금까지 개선을 권고했던 내용을 메모하고 현장으로 출발.

# 1. 있으나 마나 

나 : 이거 잘 빨리나요? 

작업자1 : 고장났슈.

나 : 언제요?

작업자1: 몰라요. 이거 한 지 20일밖에 안되요.

보건관리 담당자 : 어, 이거 되던 건데...... 

나 : 에구에구 이거 빨리 고쳐주세요.


왼쪽 위에 국소배기시설이 있지만 가동이 안된다. 게다가 천마스크를 쓰고 일하신다. TT

 

# 2. 없는 것 보다는 낫다

작업자2: (반갑게 웃으며) 오랜만에 오시네.

나 : 안녕하셨어요? 요즘 일 많으신가봐요. 좀 어떻세요?

작업자2 : 좋지, 일많으면 회사도 좋고 우리도 좋고. 일 없어봐, 우리도 괴롭지.

나 : 아프진 않으세요?

작업자2 : 괜찮아요

 

# 3. 빨리 그만두어야 하는데 

나 : 안녕하셨어요? 요즘도 스프레이 매일 하셔요? 이 후드는 잘 빨리나요?

작업자3: 여기 후드는 괜찮은 편인데 저기 껀 잘 안되요.

나 : 방독마스크 쓰셔야 하는데 천마스크 쓰셨네요.

작업자3: 근데 그거 쓰곤 힘들어서 못 하겠어.

나 : 약품 너무 많이 마시면 지금은 괜찮을 거 같아도 십년 이십년 지나면 신경이 상해요.  치매가 생길 수도 있구요. 이거 몇 년 하셨어요? ”

작업자3 : 한 사오년 했지. 그러게...... 빨리 그만두어야 하는데 말이야.

나 : 지난 번 검사에서도 아주머니가 소변중에 약품성분이 제일 많이 나왔어요. 오늘도 하루종일 뿌리셨지요? 일단 오늘 한 번 더 검사해볼까요? 이따가 사무실로 오세요. 혈압도 재고 소변검사도 다시 하는 게 좋겠어요”

# 4. 한국말 몰라요

나 : 안녕하세요? 뭐좀 여쭈어 볼께요. 이거 잘 되나요?

작업자4: 한국말 몰라요

나 : 이 분은 이 작업한지 얼마나 되셨나요?

보건관리 담당자 : 온지 한달되었어요.

자신이 쓰는 화학물질이 무엇인지 이들에게 설명할 수가 없다.

한국말, 인도네시아 말, 영어...... 그림을 그려서 설명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T T

# 5. 어쩔 수 없어

나 : 전에 가르쳐드린 스트레칭 체조는 좀 하셔요?

작업자5 : 바빠서...

작업자6 : 난 못들었는데요. 근데 난 왜 이렇게 엉덩이가 아픈지 몰라. 이쪽 발로만 밟아서 그런가?

나, 엉덩이 근육을 펴는 운동을 가르쳐주고, 팔을 너무 많이 뻗지 않도록 작업대를 조정하는 게 좋겠다고 말한다.

작업자5 : 어쩔 수 없어.

작업자6 : 그렇게 할 수는 있는데 효과가 있을까? 한 번 해보지 뭐.

 

지난 6개월동안 변화는 딱 두 가지. 국소배기시설 하나가 고장이 났다는 것과 환기가 잘 안되는 곳의 작업이 이주노동자에게 배정되었다는 것. 보건관리 담당자와 긴 이야기를 한다.   몰라서 못하는 것인지, 알고도 못하는 것인지, 알아도 안하는 것인지...... 이럴 땐 인상도 좀 쓰고 과태료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위반해보았자 기껏해야 오백만원 물면 그만이라 다들 우습게 여기지만 이렇게 가난한 사업장에선 그게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

몰라서 못한 것은 다시 가르쳐 주었다. “ 물질안전보건자료는 납품업체한테 달라고 해서현장에 비치하고 게시하고 교육해야 한다. 이 사업장에서 쓰는 화학물질의 주성분이 신경독성이 있어 환기를 철저히 해야 한다. 환기를 해도 노출량이 만만치 않으니 방독마스크를 쓰고 일하도록 해야 한다. 외국인들은 특히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화학물질에 중독될 수 있느니 안전한 작업에 대해 잘 알려주어야 한다. 구멍뚫는 작업 위의 국소배기시설은 빨리 고쳐주라. 그거 조금만 신경쓰면 해결되는 거 아니냐.”

알고도 못하는 것, 또는 안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가지라도 약속을 받아낸다. “ 일단 비수기때 다시 올 때는 보건교육을 하자. 자기 작업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를 알아야 한다.” 

비가 온다. 유기용제냄새를 너무 맡았더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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