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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의사의 하루:고생보다 더 중요한 교육은 없다?

9시10분,  첫 사업장으로 출발.

  오늘의 첫번째 사업장은 반도체장비 수리하는 곳으로 150여명 규모의 외국계 회사.

지난 4월 , 근골격계질환 증상 호소자에 대한 진찰을 할 때 문제가 되었던 공정을 돌아보았다.  상반기에 진찰했던 15명의 증상 호소자중 정밀검사를 하라고 권했던 여섯명중 다섯명은 큰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고, 한명은 무릎의 십자인대부분파열로 수술예정이라고 한다. 다른 환자들의 치료는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물었더니 수술을 필요로하거나 작업을 중단해야 하는 경우만 회사에서 치료비를 부담하기로 했다고 한다. 즉, 일이주일의 물리치료비 정도는 본인이 감당하라는 것.  사실 이런 경우는 치료비보다 치료를 받을 시간을 확보하는 게 더 어려운데......



지난 번 방문에서 증상이 있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작업전환이 이루어졌고  증상은 좋아진 편이다.  물론 작업환경개선이 근본적인 해결책이지만 이 회사는 한 사람이 여러 종류의 작업을 한다는 점과 완제품이 300-400 Kg씩 나가기 때문에 뾰쪽한 대안이 서지 않아 일단 증상이 발생하는 경우 작업을 바꾸어 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회사나 우리나 공학적인 개선에 대해서 다각도로 검토해보았지만 효과적인 개선책을 찾지 못한 상태이고, 증상자의 작업을 조정하는 방식이 비교적 효과적이기 때문에 일단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인간공학자들의 교과서에 순환작업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기 때문에 남용되어서는 안된다고 쓰여있다고 한다. 나역시 '사람을 일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일을 사람에게 맞추어야 한다'는 원칙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것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방법이라고 느낀다. 굳이 이론적 근거를 대자면 국제노동기구에서 개발하여 보급한 '인간공학 점검 128항목;이란 책을 보면 중소기업에서는 이런 방법이 권장되고 있다. 치료비를 노동자들이 부담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좀 더 높은 사람을 만나서 설득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참고로 4일이상의 요양을 필요로 하는 업무관련성 질병은 산재처리를 해야하고 그렇지 않으면 '산재은폐'에 해당하지만 상대적으로 경한 질병의 경우 (노사합의에 의해) 이를 '공상'처리하는 기업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다음 사업장으로 이동하려고 하는데 30대 후반의 남자가 건강상담을 하러 왔다. 역류성 식도질환을 진단받아 약을 먹었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했고 이런 저런 임상검사로도 규명되지 않는 여러 종류의 막연한 증상을 호소한다. 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증상으로 판단되어 그 관리방법에 대해 알려주었고, 이런 방법으로 효과가 없고 조직적 대처가 필요한 직무스트레스인 경우 재상담을 하기로 약속하고 나오는데 그의 얼굴이 밝아져서 나 역시 기분이 좋았다.  내 처방을 간단하게 말하면 " 걱정하지 말고 계획을 세워서 많이 놀아야 한다"는 것.  이런 경우는 스스로의 문제를 통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환자가 불필요한 닥터쇼핑을 하지 않고 대개는 시간이 흐르면서 증상이 좋아진다.

 

11시 40분, 다음 사업장으로 이동.

늦었다.

12시까지 가야 한다고 간호사선생님이 마구 마구 속력을 낸다.

다행히 8분 지각. 서둘러 식당에 내려가 밥을 먹었다. 이 동네는 도농지역이라 사업장 근처에 식당이 없기 때문에 사업장 식당을 이용해야 한다. 이럴 땐 아주 조금만 먹게 된다. 급히 먹으면 체하니까(실제로 며칠전에 우리 간호사선생님 하나가 체했음).

  이 회사는 미국계 자동차부품 생산업체로 얼마전 본사에서 안전보건분야에 대한 감사를 나왔다고 한다. 감사가 좀 도움이 되었냐는 질문에 안전관리자가 하는 말이,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을 읽듯이 이야기하더군요.... 어쨌든 내가 기안을 아무리 열심히 올려도 안되는 문제도 감사에서 지적되면 해결되니까 좀 낫겠지요" 한다.   

  몇명의 건강진단 유소견자를 만나서 건강진단 결과를 설명하고 간단한 추적검사를 한 뒤 작업장으로 내려갔다. 3월에 근골격계질환 증상조사와 진찰을 해서 작업조정, 물리치료, 정밀검사와 같은 조치에 대한 의견을 냈지만 진전이 거의 없는 상태.  안전관리자가 결재를 올렸지만 감감무소식이라는 것.  지난 번에 전공의 선생이 낸 의견이 회사가 수용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는 소리를 전해들었기에 정확한 상황파악을 다시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작업장을 돌면서 한명씩 한명씩 만나서 증상경과를 듣고, 진찰을 하고 작업 조정과 의학적 치료등에 대하여 의논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작업량이 현저히 줄어서 대부분의 환자들의 증상이 좋아졌다. 한 40대 아주머니는 "그때는 빗자루질도 빨래도 할 수 없이 아팠어요. 하루에 14시간 일했거든. 근데 요즘엔 일이 줄어서 열시간밖에 안하니까 안아퍼" 하신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생산방식이 하청형태인 중소기업에서 작업량이 준다는 것은 고용불안과 직결되는 문제. 이미 계약직은 모두 나갔다고 한다. -_-+

  같은 부서의 다른 아주머니들은 지난번보다는 좀 좋아졌지만 여전히 손목과 손가락이 아프다고 하셨다.  갈고리같은 도구로 제품의 불량이 난 부분을 긁어내는 작업을 손에 힘을 준 상태에서 반복적으로 하기 때문에 손목의 건염, 손가락의 관절염과 같은 병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제품 마무리작업(사상작업)을 하는 아주머니들을 만나면 공학적인 개선방법도 없고 딱히 바꾸어 줄만한 다른 작업도 없고 휴식이외의 뾰족한 치료방법도 없어 막막한 기분이 된다. 사용하는 수공구를 바꾸면 힘을 덜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작업은 이제 물량이 줄어서 수개월이내에 중단될 예정이란다.  결국 작업장내에서 간단히 사용할 수 있는물리치료기라도 비치해서 아주머니들의 회복을 도와야 한다고 의견을 쓸 수 밖에 없었다.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은 물론 8시간 노동!   

  이어서 옆 부서의 조립작업을 하는 얌전하게 생긴 총각을 만났는데 하는 말이 "엑스레이도 찍어보았는데 아무것도 안나오고.. 의사선생님도 모른대요. 원인을 찾을 수가 없대요. 그는 5년8개월전에 입사해서 부품을 끼워 손으로 눌러 조립하는 작업을 계속해왔는데 손목에 힘을 주어 누르는 동작이 하루 평균 400개*6회 = 2400회.  증상이 시작된지 일년이 넘었고 어떤 치료로도 좋아지지 않는 상황이라 작업전환을 고려해보았냐는 질문에 "이 작업은 힘들어서 아무도 안 하려고 해요" 한다. 업무보고서에 이 총각에 대해서는 반드시 작업전환을 하고 치료하도록 하고 손으로 직접 힘을 주어 누르지 않고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검토해보라고 권고했다.

<얌전해보이는 총각이 하는 작업> - 그를 진찰했던 의사가 이 작업을 보았다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라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회사 입구에 써 있는 글> - 물어보니 총무과의 누군가가 정기적으로 구절을 선정하고 교체한다고 한다. 그 총각은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안전관리자에게 환자관리에 대해서 설명하고 이런저런 일들을 잘 처리해줄 것을  당부하고 나서는데 그가 웃으면서 "병원은 근골격계질환 관리를 왜 안하냐?"고 묻는다. 그 부인이 우리 병원 간호사인데 밤마다 허리주물러주고 다리주물러 주느라 자신이 병날 지경이라는 것. 끙~ 병원은 오랫동안 산업보건의 사각지대였고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이다. 우리 병원 산업보건의는 바로 나.  지난번 산업안전보건위원회때 이 문제를 안건으로 올려 토론을 했지만 진도가 잘 안나가는 편.  산업보건은 기업에서 우선순위가 가장 떨어지는 일로 여겨지는 현실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기 저기 열심히 쫓아다니는 수 밖에 없다. '애고 애고 언제 시간을 내서 사무처장을 다시 만나고 병원장한테 직접 보고도 해야 하는데...... '

 

  오늘의 마지막 사업장은 3교대 근무, 높은 평균 연령(대부분 40대이상), 장시간 노동과 같은 특성때문에 작업관련 뇌심혈관질환(과로사)의 고위험 사업장.  도착하니 3시가 다 되었다.

  여기는 보건관리담당자가 아주 아주 유쾌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그와 함께 작업장을 순회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누구를 만나도 생글생글 웃으면서 인사하고, 어제는 누가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오늘은 누구네 집들이를 하는지...... 모르는 게 없다. 현장 노동자들도 그를 보면 " **야, 이것좀 해결해주라"고  스스럼없이 부탁하기도 하고 "**이가 오고 나서 많이 좋아졌어."하고 칭찬도 하신다. 

  이 회사는 재작년에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왔는데 그전까지 건강관리기록을 보면 거의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 나를 놀래켰는데다가 작년엔 우리 병원에서 한 첫 검진에서1/3(100여명)이 D2(건강진단 일반질환 유소견자)판정을 받아서 한번 더 놀랐다.  부지런한 보건관리담당자덕분에 작년 내내 보건교육과 상담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그 결과 대부분의 질환자들이 치료를 받게 되었다.

  오늘은 올해 건강진단 결과를 가지고 스무명정도 상담을 했고, 근골격계질환관리대책에 대해서 보건관리 담당자, 안전관리자와 함께 깊숙한 논의를 했다. 이 회사 노동조합은 조합원의 건강문제에 거의 관심이 없어 안타깝다. 전임 위원장들이 사무직으로 발령이 나는 것으로 보아 소위 어용노조인듯. 오히려 회사측 담당자들이 의식도 건전하고 열심히 일하는 편이다.  2차례에 걸쳐 실시한 증상 설문조사결과를 보면 근골격계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은데 해결방안은 보이지 않는 답답한 상황.  심지어  한 공정에서 손목의 결절종으로 수술받은 사람이 3명이나 된다. 

<결절종>- 아래 사진의 손목에 볼록한 혹, 아프거나 크기가 너무 크면 수술을 해야한다.

 

  결국 환자 한명 한명을 만나는 것 보다 경영진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우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내가 공장장을 비롯한 관리감독자 회의소집을 요청하기로 하고, 오늘은 일단 가장 심각한 공정만 둘러보았고, 나오면서 공장장과 관리이사를 만나서 상황을 설명하고 다음 달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마지막 사업장을 나서는데 6시가 다 되어간다. 함께 간 간호사선생님은 시간외근무를 하는 셈이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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