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그리고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았다

 

그리고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았다


자연세계는 서로 공존하기 때문에 아름답고 경이롭다. 봄날 잎사귀에 반짝이는 햇빛은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자연이 내는 소리. 부드러운 빗소리로부터 새들의 합창까지 대부분의 소리는 우리를 차분하게 해주는 참 소리다. 도시에서 들려오는 귀를 찢는 듯한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아니라 자연을 감싸고 있는 것들―공기 ․ 물 ․ 햇빛 ․ 흙 그리고 다른 창조물은 이지구에서의 우리 삶을 지탱해 준다. 우리는 시인 ․ 음악가 ․ 미술가 ․ 과학자로부터 자연에 관하여 많은 것을 배워야겠다. 그리하여 아이들에게 자연의 신비를 가르쳐 자연의 심오함을 이해하고 친숙하게 지낼 수 있도록 이끌어야겠다. 이 섬세한 자연교육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공부로 시작되지만 점점 자라면서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자연과 친숙해지려는 우리의 이러한 노력에 유다―그리스도교 전통이 주는 지혜의 풍요로움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먼저 무엇보다도 성서는 자신의 창조를 사랑하는 인격적 하느님에 의하여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창세 1,1 참조) 특히 이 사실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고대 중동 아시아 문화는 지구가 썩어 죽어가는 것이므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악령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지구를 파괴하고 소모시키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

성서는 열렬하게 세상이 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창세기 1장 1-25절에서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한 것을 보고 끊임없이 관상하시며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고 하셨다. 또한 성서는 우리 일상생활에서 체험하는 하느님이 우주의 근접하기 어려운 어떤 곳에 숨어 계시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우리가 시편 저자처럼 신앙의 눈으로 본다면 창조세계는 하느님의 현존과 함께 살아 있는 세계로 보게 될 것이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창공은 그 훌륭한 솜씨를 일러줍니다.

        낮은 낮에게 그 말을 전하고

        밤은 밤에게 그 일을 알려줍니다.(시편 19,1-2)


바오로 사도 역시 창조세계를 통하여 하느님을 느끼고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다고 있게 하셨습니다.”

(로마 1,20)

어떠한 자연환경도 하느님의 모습을 감싸고 있는 베일은 매우 얇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민족은 사막에서 하느님과 씨름하고 시험받는 동안 그분의 백성으로 자라났다. 어디를 보아도 지평선뿐인 광활한 모래땅 같은 자연의 냉혹함, 그리고 밤하늘의 침묵과 광대함은 이스라엘 민족과 하느님과의 만남을 원활하게 해주었다. 인간의 정신과 마음을 꼬드겨서 집요하게 하느님과의 만남을 가로막는 것들은 사막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호세 2,14 참조) 그러나 사막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자연은 아니다. 엘리야는 호렙산으로 가는 순례길의 한 동굴에서 작은 소리를 들었다.(1열왕 19,12-14 참조) 또 옛날 수도자들은 고도에서, 산꼭대기에서, 숲속에서, 바다 한가운데서 하느님을 발견했다.

하느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이 모든 자연환경은 인간의 정신을 다스리고 성숙하게 한다. 이처럼 자연은 하느님의 실제에 우리 마음을 열게 해줄 뿐 아니라 우리의 육체를 지탱해 주고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