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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

 

배추


11월 말이면 김장철에 대비해 밭에서 배추를 뽑아낸다. 내가 사는 마을에서는 몇 년 전부터 서울 본당과 직거래 운동에 참여하는 집은 농약을 쓰지 않기 때문에 배추벌레를 손으로 잡아주어야 한다. 이것은 귀찮고 어려운 작업이지만 땅과 사람을 살리려는 운동으로 세상에서 이보다 더 훌륭한 사명이 있겠는가?


대개 대림절 첫 주일에 서울 본당에서 배추를 파는 전통이 생겼다. 올해도 그렇게 하니까 교회 달력의 마지막 주일 목요일부터 배추를 뽑아 쌓아놓았으며, 날씨가 추울 것에 대비해 보온 덮개와 비닐로 덮어두었다.


배추를 토요일에 꼭 내보내기 위해서는 트럭 기사에게 부탁해야 한다. 강원도 기사들은 그곳 배추 수송이 끝나면 조금씩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이맘때쯤이면 충청남도로 온다.


농사를 짓는 데는 무엇보다도 날씨가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누구보다도 농사꾼들은 자연에 의탁한다. 왜냐하면 자연의 변덕과 일시적 기분을 잘 알고 있으므로 농사꾼들은 종교가 없더라도 자연을 다스리는 하느님께 믿음을 가지기 때문이다. 물론 낭만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자연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날씨가 좋으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으면 많은 손해를 보기 때문에 농부들은 자연을 존경하고, 무의식적이라도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맡긴다. 이렇게 땅과 가깝게 일하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하느님과 가까워진다.


그런데 금요일 밤에 많은 눈이 내렸고 온 세상이 얼어붙었다. 토요일 오후 1,2시가 되어서야 강원도 기사와 트럭이 예정보다 늦게 도착했다. 그런데 그 시간에는 햇볕에 땅이 녹아 트럭이 밭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트랙터 트레일러로 배추를 싣고 와서 트럭에 배추를 옮겨 싣는 작업을 했다. 기사는 말투도 재미있었고 배추 쌓는 기술도 좋았다. 키가 트고 빼빼한데 점퍼 없이 그냥 검은 바지와 긴팔 스웨터를 입은 모습이 옛날 미국 서부 영화에 나오는 사나이 같았다. 나는 배추를 순조롭게 트럭에 싣는 것을 보고 참으로 모든 직업에는 요령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4시쯤 배추를 다 싣고 포장을 덮은 후 그 위로 고무 밧줄을 위로 넣어 ‘어이샤, 어이샤’란 소리와 함께 당기고 묶고 하는 데 날씨가(?) 심상찮게 변했다. 검은 구름이 모여들면서 다시 눈이 내리면서 회오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런데 트럭 위에서 밧줄을 묶느라 왔다 갔다 하던 강원도 아저씨가 바람에 날려갈 뻔했다. 다행히 그는 무사히 내려와 직거래 운동을 담당하는 젊은 아줌마와 함께 서울을 향해 출발을 서둘렸다. 그런데 한 가지 큰 문제가 생겼다.


밭에서 약 70미터 떨어진 큰길까지 가려면 좁은 논길을 지나가야 했다. 이 길은 눈이 녹아 질퍽거렸는데 그 위에 다시 눈이 내리고 얼어 매우 미끄러웠다. 조심스럽게 논길을 올라가도 바퀴는 뱅글뱅글 돌아 그때마다 아저씨가 차에서 내려 부지런히 삽질을 해야 했다.


그런데 약 10미터만 더 가면 큰 길이 나오려 하는데 아니, 이제 ‘다 왔다!’ 하는 순간에 트럭이 쭉 미끄러지면서 오른쪽 뒷바퀴가 경사진 논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더니 앞바퀴가 들리면서 트럭이 서서히 뒤로 넘어가자 기사 아저씨가 “아줌마, 빨리 내 앞으로 해서 이쪽 문으로 뛰어내리세요. 차가 넘어가기 직전이에요” 하고 소리쳤다.


아줌마가 뛰어내리고 그 다음 기사가 재빨리 뛰어내렸고 트럭 앞 왼쪽 바퀴가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앞바퀴가 1미터쯤 들리자 배추 주인 할아버지는 두 손과 발을 후들후들 떨었고 젊은 며느리는 “어머니, 큰일 났어요” 하고 고함을 지르면서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우리의 주인공 기사 아저씨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숨을 몰아쉬었다. 순간 그는 온 힘을 다해 트럭 옆구리에 나란히 묶인 고무밧줄을 힘껏 당겨 순식간에 밑고리에서 고무밧줄 세 개를 풀었다. 평소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업는 괴력이었다. 그러자 트럭에 쌓여있던 배추들이 한꺼번에 논으로 쏟아져 내렸고 올라가던 앞바퀴가 천천히 한숨을 쉬듯 ‘턱’하고 내려왔다. 집주인과 아들 그리고 아줌마는 여전히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참으로 큰일날 뻔했다.


트럭이 기울어져 더 이상 갈 수가 없자 직거래 담당 아줌마는 서울 본당에 연락해 화요일까지 배추 팔기를 미루었다. 주일날 포크레인으로 트럭을 큰길까지 끌어냈고 다행히 날씨가 풀려 월요일에 배추를 다시 싣고 서울로 올라갔다.


김장철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고생을 많이 한다. 특히 그 중에서도 노총각인 강원도 아저씨를 잊을 수 없다. 위기의 순간에 재빨리 밧줄을 풀던 그 용기를 말이다!


깨끗하고 싱싱한 배추 냄새. 바쁜 김장철은 한국에서 대림절과 관련이 있다. 이 세상에는 어렵고도 고통스런 문제가 많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심으로써 우리의 가장 큰 문제, 곧 당신에게서 인간이 떨어져 나간 것을 완전히 해결하셨다. 아기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의 열을 받아 우리는 자신 있게 모든 문제와 악을 이겨낼 수 있게 되었다. 이를 굳게 믿자!


*편집자주 : 이날 눈보라 때문에 함께 작업하던 신부님의 눈썹과 수염에는 눈과 고드름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신부님은 집으로 돌아가 군불을 때고 따뜻해진 방에서 몸을 녹이며, 그날 작업을 회상했다고 한다. 가끔 영화 장면 같은 일들이 우리 안에 일어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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