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1/16
    한국원폭2세환우의 삶과 목소리
    금금
  2. 2008/01/16
    일본 촬영2
    금금
  3. 2007/08/17
    일본 촬영1
    금금
  4. 2007/06/11
    2006년 5월 26일~29일(1)
    금금
  5. 2007/05/29
    2주기
    금금
  6. 2007/04/30
    평화운동가 김형률 활동 일지(3)
    금금
  7. 2005/07/19
    '삶은 계속 되어야 한다.' 김형률을 기억하며...
    금금
  8. 2005/06/05
    카메라를 든다는 것은.......?
    금금

한국원폭2세환우의 삶과 목소리

* 2007년 8월 5일 히로시마 도서관에서 열린 '국제연대집회'에서 

   정숙희 원폭2세환우회장의 연설 전문입니다. 

 

 

한국원폭2세환우의 삶과 목소리



                                                    정숙희(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장)




안녕하십니까.

바쁘신 와중에 이런 행사에 초대해주신 모든 단체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일본에 원자폭탄이 터졌을 당시에 히로시마에서 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고모 세분께서 피해를 입으셨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할아버지와 고모 한분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후 할아버지 시신은 찾아 화장해서 근처 절에 갖다놨다고 하는데, 고모의 시신은 찾지도 못했습니다. 할머니는 겨우 살아남은 자식들을 데리고 합천 고향으로 나왔지만 먹고 살 게 없어서 고생이 많았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살아계시는 동안에 피폭후유증으로 숨이 차고 기침을 자주 하셨고 하루도 약 없이는 버틸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에 건너가 검진한 결과 폐에 구멍이 발견되었는데, 1990년 일본에서 돌아오시고 3일 뒤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4살 때 히로시마에서 피폭당했고, 합천으로 돌아오신 뒤에 폐암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하셨습니다.  항암치료와 가족 모두 힘을 모아 민간요법 등으로 치료를 해서 차도가 좀 있었지만, 좀더 건강을 되찾기 위해 일본으로 치료를 받으러 가셨습니다. 그런데 일본 측 병원에서 어떤 치료방법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2주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일본측 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부산 공항에 읍급차를 대기하고 있으라’는 내용의 전화였습니다. 일본에서 돌아오실 때 아버지의 모습은 중환자라고 부를 정도로 심각해서 두 다리로 걸어보지도 못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결국 아버지도 1999년 일본에 건너가 검사받은 뒤에 돌아와서 식물인간이 되어 얼마 안되어 돌아가셨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아버지가 일본 병원의 실험대상에 불과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피폭자 건강수첩도 가져갔는데 일본쪽은 아버지 죽음에 해명 한마디 없었습니다. 아버지 생전에는 일본에서 수당도 없었고 병원비만 겨우 지원이 되었는데, 일본에 다녀온 뒤에 돌아가셨으니 결국 일본은 아버지를 두 번 죽인 것입니다.


저는 1966년에 합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도 어릴 때부터 다리에 힘이 없어 잘 엎어졌고, 중학교때부터 빈혈이 심해서 머리가 무거웠습니다. 날씨로 따지면 화창한 날씨가 없고 맨날 구름 낀 날이지요. 다리가 아파 두드리면서 자다가 2000년에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진단결과로 연골이 재생되지 않는 병이라고 하였고, 병명은 ‘대퇴부 무혈성 괴사증’이라고 하더군요.


지금은 양쪽 다리에 인공뼈를 넣는 수술을 받아 인공관절로 지탱을 하고 있으나 남의 피를 많이 넣고 약을 계속 많이 먹어서인지 살이 쪘습니다. 수술비로 빚을 많이 지고 수술 뒤에도 6개월 이상 걷지 못해 집 밖을 나가지 못하고 목욕도 혼자 못해서 우즐증도 걸려 3번 죽으려고 약을 먹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원폭으로 뼈가 약한 것이라 생각 못하다가 딸도 내 어릴 때 증상과 비슷하고 남동생도 정신지체장애인 다운증후군으로 고생하고 있어 고통이 대물림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언제 또다시 수술을 받아야할지 모르는 상태이며 요즘은 더 어지럽고 구토증세가 있어 병원에 의뢰하여 진찰을 받은 결과 피가 일반인에 비해 3분의 2정도 밖에 없다고 합니다.

몸속에 피가 출혈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2세 환우 분들을 찾아보니 저보다 훨씬 더 많이 아픈 분들도 많고, 병원에 가도 병명조차도 없는 분도 계시고, 경제적으로 힘들어 병원 치료조차 받을 수 없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몸이 아프니 일을 할 수 없고 생계가 어려우니 가족들의 눈치를 봐야 하고 정말 모두들 어렵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한국원폭2세환우회]의 전 회장이었던 김형률씨가 계속 전화를 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부산에서 대구로 저를 만나러 왔을 때도 저는 원폭피해자 2세임을 부정하고 만나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제가 다른 2세들에게 전화하면서 형률씨의 심정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특별법 제정을 위해 노력하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전 김형률 회장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2005년 7월부터 [한국원폭2세환우회]의 회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고통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싶습니다. 또 하루를 살아도 차별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원폭피해자로서 온갖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며 살아왔기에 한국정부와 일본정부에게 바라는 것은 2,3,4세 앞으로 몇 세대가 될지 모르나 이 고통이 대물림되지 않도록 치료와 생계를 보장하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특별법이 꼭 통과되고 2세 등 후세에게도 차별없는 피해보상을 해주어 고통이 대물림되고 있는 우리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바랍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일본 촬영2

2007. 8. 5

 

늦잠을 잤다. 다른 일행은 모두 식사를 마쳤고, 혼자서 식당으로 갔다.

밥에 미소국을 말아 먹었다. 속이 시원하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으로 갔다. 공원 한켠에는 조선인원폭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가 있다. 해마다 이곳에서 민단에서 주최하는 위령제가 열린다.

 

식순에는 '국기에 대한 맹서' 가 있다. 남한에서도 예비군 훈련장이나 민방위

훈련에나 가야 들을 수 있는데...

 

정숙희 씨는 히로시마에 도착한 후로 얼굴이 조금 굳어져 보인다.

더운 날씨에 연신 땀을 훔치는 정숙희 씨를 보니 애잔한 마음이 든다.

 

점심 때가 되어 평화공원 내에 있는 식당에 가니 사람이 많아서 자리가 없다.

노다지로 상의 차를 타고 공원 근처의 식당으로 갔다.

'나의 식탁' 이란 이름의 식당에 들어갔다. 구운 돼지고기와 몇 가지 반찬,

밥이 나오는 메뉴를 시켰다. 일본의 먹거리는 꽤나 간소하다.

배불리 먹고 남을 만큼 음식이 있어야 된다는 우리네 정서와 달리 일본은

조금은 '모자란듯' 먹어라고 말하는 듯 하다.

 

오후에는 히로시마 도서관에서 열린 '국제연대집회'에 참석했다.

남한, 일본, 중국, 이라크 국적의 사람들이 발언을 했다.

남한은 중국 다음 순서였다. 김환태 감독의 <원폭 60년, 그리고...>를

상영하고, 정숙희 원폭2세환우회장의 발언이 있었다.

 

더운 날씨에 여러 행사를 치르다보니 실내에서 열리는 집회는 조는 사람이

많은 편인데, 영상의 힘 덕분인지 많은 사람들이 정숙희 회장 순서에는

호응이 뜨거웠다.

강제숙 대표는 합천에 평화공원 조성을 위해 한일 연대서명을 제안했다.

집회 중간에 잠시 짬을 내서 후쿠도메 상과 노다지로 상을 인터뷰를 했다.

두 분다 형률 씨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인터뷰 중간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짠해 졌다. 따뜻한 사람들이다.

 

저녁에는 8.6대행동 실무진들과 교류회가 있었다.

정숙희 회장과 강제숙 대표, 내가 참석했고, 일본쪽에서는 후쿠도메 상, 고바야시 상,

쿄코 상, 그리고 한 명이 더 있었는데 이름이...

피곤한 탓인지 생맥주 몇 잔에 취기가 돌아다. 한국이었다면 당근 2차로 갈터인데,

1차로 끝.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일본 촬영1

 

2007년 8월 4일 (토) 비가 내린다.


장마가 끝났다더니 비가 무섭게 내린다. 준비성 강한 김상희는 비가 계속 내리자, 공항에 전화를 걸었다. 결항 여부는 3시간 전에 결정된단다.(못 말리는 김상희)

처형과 형님과 상희, 이렇게 같이 공항에 갔다.

2시 40분경에 강제숙 대표와 정숙희 회장을 만났다.

비행기 출발 시간은 오후 4시. 잠시 공항 밖에 나가서 공항 모습을 찍었다.

출발시간이 되어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히로시마로 가는 비행편이 없어서 후쿠오카로 가서 JR을 타고 히로시마로 갈 예정이다.

비행기 안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나니 벌써 후쿠오카다.

1시간 20분 정도 걸렸다. 비행기가 빠른 건지? 일본이 가까운 건지?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해서 입국 신고를 하고 공항 안으로 들어가니 오카다 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카다 상은 스톤워크 코리아 때 합천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마른 몸에 좋은 웃음을 가진 오카다 상은 생전에 형률씨와도 만난 적이 있었다. 오카타 상이 작은 차로 우리 일행을 하타카 역까지 태워다 주었다.

 

히로시마로 가는 기차 안에서 정숙희 회장을 인터뷰 했다.

소감은 어떤지, 일본에 대한 평소 생각은 어떠했는지?

 

담배를 태우려고 흡연객차로 갔다.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예전에는 한국도 기차안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었는데, 경제적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흡연객차가 있는 것이 일본답다는 생각이 든다.

 

히로시마 역에 도착하니 작년 히로시마 8.6대행동 때 만난 노다 지로 상이 나와 있었다. 노다 지로 상은 원폭 2세로 한쪽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다. 작년에도 노다 상은 김봉대 아버님과 이곡지 어머님 강제숙 대표 그리고 나까지 4명인 우리 일행의 운전수 역할을 도맡아 해주셨다. 옆집 아저씨 같은 인상의 노다상,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1년 만에 다시 보니 무척 반가웠다. 노다 상의 차를 타고 숙소인 SOLARE HOTEL로 갔다.

 

호텔에 짐을 풀고 로비에서 히로시마 대행동의 실행위원인 타니구치 쿄꼬 상을 만났다. 쿄꼬 상과도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다. 호텔 로비에서 강대표와 정회장 그리고 쿄꼬 상이 내일 있을 국제연대집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배낭에 삼각대 그리고 카메라 가방까지 들고 다니려고 하니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열흘 일정에 체력이 잘 버텨줄지 걱정된다. 쉽게 잠도 오지 않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년 5월 26일~29일

 

2007년 5월 26일

저녁 6시 기차로 부산으로 출발했다. 떠나기 전 아버님과 통화를 했다.

잠결에 주머니에 있던 전화기가 부르르 몸을 떤다. 아버님이다.

1시간쯤 더 걸릴 거라는 말씀을 드리고 전화기를 끈다. 하지만

20분인가 30분쯤 지났나, 다시 전화기가 울린다. 아버님이다.

어디쯤인가 묻기에 창밖이 어두워서 어딘지 잘 모르겠다고 말씀드렸다.

도착하면 전화를 드리겠다고 하고 다시 전화를 끊었다.

10분쯤 지났나, 다시 전화가 울린다. 아버님이다.

조선현 선생님과 야오야기 교수와 함께 부산역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도착하기 전까지 서너번쯤 전화가 울렸다.


형률씨 방에서 자기로 했었는데, 가족들이 내려와 있다고 아버님이 말씀하신다.

평화박물관에서 일했던 김대훈씨와 야오야기 교수님과 함께 방을 쓰게 되었다.

나 때문에 큰방으로 방을 옮겼다. 미안한 마음.

조석현 선생님과 야오야기 교수님, 김대훈씨 그리고 평화박물관 조수효씨와 다른 두 분과

간단하게 맥주를 마셨다.

숙소에 들어와 씻고 정신없이 골아떨어졌다.


* 서울 → 부산(KTX) 45,000


2007년 5월 27일

빵으로 아침을 먹고 부산민주공원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일 년 만이다.

어머님과 아버님에게 인사하고, 조금 있으니 가족분들이 오신다.

둘째 형님과 인사를 하고 큰형님 하고도 인사를 했다.

내가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불편하실 것 같아 그냥 있었는데 먼저 인사를 건낸다.

다행이다. 인터뷰를 부탁드려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모식이 시작되었다.

얼기설기 급하게 만든 추모영상을 틀었다.

부끄러움.

정숙희 원폭2세환우회 회장이 인사말을 했다.

남편분이 아프다는 얘기에 조용한 장내가 더 조용해진다.

강주성 대표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아버님에게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신다. 삶아남은 자의 몫.

한홍구 교수님의 인사말.

형률씨 조카의 순서. 작년에 이어 올해도 눈물을 흘리는 조카.

방송국 카메라와 어디서 온지 모르는 카메라 한 대, 그리고 환태씨의 카메라까지

조카의 우는 모습을 잡기 위해 가까이 다가선다.

나는 멀찍이 뒤에서 찍는다. 순간 나도 가까이 다가서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자리를 지켰다.

추모식이 끝나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영락공원으로 이동했다.

일 년만에 찾은 영락공원. 추모음악제가 열리고 있었다.

형률씨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영락공원에서 아버님께 인사하고 헤어졌다.

조석현 선생님 차로 지하철 역까지 갔다.

승이와 환태씨와 함께 부산역에 도착. 표를 끊으려고 하니 매진이란다.

환태씨가 인터넷으로 급하게 고속버스를 예매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창구에 다시 가서 표가 있는지 물었다.

특실표가 있다고 해서 2장를 구입했다.

서울로 오는 길에 아버님 기사가 난 부산일보를 읽었다.

강주성 대표가 백혈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한숨이 나온다.

10시쯤 아버님께 전화가 왔다. 시간이 늦어서 다음날 전화를 드리려고 했는데...

고생했다는 말씀, 꼭 만들어야 된다는 말씀. 아!!!


* 부산 → 서울(KTX 특실) 67,000



2007년 5월 29일

평화박물관에서 아오야기 교수님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종이에 답변 내용를 미리 정리했다면 보여주신다.

좋다고 말씀드리고 편하게 말씀하면 된다고 하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이 긴장을 하신다.

인터뷰가 끝나고 근처에서 차를 마셨다.

추모식때 본 영상에 대해 말씀을 하신다. 조심스럽게...

아버님이 형률씨 얘기가 좀더 많이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신 것 같다.

그렇게 할 거라고 말씀드렸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주기

26일 6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아버님에게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여섯번인가 일곱번...

부산역에는 조석현 선생님과 아오야기 교수님이 아버님과 함께 계셨다.

간단한 음주 후 취침.

 

1년 만에 다시 찾은 부산민주공원.

어머님을 뵙고 가족들도...

행사의 시작은 내가 만든 간단한 영상이었다.

부끄러웠다. 늘 그렇듯이...

 

다른분들의 인사말씀, 모두들 미안함을 얘기한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의 몫인듯...

 

영락공원.

추모음악제가 열리고 있었다.

형률씨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아버지의 무덤을 장례 후에 한 번 밖에 못 간것이 마음에 걸렸다.

화장을 원했던 아버지를 나는 땅에 묻었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매장과 화장.

 

편집을 하다보면 형률씨가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버지의 죽음이 실감나지 않듯이

 

살아있다는 것, 죽었다는 것.

나비가 꿈을 꾼 나인가, 내가 꾼 나비인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평화운동가 김형률 활동 일지

* 김형률 활동 일지(2002년~2005년)

 

♢ 2002년 3월 22일

- 한국 최초로 원폭2세 환우임을 기자회견을 통해 밝힘. <대구 KYC>(대구 남구 봉덕3동) 사무실에서 부친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원폭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원폭2세피해자 문제에 대한 대책마련을 촉구함.

 

- <한국원폭2세한우회>결성. 한국원폭2세 환우카페(http://cafe.daum.net/KABV2PO)를 만들어 자신의 처지와 조건을 알리고자 노력함.

 

♢ 2002년 5월

 

- 일본 히로시마 원폭건강센터에서 한국원폭2세로는 처음으로 형식적이나마 건강검진을 받음. 담당 의사가 정밀 검진을 권유함.

 

♢ 2002년 8월

 

- <대구전교조>와 <히로시마일교조>와의 역사교류회 참가. 한국가 일본의 역사 교사들에게 한국원폭2세환우의 문제해결을 호소함.

 

♢ 2002년 12월

 

- 부산에서 아오야기 준이치(부산대), 조석현(전교조) 등이 주축이 되어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지원하는 모임> 결성.

 

♢ 2003년 5월

 

-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지원하는 모임>에서 한국원폭피해자와 한국원폭2세환우의 생존권 보장을 위한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결의, 서울의 관련 시민단체들과 연대 추진함.

 

♢ 2003년 6월 28일

 

- 서울에서 ‘한국원폭2세환우 문제해결을 위한 간담회’ 개최 및 <원폭2세환우 문제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 구성 결의함.

 

- 8월 5일 <국가인권위원회> 긴정 및 기자회견 가지기로 함.

 

 

 

 

♢ 2003년 7월 26일

 

-부산에서 ‘한일원폭2세회 심포지움’ 참가. 공대위 심포지움 참관 및 공대위 2차 회의 개최

 

♢ 2003년 8월 5일

 

- ‘원폭2세 환우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 발족 및 국가인권위 진정’ 기자회견 개최함.

 

- 8개 시민단체와 함께 <원폭2세환우 문제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함.

 

- 정부 차원의 실태조사와 진상규명을 골자로 하는 진정서를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함.

 

♢ 2004년 8월

 

- <국가인권위원회>, ‘원폭피해자 2세의 기초현황과 건강실태’ 조사 실시

(2004년 8월~12월, 5개월간)

 

♢ 2005년 2월 14일

 

- <국가인권위원회>, 국가기관 최초로 1세, 2세 실태조사결과를 발표함. 조사결과 원폭피해자 1세와 2세 모두 일반인들에 배해 질병발생 위험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남.

 

♢ 2005년 4월 12일

 

- <공대위>와 함께 원폭피해자 진상규명과 지원대책 촉구 및 특별법 제정을 위한 의견청원 기자회견 개최. 원폭피해자 단체(한국원폭2세환우회와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외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이 연명하여 국회에 특별법 제정촉구를 골자로 하는 청원서 제출.(소개의원 :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

 

♢ 2005년 5월

 

- <공대위> 확대 개편 결정, 따라서 공대위 명칭을 <원폭피해자 및 원폭2세환우문제해결을 위한 공대대책위원회>로 변경(소속단체: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한국원폭2세환우회 포함 8개 단체)

 

- 5월 18일, 국회에서 개최한 ‘원자폭탄 피해자 문제해결을 위한 입법 방향’ 토론회 참가

 

- 공대위와 함께 원폭피해자 및 원폭2세피해자를 대상으로 평택의 <한국원폭피해자협회> 기호지부의 사무실과 합천의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한국인원폭피해자 진상규명과 인권 및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관한 설명회’ 개최

 

- 5월 19일~26일, 일본 도쿄에서 <일본의 과거청산을 위한 국제연대협의회> 주최로 열리는 심포지움 참여

 

- 5월 27일, <원폭피해자 및 원폭2세환우문제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15차 회의에 건강악화로 불참

 

- 5월 29일, 오전9시 5분경, 부산시 동구 수정4동 수정 아파트에서 끝내 숨지다.

 

- 5월 31일, 부산대병원에서 장례식을 마치고 부산 영락공원에 유골이 안치됨.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삶은 계속 되어야 한다.' 김형률을 기억하며...

알엠님의 [그가 남긴 선물] 에 관련된 글.

염치라는 것이 없어지는 나에게 염치를 알려준 사람.

 

'염치없이 살지마자' 다짐하며, 뚜벅뚜벅 걷고 싶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카메라를 든다는 것은.......?

2005년 5월 30일.

여느 날처럼 화장실에 앉아서 담배를 물고 신문을 펼쳤다.

10여 분 뒤 1면에 난 기사에 나는 숨을 멈췄다.

(나는 신문이든 잡지든(책만 빼고) 일단 뒤에서 부터 읽는다.)

 

아는 얼굴이 신문 1면에 있었다. 부고 기사였다.

 

김형률.

 

나는 생전에 그를 두 번 만났다.

20004년 어느 여름, 그는 아버지와 함께 푸른영상을 찾았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의 막바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그를 만났었다.

 

원폭2세환우회 회장인 그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어했다.

원폭 피폭자의 2세로 태어나 알 수 없는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어했다.

 

나는 독립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이다.

권력과 자본의 영향을 받지않고, 공중파가 다루지 않는 이 세상 낮은 곳의 이야기,

그러나 꼭 필요한 이야기가 독립다큐멘터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생전에 그는 여러 텔레비젼 보도프로에 출연하여 자신과 같은 원폭2세들의 문제에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갖기를 주장했었다.

 

나는 푸른영상이란 곳에 있다. 독립다큐를 만드는 곳.

<상계동 올림픽>과 <송환>이란 다큐멘터리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곳.

 

어지간히도 더웠던 2004년의 여름. 푸른영상을 아버지와 함께 찾아던 그의 모습은

나를 흠칫하게 만들었다.

내 나이 또래로 보였던(나는 신문기사에서 그가 내 동생과 같은 나이란 걸 알게 됐다)

그는 애처로움을 느낄 정도로 말라있었다.

작은 키에 삐쩍 마른 그는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이야기했다.

부산에서 만났을 때도 그는 원폭2세의 문제에 대해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이야기했다.

 

2005년 5월 30일 저녁 11시, 나는 카메라를 들고 부산으로 가는 막차를 탔다.

31일 새벽 4시 11분 나는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대학병원 영안실 입구에는 수무개 남짓한 화한이 놓여져 있었다.

새벽 5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라 영안실에는 조문객들은 없었다.

유족들이 영안실에 잠들어 있기에 나는 잠시 밖에서 담배를 피면서 기다렸다.

어색했고, 불편했다.

30분쯤 영안실 밖에서 서성이던 나는 조문을 하러 영안실 안으로 들어갔다.

조문을 끝내고 아버님이 어디서 왔나고 묻기에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푸른영상에서 왔습니다.

아버님의 눈에 가득 물기가 고였다.

불편했다.

 

영안실을 나와 조문객들이 식사하는 곳에 잠시 앉아있었다.

나는 왜 카메라를 들고 왔는가?

 

잠시 후 아버님이 나오셔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생전에 형률이가 다큐멘터리를 꼭 만들어 싶어 했다는 말씀을 하셨다.

무어라 답할 말이 없었다. 죄송하다는 말 밖에.....

 

장례식을 찍어도 되냐고 여쭸던것 같다.

늦었지만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 지는 모르겠지만......

죄의식일지도.....

 

아버님은 찍어도 된다고 말씀하셨고, 이른 아침이라 조문객들도 별로 없기에 나는 카메라를

들었다.

 

영안실 밖에서부터 촬영을 시작했다.

영안실 안의 그의 사진도 촬영했다. 사진 옆에는 한 구절의 글이 있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숨이 막혀왔다. 카메라를 끄고 싶었다.

다시 밖으로 나와 담배를 물었다.

 

일곱시가 가까워 오자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방송국 카메라도 오고......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뒤에만 있었다.

발인이 시작되었다.

여러 단체 사람들, 방송국 사람들, 기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나는 여전히 뒤에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화장장으로 가는 버스 안.

열려진 창문으로 바다냄새가 들어왔다.

그와 나는 같은 차에 타고 있다.

그러나 그는 더이상 열심히, 정말 열심히 말하지 않는다.

서른다섯. 그는 더이상 말이 없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던 것을.....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이야기 했나 보다.

 

독립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나는, 카메라를 든 나는,

내내 뒤에서만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찍었다.

부끄러웠다. 염치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이야기했는데.....

 

더이상 말이 없는 그를 찍는 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더이상 말이 없는 그를 찍는 다는 것이 염치없었다.

 

사람들 뒤에서만 카메라를 든 나.

 

나에게 카메라를 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전에 그가 준 책 두 권, 자료집 하나, 그리고 많은 메일이 남아있다.

유품처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