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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웃음을 가졌던 사람

중학교 때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생각은 꼬리를 물었고, 결국은 무지 무서워서 생각을 멈췄다.

교수형을 당하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꿈이란 대개 깨어나면 잊혀지기 마련이고, 아무리 생생한 꿈이라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 지는데, 내가 죽는 꿈은 어제 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죽음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인가 보다.

 

고등학교 1학년 인가 2학년 인가 였을 때였다.

신문에서 대학생의 분신 관련 기사를 읽고 다시 죽음에 대해 생각을 했었다.

좋은 대학을 다녔던 그 사람은 왜 스스로 죽었을까?

그때 던졌던 의문이 이후 내 삶을 지배하리라고는 나는 생각하지 못했다.

 

얼마 전 아는 선배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작년 겨울 지리산에서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소식을 들었을 때의 그 황망함이란.

 

나보다 한 해 선배인 그를 처음 본 것은 88년이었다.

학교를 1년 휴학했던 그는 나와 같은 강의를 들었고,

집회장에서 자주 만나면서 친해졌다.

 

그 선배는 참 열심히 살았고, 열심히 운동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새벽에는 신문을 돌렸고, 저녁에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는 그 선배가 얼굴 찡그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깡마르고 작은 체구의 그는 항상 웃었다.

웃는 일보다는 우는 일이 많았던 그시절 그는 늘 웃으면서 말했다.

"난 일헌이만 보면 참 기분이 좋아. 힘내자! 고맙다."

 

1988년 전국의 대학가에서 전방입소 거부투쟁이 벌어졌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도 입소거부 투쟁를 벌였다.

학생들을 싣고 갈 버스가 학교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서 집회가 열렸다.

집회가 한창일 때 학교측은 다른 장소에 버스를 준비시키고 학생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 당시 전방입소 4박5일을 다녀오면 군복무기간 45일 단축이라는 혜택이 있었다.

하나 둘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집회는 유야무야 되었다.

그때 그 선배는 버스가 집결된 장소에 가서 몸에 신나를 붇고 분신을 감행하려 했다.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오고 입소시간이 연기되면서 다행히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다.

선배는 병원에 입원했고, 나는 전방입소를 거부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그 선배를 다시 본 것은 서울 청량리역 앞에서였다.

시계탑 밑에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저 도를...."

선배였다.

반가운 마음에 약속시간을 미루고 선배와 근처 커피집으로 갔다.

많은 얘기를 했지만 기억이 희미하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선배는 어느 종교단체에 들어가서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했다.

헤어지면서 다시 만나자는 말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잘 살라는 건강하라는 애기만 했던 것 같다.

마음이 아팠다. 학교 때 보다 더 마른 그의 체격 때문만은 아니였다.

평안을 얻었다는 선배의 웃음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선배의 웃음은 환했다.

그 웃음은 본 사람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환한 웃음이었다.

그러나 그날 선배의 웃음은 아픈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날이 선배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얼마 전 이사 때문에 짐정리를 했다.

켜켜이 먼지가 쌓인 예전 수첩을 둘추다 선배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봤다.

전화를 걸고 싶었다. 그리고 예전에 미처 못했던 말을 해주고 싶었다.

 

"성일이 형! 나 형이 무지 좋았다. 몰랐지^^ 글고 제발 살 좀 쪄라, 너무 말랐잖아."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지만, 이럴 때는 있었으면 싶다.

나야 천국갈 마음도 없고 자격도 안되지만, 착한 사람들 고생한 사람들은

천국에서 행복했으면 싶다.

만약 천국과 지옥이 있으면 그 중간쯤 어디에 면회실 같은 게 있을 게다.

천국에 있는 사람들이 지옥에 있는 사람을 면회올 수 있는...

그러면 형이 면회를 와서 같이 막걸리나 한사발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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