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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맛나는 참치...

번역은 최근 이것저것 하는 터라 잠시 뜸한 상태이고, 날림 포스트를 하나... 고객 만족도 어쩌고 하는, 해마다 나오는 무슨 상.. 참치 통조림 부문에서 동원이 탔더군요. 뭐.. 어차피 짜고 치는 고스톱이긴 하지만... 하종강 님의 홈페이지에서 퍼온 글입니다.(www.hadream.com) 몇 년된 얘기긴 하지만 이쪽 환경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습니다. ------------------------------ 참치잡이 외항선원 아침나절, 20대 후반의 건장한 청년이 사무실에 들어와 어색한 몸짓으로 여직원 책상 앞으로 가더니 멀거니 서 있었다. 여직원이 "어떻게 오셨어요?" 하고 물으니 "저, 하종강 변호사님 좀 뵈러 왔는데요."라고 고개를 건들건들 옆으로 누이며 대답을 했는데 그 모습이 어딘가 좀 이상해 보였다. 여직원이 "하 변호사님, 손님 오셨어요."라고 일부러 '변호사'에 힘을 주어 큰 소리로 말했다. (잘 아시겠지만, 나는 변호사가 아니다). 그가 반나절에 걸쳐서 나에게 해 준 이야기... --------------------------------------------------------------- 참치잡이 원양어선의 갑판원이었습니다. 말이 좋아 갑판원이지 강제노동을 하는 죄수나 다름없었습니다. 생선 상자를 지고 뛰어가다가 살얼음 위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허리를 다쳤습니다. '뛰지 않고 걸으며 일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마치 '지옥'과 같은 갑판원의 처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망망 대해에 병원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가끔씩 허리가 끊어지는 통증이 찾아 왔지만 견디어내며 묵묵히 일했습니다. 차츰 통증이 너무 자주 찾아오고 그 강도도 점점 심해져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상하게도 나중에는 목 뒤까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아픈 게 아니라, 목 바로 아랫부분부터 머리 뒤꼭지까지 '목뼈를 따라 쇠파이프를 꽂았다가 뽑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파도가 치는 것처럼 심했다 덜했다 하면서 아픈 게 아니라, 한번 아프기 시작하면 이틀 또는 사흘간 계속 그렇게 죽도록 아팠습니다. 아픈 동안은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습니다. 머리까지 어지러워 먹은 것 없이 토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선장한테 사정사정해서 사고 난 지 8 개월만에 겨우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귀국한 후 회사에서 치료비를 대주어 병원에 다녔습니다. '요추 및 경추 추간판 탈출증'이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허리와 목에 디스크가 걸린 거라고 합니다. 2년쯤 지나도록 차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말이 잘 안 나오고 행동도 굼떠지고 말을 한 마디 하려면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먼저 옆으로 돌아가며 갸우뚱하게 눕기 시작했습니다. 길에 나가면 사람들이 나를 보고 수군거리곤 하는데, 거울을 보면 자신이 느끼기에도 좀 바보처럼 보였습니다. 병원에서 진단서를 받아 보니 '외상성 뇌증후군'이라고 써 있었고, 얼마 전부터는 정신과에서도 치료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회사에서는 목과 허리의 디스크만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기 때문에 정신과 치료에 대하여는 치료비 등 일체의 보상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정신병원의 치료비는 어마어마하게 비싸다던데... 담당의사는 배 위에서 당한 부상 때문에 결국 정신적 장애가 생긴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귀국한 후 지금까지 2년이 넘도록 한 푼의 임금도 못 받아서 지금은 거지보다 전혀 나을 것도 없이 살고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그 동안의 치료비를 대 준 것만도 크게 봐 준 것'이라고 말합니다. --------------------------------------------------------------- 그러니 그 어마어마하게 많이 든다는 정신과 치료비를 회사로부터 타낼 방법이 없겠느냐는 거였다. 물론 방법이 있다고... 치료비뿐만 아니라 그 동안 못 받았던 임금도 받을 수 있도록 법에 다 나와 있다고... 그리고 앞으로 몸에 장애가 남게 될 터이니 앞으로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의 손해도 돈으로 계산해서 받을 수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 청년을 옆에 앉힌 채 항만청에 제출할 서류를 꾸미기 시작했다. 대개는 다음의 적당한 날에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그때까지 내가 틈틈이 서류를 만드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 청년의 거동이 불편해 보여서(사무실까지 혼자 찾아 온 것이 신기할 정도로 몸과 마음의 장애가 심해 보였다)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다른 일을 미루기로 했다. 격무와 박봉에 시달리면서 한결같이 관료주의적 폐단에 물들어 있는 공무원들이 조금이라도 신경을 써서 서류를 보게 하려면, 불필요할 정도로 장황하게 서류를 꾸며야 한다는 것이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얻은 '진리'이다. 간단한 말도 복잡하고 거창하게 설명하고, 한 페이지에 담을 수 있는 내용도 두서너 페이지에 나누어 담고, 가능한 한 붉은 색 도장과 푸른 색 고무인을 여기저기 많이 찍을 수 있도록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반나절은 족히 걸리는 작업이 되고 만다. 관공서에 찾아가 울며불며 말로 호소하거나 아무 종이에나 개발새발 적어서 진정서 한 장 달랑 내미는 것보다 같은 내용이라도 그럴듯하게 수십 페이지의 서류를 갖추어 내미는 것이 훨씬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기 싫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내키지 않는 노력들이 당사자에게 바늘 끝만큼이라도 도움을 준다면, 옳고 그름을 따질 여유는 나한테 이미 없다. 오후 두 시쯤 되어 내용 작성을 모두 끝냈다. 내용 작성이 끝나면 일이 절반쯤 끝난 셈이다. 이제는 컴퓨터 프린터로 뽑아내어 필요한 만큼 복사하고, 참고 자료 역시 필요한 만큼 복사하여 번호를 매기고, 순서대로 철해서 일일이 도장을 찍어야 한다. 그런데, 빌어먹을 관공서 공문 서식은 복사지나 컴퓨터 용지 그 어느 것과도 규격이 맞지 않아서 자를 대고 일일이 같은 크기로 절단을 해야만 한다.(지금은 관공서 용지가 A4로 통일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B5보다는 조금 크고 A4보다는 조금 작은 16절지가 우리나라 관공서 문서 규격이었다.) 그렇게 해야만 받는 쪽에서 조금이라도 신중하게 서류를 들여다보기 마련이다. 컴퓨터 프린터에서 막 출력이 시작되었을 때, 그 청년이 이제는 일도 다 끝냈으니 여담이나 하겠다는 것처럼 주섬주섬 말을 꺼냈다. 언어장애가 있어서 심하게 더듬거리는 말씨였다. "사고 난 후 3년이나 되었지만 실제 치료기간은 10 개월도 안되었어요. 회사에서 '죽어도 치료를 안 해준다'고 해서요... 그동안 쫓아다닌 병원이 열 군데도 더 될 겁니다. 회사에는 백 번도 더 찾아갔었구요." "다치고 나서, 집에 보내 달라고 아무리 사정을 해도 선장이 허락을 해야 말이지요. 나중에는, 치료도 보상도 필요 없으니 그냥 귀국만 시켜달라고 아무리 사정해도 '네 마음대로 귀국하면 선원법 위반으로 공항에 내리는 즉시 구속될 테니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협박하더군요." "목이 아프기 시작하면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고래고래 소리도 지르고 데굴데굴 구르기도 하고... 그랬더니 항해사가 나를 방에 가두라고 하데요. 거의 6개월 동안을 감금 상태에 있다가 포루투칼에 배가 닿았을 때 죽어버리겠다고 소란을 피웠더니 겨우 나를 달래서 귀국시켜 준 거예요." 내가 그 청년의 말을 끊고 물었다. "잠깐만요. 그걸 왜 지금에야 말해요? 정신과 의사한테도 그런 얘기 모두 했습니까? 어쩌면 그런 것들이 제일 중요한지도 모르는데..." 이역만리의 바다 한 가운데에서 철판으로 만들어진 선실에 감금되어 있었던 6개월 동안 그가 겪어야 했을 고통은 도대체 어느 만큼이었을까...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망설인 후에 나는 프린터의 전원을 끄면서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그 중요한 걸 빠뜨릴 수는 없어요. 오늘 다른 약속은 없지요?" 그러자 그는 무슨 말을 하려고 고개를 여러 번 꼬면서 한참이나 애를 쓰다가,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심하게 더듬거리는 말로 말했다. "저... 식사...하셔...야...지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나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대책 없이 착해 빠지기만한 것에 오히려 분통이 터졌다. "댁이 지금 남 식사 걱정이나 하고 있을 형편이요?" 마치 그가 큰 잘못이나 한 것처럼 큰 소리가 튀어나왔는데, 말 끄트머리에서 그의 우람한 손이 눈에 확 들어오는 순간, 눈물이 왈칵 솟았다. 수 억 원을 들인다 해도 그는 결코 예전의 건강한 모습을 되찾지 못할 것이다. 결혼도 하기 전의 젊은 나이에 거의 완벽하게 망쳐버린 그의 인생은 이제 어떠한 방법으로도 완전하게 보상받지는 못할 거였다. 남달리 커 보이는 그의 손이 오히려 서러웠다. 일을 다 마치고 그가 간 후 나는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앞으로 내가 동원참치를 먹으면, 개다.' 며칠 후 수퍼마켓에서 무심코 참치 깡통을 집어드는 나에게 안해가 말했다. "그거 '동원' 꺼야." 나는 깜짝 놀라서 얼른 깡통을 내려놓았다. -------------------------------- 여러가지 사족 붙여봤자 역효과만 날 것 같네요. 저도 참치 안 먹을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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