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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1/05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오타쿠로부터 본 일본사회(014)(2)
    kurokami
  2. 2004/11/05
    존재론적,우편적.. 자끄 데리다에 대해서.. (030)
    kurokami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오타쿠로부터 본 일본사회(014)

오타쿠의 스노비즘으로부터 보이는 시니시즘 그리고 이런 시점에서 보면, 전술한 것과 같은 오타쿠의 스노비즘은, 에도 문화의 형식주의 연장선 위에 있는 동시에, 또 이런 세계적인 시니시즘 흐름의 한 현상으로도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스탈리니즘 하의 시민과 일본의 오타쿠들은, 확실히 정치적인 긴장도 사회적 조건도 달라, 이 양자를 비교하는 것은 골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양자 모두, 모든 가치가 상대화되어 버린 후, 무의미한 것에서 굳이 의미를 발견하고, 그리고 어느새 그 '굳이'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는 심리적인 과정에서는 공통되어 있다. 때문에 코제브는, 일본에 대해서 거의 모르는 채로, 오타쿠적인 감성의 태두를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행하는 오타쿠론 중에서는, 전에도 다룬 오오사와 마사치가 이런 면을 다루고 있다. 전술한 것과 같이 그는, 오타쿠의 특징을, 조락한 큰 이야기(초월적 타자의 심급)을 서브컬처로 메우려 한다는 것에서 찾고 있다. 앞에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는 거기서 지젝을 참고하고 있고, 위의 시니시즘론과 완전히 겹치는 형태로 오타쿠론을 전개하고 있다. 오오사와는 거기서, 오타쿠들에 있어서는 '제3자 심급의 제1차적 붕괴를 전제로 한, 제3자 심급의 2차적인 투사가 발생'하고, 그 투사는 현대의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주42) 이 오오사와의 술어는 특수하지만, 이 책의 표현으로 고치면, '제3자의 심급'이라는 것은, 초월론타자=큰 이야기를 말하고, '2차적 투사'라는 것은 서브컬처에 의한 날조를 말한다. 오타쿠들에게 있어서는 본래의(1차적인) 큰 이야기가 붕괴하고, 그 전제의 근본으로써 페이크의 큰 이야기(2차적인 투사)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페이크를 손에서 놓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상의 시대와 허구의 시대 그리고 오오사와는, 이 전제 위에서, '虛構の時代の果て'나 '戰後の事象空間' 등의 저작으로 더욱 깊이 있는 지적을 하고 있다. 오오사와에 따르면, 전후 일본의 이데올로기 상황은, 45년부터 70년대까지의 '이상의 시대'와, 70년대부터 95년까지의 '허구의 시대' 둘로 나뉜다. 이 책에서의 표현으로 말하면, '이상의 시대'는, 큰 이야기가 그대로 기능하고 있던 시대, '허구의 시대'는 큰 이야기가 페이크로밖에 기능하지 않는 시대이다. 이 윤곽 안에서 오타쿠적인 이야기 소비-허구 중시는, '소비사회적 시니시즘의 미저(微底)한 형태'로서, 종전으로부터 80년대까지 일관된 흐름 위에서 파악된다. 그리고 95년의 옴 진리교 사건은, 바로 이 흐름의 끝에 위치하고 있다. '연합적군---및 그것에 동시대성을 느꼈던 사람들---이, 이상 시대의 종언(또는 극한)을 대표하고 있다고 하게 되면, 옴 진리교는, 허구 시대의 종언(극한)을 대표하는 위치를 맡게 된다.'(주43) 14년부터 89년까지 75년간은, 19세기적인 근대로부터 21세기적인 포스트모던으로 가는 긴 이행기였다. 이 이행기의 시대정신은 시니시즘 또는 스노비즘으로 특징지어지고, 그것은 냉전으로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 과정이 45년의 패전으로 한번 절단된다. 그리고 역으로, 부흥기로부터 고도성장기에 걸친 일본은, 오히려, 교육기관이나 사회조직 등, 사회의 이데올로기 장치를 강화하고, 큰 이야기=국가목표를 부활시키는 것으로써 위기를 뛰어넘어왔다. 실제 이 시기의 효율적인 경제성장은, 전쟁 중의 총력전 체제가 남긴 법제도나 행정시스템에 의해 크게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그 총합이 또다시 완만해진 것이 70년대이고, 그 결과, 일본에서는, 포스트모던으로의 이행이, 7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그러나 그만큼 급속하게 진전되었던 것이 아닐까. 오오사와가 논한 '이상의 시대'와 '허구의 시대'의 대립이 명확한 것은, 아마도 이런 일본의 독자적 상황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42) '전자 미디어론', 279,286항 주43) '戰後の事象空間(전후의 사상 공간)', 128항. '虛構の時代の果て(허구의 시대 끝에서)', 40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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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우편적.. 자끄 데리다에 대해서.. (030)

그러고 보니 웹상에서 방점 찍을 좋은 방법이 없으려나... 그 밖에도 이탤릭체라든지, 진한 글씨체 같은거... 귀찮으니.. 위의 잡다한 효과들은 한글파일이나 PDF로 만들었을 때 확인하길..-_-; 제2장 두 개의 편지, 두 개의 탈구축 형식화의 제 문제에 대해서는 이하, 가라타니 코진이 80년대 전반에 행했던 일련의 작업, '내성과 소행(內省と遡行)', '隱喩としての建築(은유로서의 건축)', '言語. 數. 貨幣(언어. 수. 화폐)'를 참조하는 것으로 하자. 따라서 여기서는, 이른바 '탈구축'이 '형식화의 자괴(自壞)' 운동 그 자체, 즉, 어떤 하나의 시스템으로부터 출발해 그 내재적 역설로 도달하는 사고의 운동이라는 것을 확인해 둔다. 가라타니가 밝힌 것처럼, 그 운동은 형식적으로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 같다. 실제 앞 장에서도 다룬 것처럼, 드 만에 따르면 '탈구축'이라는 것은, 텍스트를 오브젝트 레벨(콘스터티브)로 읽는가, 메타레벨(퍼포머티브)로 읽는가를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 결정불가능성을 이용해서 텍스트의 최종적인 의미를 공중에 매달아 두는 전략 밖에는 없다. 그리고 '탈구축'은 그 결정불가능성을 통해서야 말로, 텍스트의 개방성이나 타자성을 본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라타니에 따르면, 데리다의 작업은 결국, 형식화를 밀고나감으로써 부정적(네거티브)으로 '외부'를 출현시키는 이런저런 운동의 한 변주로 해석된다. 그는 85년의 텍스트 '轉回のための八章(전회를 위한 8장)'에서, 이미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철학이 '내성'에 시작된다고 하면, 현상학은 그것을 미저화(微低化)하고 있다. 데리다가 만난 것은, 우리들이 거기서부터 출발할 수 밖에 없지만, 또한 거기서부터 출발하면 안 된다는, 저 패러독스이다. 그는, 하이데거처럼, "철학" 이전의 사고로 귀착하는 것을 거부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철학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그것을 반전시켜 가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 데리다는, 현상학에 있어서의 명증성이 '자신에 대한 현전', 즉,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음성은 의식이 있다>>('聲と現象(음성과 현상)'). 이것은, 서구에 있어서의 음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인 것처럼 읽혀져 버렸지만, 그는, 단순히 철학 또는 현상학이, 배우는=듣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데리다는, 그런 태도로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현전'에 앞장서는 흔적 없이 차연의 근원성으로 소행한다. <<이런 흔적은, 현상학적 근원성 그 자체 이상으로 <근원적>이다 --- 만약 우리들이 <근원적>이라는 이 말을, 모순없이 보지하는 것이 가능하고, 다시 그것을 소거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음성과 현상). 다시 소거되는 것이라고 해도, 이 근원적인 차연은, 우리들을 또다시 '신비주의'로 쫓아 내는 것이 된다. 데리다는, '초월론적인 것은 차연이다.'라고 말하지만, 이 때, 차연이 초월화되는 것이다, 라고 해도 상관없다.(1) 가라타니는 여기서, 하나의 주체(주관)으로부터 출발하는 방법 일반을 '내성'이라고 명지하고 있다. 하나의 시스템으로부터 출발해서, 그것을 자괴시키는 것으로 근원적 차연을 발견하는 데리다의 방법은, 최종적으로는 차이의 신비화. 초월화로밖에 귀결될 수 없다. 본 장에서 지금까지 보아 온 것처럼, 가라타니의 이 비판은 일면으로는 완전하게 올바르다. 실제, 후설과 소쉬르의 비판으로부터 시작한 데리다가, 자신의 작업이 갖는 가라타니적 의의를 자각하고 있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쪽이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데리다론은 가라타니의 이 일절로 끝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데리다에 관해서 또 다른 물음, '어째서 데리다는 그런 기묘한 텍스트를 썼는가'라는 의문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전술한 것과 같이 후기의 그는, 중층적인 지구(地口)와 암연의 인용으로 가득 찬, 소위 '間 텍스트성'을 문자 그대로 실천한 것과 같은 텍스트를 많이 쓰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가라타니가 인용했던 '음성과 현상'적인 철학 비판, 즉 전기의 형식적인 작업 후에 출현하고 있다. 우리들은 여기에 주목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1) '內省と遡行' 講談社學術文庫, 88년, 293-294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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