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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1/11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오타쿠로부터 본 일본사회(016)(2)
    kurokami
  2. 2004/11/11
    존재론적,우편적.. 자끄 데리다에 대해서.. (032)(2)
    kurokami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오타쿠로부터 본 일본사회(016)

노벨 게임에서 ‘울게 만들다’라는 의미 노벨 게임은, 이처럼, 모든 것이 데이터베이스 소비에 지배된 현재의 오타쿠계 문화 중에서도, 특히 데이터베이스 소비의 특징이 강하게 나타난 장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일부의 게임은, 이제 갸루 게로서의 성격에서 벗어나, 포르노그래피적인 표현보다도 모에 요소의 조합에 중점을 둔 독자의 세계를 만들기 시작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 전형이, Key가 제작한 99년의 'Kanon'과 2000년의 ‘Air'라는 2개의 작품이다.(그림16) 이 두 작품은, 판매상으로는 성인 지향 게임으로 되어있지만, 더 이상 포르노그래피적인 일러스트를 거의 포함하지 않는다. Key의 게임은, 소비자들에게 에로틱한 만족을 주는 것보다는, 오히려, 오타쿠들에게 인기가 있는 모에 요소를 철저하게 조합해서, 그들이 효율적으로 우는, 반하기(萌える) 위한 일종의 모범해답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져 있다. 예를 들어, ‘Air’에서는, 갸루 게의 목적이 에로틱한 만족이라는 전제를 거부하는 것처럼, 모든 포르노그래피적인 일러스트는 모두 전반부에 채워져 있다. 10시간 이상을 차지하는 플레이 시간의 후반은, 실질적인 선택기도 없이, 히로인의 멜로드라마가 진행되어 가는 것을 담담하게 읽을 뿐이다. 그리고 그 멜로드라마도, ‘불치의 병’, ‘전세로부터의 숙명’, ‘친구들을 만들지 못하는 고독한 소녀’, 라는 모에 요소가 조합되어 만들어진, 극히 유형적이고 추상적인 이야기다. 이야기의 무대가 어디인지, 히로인의 병은 어떤 것인지, 전세라고 함은 어떤 시대인지, 그런 중요한 부분이 모두 애매한 채로, ‘Air’의 이야기는 단지 설정만을 조합시킨 골조만으로써 진행해 간다. 그런데도 이런 종류의 게임이, 높은 단가에도 불구하고 10만부 이상을 팔아,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은, ‘데 지 캐럿’의 성공과 같이, 이야기의 유형으로부터 디자인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그곳에 모에의 기준이 빈틈없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세이료인 류스이의 소설을 아울러 이야기한 것처럼, 90년대에 나타난 새로운 소비자들에게 있어서는, 현실 세계의 모방보다도, 서브컬처의 데이터베이스로부터 추출된 모에 요소 쪽이 훨씬 리얼하게 느껴진다. 따라서, 그들이 ‘깊다’ 라든지 ‘울게 만들다’ 라든지 등을 말할 때에도, 대개의 경우, 그런 모에 요소들을 조합하는 묘가 판단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90년대에 있어서 드라마에 대한 관심의 고양은, 이 점에서 고양이 귀나 메이드 복에 대한 관심의 고양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거기서 얻고자 하는 것은, 종래의 이야기적인 박력이 아니라, 세계관도 메시지도 없는, 단지 효율적으로 감정이 움직이도록 하기 위한 방정식이다. 보다 철저한 시뮬라크르의 제작이 가능하게 그러나 노벨 게임의 소비에는 또 하나의 다른 측면이 있다. 소설이나 코믹과는 많이 다르게, 컴퓨터 게임의 본체는, 플레이어가 스크린 위에 눈을 두는 드라마(작은 이야기)가 아니라, 그 드라마를 생성하는 시스템 쪽이 요구된다. 액션 게임도 롤플레잉 게임도, 스크린 위에 표시되는 화면과 이야기 전개는, 플레이어의 조작에 따라서 생성된 하나의 버전에 지나지 않는다. 플레이어의 조작이 바뀌면, 같은 게임은 다른 화면이나 이야기 전개를 표시한다. 그리고 게임의 소비자는, 당연한 일이지만, 하나의 이야기만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다른 버전의 있을 법한 이야기 총체를 모두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게임의 분석에 있어서, 이 소비의 2층 구조에 주의하지 않으면, 문학비평이나 영화비평의 틀을 그대로 가져와서 실패하게 된다. 이런 게임의 구조는, 지금까지 검토해 온 포스트모던의 세계상(데이터베이스 모델)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컴퓨터 게임의 발전과 포스트모던화의 진전 사이에는 깊은 관련이 있고, 실제로 그것은 시기적인 부합에도 맞지만, 그 점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또 다른 기회로 미루도록 하자.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벨게임도 또한 컴퓨터 게임인 이상, 그 작품으로 향하는 소비자들의 의식이 2층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전술한 것처럼, 노벨게임의 표층적인 소비는 모에 요소의 조합으로 채워지고, 오타쿠들은 거기에 울고, 모에의 유희를 충분히 향수(享受)하고 있다. 이것은 확실히 그렇지만, 그러나, 보다 상세하게 관찰하면, 또 다른 종류의 욕망이 존재함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노벨게임의 시스템 자체에 침입해서, 플레이 화면에 구성되기 전의 정보를 날 것으로 빼내어, 그 재료를 사용해 다른 작품을 재구성하려고 하는 욕망이다. 노벨게임의 많은 화면은, 실제로는 복수의 데이터를 조합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림17의 우측에 놓은 3개의 도판은 ‘키즈아토’의 플레이화면이지만, 이것들 모두, 각각 좌측에 가리키는 이런저런 파일로 분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제일 오른쪽 위에 있는 화면은, 화실(和室)의 배경화상(시스템에서는 S10.LFG라는 파일명으로 지정되어 있다)에 캐릭터의 화상(동일하게 C31.LFG)을 겹치고, 그 위에 시나리오의 텍스트(016.SCN로서 지정된 파일의 일부)를 겹쳐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림에서 가리키는 것처럼 같은 텍스트나 화상은, 조합에 의해서 또 다른 여러 가지 화면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하다. 하나의 파일을 반복 사용하는 것은, 제작과정의 생략화만이 아니라, 90년대 중반의 하드웨어 조건(기록매체의 한계)로부터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이다. 화상의 이런 반복 사용 자체는, 코믹이나 애니메이션에서도 빈번하게 보이는 것이며, 결코 드문 일은 아니다. 특히 애니메이션에서는, 대부분의 동화가 복수 셀화의 중첩을 통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노벨 게임도 발상이 별로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노벨게임이 애니메이션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거기에서, 화면의 단편이 제작자에 의해 이용될 뿐만 아니라, 소비자에 의해서도 손쉽게 분해되어, 데이터베이스화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그림에서 가리키는 텍스트나 화상의 파일은, 실은, 구입 시의 상태에서는 압축되고 암호화되어 읽지 못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갸루 게의 소비자 중에서는, 기술적인 지식이 풍부하고, 해커적인 기질을 가진 컴퓨터 이용자가 많다. 인터넷 상에서는, 여기서 채택한 ‘키즈아토’를 시작으로 해서, 유력한 게임의 데이터를 분해하고, 시나리오나 화상, 음성을 ‘빼내는’ 소프트 웨어가 몇 개쯤인가 무료로 공개되어 있다. 그림을 만들기 위해서 필자 자신이 이용한 것도, 그런 프리 소프트의 하나이다.(주45) 그리고 그런 환경은, 노벨 게임에 있어서의 2차 창작을, 종래의 2차 창작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바꾸어 가고 있다. 이미 설명한 것처럼, 2차 창작이라는 것은, 원작의 설정을 데이터베이스로 까지 환원해서, 거기서부터 임의로 추출된 단편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시뮬라크르로서 게시된 작품이다. 그러나 종래의 2차 창작에서는, 거기에 이용되는 ‘데이터베이스’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소비자가 자주적으로 재구성한 추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고, 그 점에서 작자의 오리지널리티가 담길 여지가 있었다. 예를 들어 ‘에반게리온’의 동인작가가, 몇 개의 원작을 단편화해서 조합시킨다고 해도, 출판된 동인지의 페이지 그 자체는 자신의 손으로 그리지 않으면 안 되고, 거기에는 어떻게 해도 작가성이 깃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TV시리즈로부터 샘플링을 통해 2차 창작을 만드는 시도(‘매드 비디오’라고 불리고 있다.)도 없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기술적인 한계도 있고 해서, 역시 그리 큰 움직임은 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노벨게임의 융성과, 이상과 같은 분해의 일반화, 그리고 바로, 데이터를 재구성하기 위한 멀티미디어 환경의 충실은, 이제, 그런 2차 창작과는 질적으로 다른, 보다 철저한 시뮬라크르의 제작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그 하나의 예로서는, ‘매드 무비’라고 불리는 여상작품을 들 수 있다. 그것은,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의 동화를 골라서, 적당한 음악에 맞춰 가공하고 편집해서 만들어지는 단시간의 비디오 클립이며, 대체로 인터넷 상에서 유통되고 있다. 80년대의 ‘매드 비디오’와 다른 것은, 그 편집 작업이 거의 완전하게 디지털화되고, 결과로서 제작자의 지향이나 동기가 크게 변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노벨게임의 2차 창작으로서 만들어진 작품은 유난히 특이한 발달을 보이고 있다. 이를테면 ‘Air’의 매드 무비 중에서는, ‘Air’로부터 뽑아낸 화상을, 거의 그대로, 같은 ‘Air’에서 뽑아낸 음악에 맞춰 편집해 만들어진 작품이 보인다. 즉 여기서는, 종래의 동인지적인 2차 창작과는 다른, 완전히 원작과 같은 데이터를 사용해서, 단지 그 배열과 표현 방법만을 바꿔 만든 새로운 타입의 2차 창작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같은 방향의 움직임으로, 그 밖에도 최근에는, Windows용으로 만들어진 노벨게임을 다른 플랫폼으로 자주적으로 이식하는 시도와 같은, 여러 개의 흥미로운 예가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새로운 타입의 2차 창작은, 원작의 데이터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점에서, 동인지 같은 종래의 2차 창작보다 훨씬 저작권법 상의 문제를 불러오기 쉽다. 실제로 그것을 제작자도 자각하고 있는 듯, 이상과 같은 시도 중에는, 익명으로 기간을 정해 인터넷 상에서만 교환되는 작품도 많다. 필자는 그 현상에 대해 의견을 말할 입장은 아니지만, 단 하나, 그런 욕망이, 결코 개인의 일탈이 아닌, 노벨게임의 본질이(더 나아가서는 포스트모던의 본질이) 필연적으로 만들어 낸 욕망이라는 점에 주의를 촉구하고 싶다. 되풀이 하지만, 노벨게임의 한 장면은, 오리지널에 있어서도, 원래 복수의 데이터를 조합함으로써 만들어진다. 표층에서 하나의 것으로 보이는 화면이나 이야기 전개도, 심층에서는 무의미한 단편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같은 텍스트나 화상이, 플레이어의 조작에 따라 여러 개의 다른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그렇다고 하면 역으로, 그런 단편들을 다른 방법으로 조합하는 것으로서, 원작과 같은 가치를 지닌 다른 버전의 노벨 게임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진행일 것이다. 매드 무비의 제작자들은, 원작에서 만날 때와 같은 감동을 다르게 조합해서 또다시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시스템을 분해하고, 데이터를 재구성하고 있다. 그것은, 최소한 그들의 의식으로는, 도작이나 패러디, 샘플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의식에 이끌린 활동인 것이다. 주45) 참고를 위해서 기록해두면, 이용한 것은 Susie32 ver0.45a에, Leaf PAK AX ver0.27과 Leaf CG to DIB ver0.27의 플러그인을 넣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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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우편적.. 자끄 데리다에 대해서.. (032)

1-a 후기 데리다의 텍스트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89년부터 90년에 걸쳐 기록된 텍스트 ‘할례고백(割禮告白 Circonfession)에는,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일절이 있다. 만약 이제 와서 하나의 할례(Circonfession) [......]가 내 입술의 경계를 정하고 있다고 한다면, 만약 내 고백(Confession)이 마음을 진정시키고 안심하게 하는 진리를 핥고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속죄함 없이, 자신의 이 망연자실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기에, [......] 그렇다면 나는 이 過巻き를 벗어날 것이기에, 過巻き, 그것은 진실이라는 것과 더 이상 어떤 관계도 없는 한 고백의 경험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모든 형상과 모든 묘선(描線)이 부과하는 할례의 경험인 것이다, 고명(古名) 또는 남유(濫喩), 그러나 고백 혹은 할례라는 의식은 서로 닮았음이 분명하다, 가족에 속함으로써, 즉 장르=종에 속함으로써, 그리고 거기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자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 무엇과도 닮지 않았다, 정원 문턱 위 저 최초의 아침으로부터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런 식으로 고백하고 싶었는데, 그리고 나의 할례고백은 시작한다, 매킨토시 셋 안에서 층화된 장소에서, 상기(想起)적으로 반복=복제 가능한 동시에 상처 입기 쉬운 구조, double-sided/double density, 양면 트랙의 플로피 디스크, [......] 그 어리석은 자들은 믿고 있는 것이다, 컴퓨터는 에크리튀르를 쓸모없게 한다, ‘상사(원문은 曹長) 펜’ 을 가진 선량한 할머니를, 친적(親的)인 에크리튀르를, 내 아버지의 펜, 내 어머니의 펜을 쓸모없게 한다, 그리고 결국은 분신 혹은 아르시브(archive)의 문제를 규제한다,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나이브함, 그것은 그들이 컴퓨터로 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3) 이 텍스트는 91년, 제프리 베닝턴의 텍스트 ‘데리다베이스’와 같이, Seuil사의 ‘동시대인’ 시리즈 중 한권 ‘자끄 데리다’로서 출판된다. 동 시리즈는, 그 밖에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프랑시스 퐁주(Francis Ponge)’, ‘피에르 크로소우스키(Pierre Klossowski)’ 등을 담은 사상가, 작가의 해설서 시리즈이고, 본래는 그 책에서도 데리다의 인생과 업적에 대한 손쉬운 해설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데리다와 베닝턴은, 다음과 같은 복잡한 전략을 세운다. 먼저 베닝턴의 텍스트는 어디까지나 교육적으로, 데리다의 작업을 가능한 만큼 도식화한다. 이것은 그의 전기적 정보를 전혀 포함하지 않고, '기호', '증여', '무의식'이라는 31개의 키워드를 제시한 장부터 무시간적으로 구성되고 있다.('데리다베이스'라는 타이틀은 '데이터베이스'와의 주락(酒落)이 되고 있다). 반면 데리다는 바로 그 도식을 해체하기 위해, 병행해서 기묘한 자전적 텍스트를 집필한다. 그 텍스트는 59개의 단장(斷章)으로 구성되고, 하나의 단장 안에서는 마침표 없이 문장이 이어진다. 베닝턴에 의한 키워드화에 저항하기 위해 여기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은유가 빈번하게 나오고, 복잡한 구문이 마련된다. 그리고 이들 두 텍스트는 같은 쪽에서, 위 3분의 2를 '데리다베이스'가, 아래 나머지를 '할례고백'이 차지하는 형태로 인쇄된다. 도식적인 사고와 은유적인 연상관계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병렬되고 있는 이 텍스트는, 이후 말하는 '탈구축'의 2가지 면의 관계를 응축하고 있다. 가운데 인용 부분은 번역이 좀 어색하니 이해하기 바랍니다. 프랑스어 원문을 번역하는 게 차라리 나을 듯..-_-; 그리고 過巻き는 적당한 말을 모르겠음.. 누가 알려줘~~ 3)“Circonfession" in Geoffrey Bennington et Jacques Derrida, Jacques Derrida, Seuil, 1991, pp.126-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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