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한문장] 한 발자국의 몰락이 어떤 도약보다 의미심장하다

<다음 세대를 위한 병역거부 길라잡이-현민의 병역거부 소견서> _『맑스를 읽자』 (고병권 외 저, 2010)

 

아마도 병역거부는 내가 지닌 안전한 위치와 거리조절 능력, 그 밖의 자원을 상당히 박탈할 것이다. 그리고 이때 생긴 상처는 쉽게 지울 수 없으면서 오랜 세월 감당해야 할 것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 즉 병역거부는 몰락의 순간이다. 하지만 나는 몰락을 기꺼이 선택함으로써, 내게 부착된 권력을 백일하에 드러내고자 한다. 그것이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이를 통해 개별적인 삶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나의 삶을 다른 이들과 포갤 수 있는 위치에 이르고 싶다. 물론 그것을 낭만적으로 생각해서는 금물이다. 유쾌한 경험이 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삶은 운명일 수 있다. 나는 이제 병역거부자라고 불리는 전혀 새로운 삶으로 이주한다.

 

겨우 딛던 자리에서 벗어나 한 발자국 내려왔을 뿐이다. 아래로 한 발을 딛는 데 이토록 힘이 들고 오랜 시간이 걸릴 줄은 몰랐다. 그동안은 위로만 시선을 향했지, 아래에도 발을 디딜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래봤자 한 번인데. 하지만 지금 내겐 이 한 발자국의 몰락이 이전의 어떤 도약보다 의미심장해 보인다.

 

– 『맑스를 읽자』 (고병권 외 저, 2010) 중 <다음 세대를 위한 병역거부 길라잡이-현민의 병역거부 소견서>

 

 

나의 최애 SNS는 페이스북이다. 예전 일간지 구석에 실리던 ‘오늘의 역사’와 비슷한 성격의 서비스메뉴, ‘과거의 오늘’을 특히 좋아한다. 1년 전 혹은 몇 년 전의 오늘, 내가 했던 고민을 떠올리기 좋아서다.

 

3년 전인 2016년 3월 어느 날, <다음 세대를 위한 병역거부 길라잡이-현민의 병역거부 소견서>에 대해 어느 페이스북 친구가 쓴 글을 내 타임라인으로 끌어왔었다. 오늘 고른 문장도 그 소견서에서 발견한 것이다.

 

‘피해/생존과 자부심, 몰락과 자부심을 연결’하는 것에 대해 고심하던 페이스북 친구의 글을 읽다가 나는 피해자, 생존자, 혹은 낙오자 중 어디쯤 있는지 생각해 본다. 말 잘하고 글 잘 쓰고 일 잘하고 육아도 거뜬히 해내면서, 주변의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폐 끼치지 않는 좋은 사람이 되는 일은, 이렇게 나열해서 글로 쓰는 것만큼이나 숨차고 닿기 어려운 것인데……. 그것을 희망했고, 그 희망은 당연했다.

 

요즘 ‘적당히 살면 정말 안 될까’에 대한 메모를 종종 쓰다가, 무슨 일이든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않는 ‘적당한 존재’가 되기로 문득 마음먹었다. ‘의미심장한 한 발자국의 몰락’을 향하는 나만의 시도가 될 수도 있겠다.

 

*작성: 림보(활동회원)

 

2019-03-22 인권교육센터 들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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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7 23:40 2021/01/17 23:40

[이주의한문장] “언제 쳐들어올지(기어오를지) 모르는 상대를 죽이는(가르치는) 연습을 ‘방어(교육)’라는 우아한 이름으로 포장하는 곳들이 있다는 발견”

<체벌 거부 선언 - 폭력을 행하지도 당하지도 않겠다는 53인의 이야기>, 교육공동체 벗, 2019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엄마는 나를 자유롭게 키우고 싶다며! 잔소리 좀 그만해.”

 

요즘 거의 매일 아침, 등교를 둘러싼 실랑이가 벌어진다. 활동량이 많아진 어린이가 방과 후 (돌봄) 교실이나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서 온 힘을 다해 하루의 많은 시간을 친구들과 아파트 1단지부터 6단지까지의 넓은 동네를 헤매며 잘 노는데 보내기 때문일까. 점점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며 늦게 일어나고 있다. 사실 일어나서 부리나케 밥 먹고 옷 입고, 머리 빗고 양치하고 가면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맘에 드는 옷을 고를 때까지 심사숙고해야 하고, 밥 먹으면서 유튜브를 보거나 게임을 할 여유를 즐기고 싶은 어린이에게는 학교 가기 40분 전에 일어나는 것은 대단히 늦게 깨어나는 것인가 보다.

 

나는 자꾸 나가기 전까지 밥을 다 먹을 수 있는지, 양치하고 갈 수 있는지 걱정되는 마음에 5분 간격으로 시간을 알려주었을 뿐인데, 말하면 할수록 잔소리가 되어 버린다. 나도 늘 친절하게, 어린이의 짜증을 돋우지 않게 얘기하고 싶다. 같은 얘기 여러 번 하게 하면 혼내던 엄마 밑에서 자라기도 했고, 어른들 말을 바로 듣지 않으면 혼났기 때문에 혼나지 않으려고 바로바로 움직이는 방식으로 애쓰고 살아오면서,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같은 부탁(사실은 명령이나 지시)을 여러 번 하면 화가 쌓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어린이와 살면서 내내 트리거로 작동하고 있기는 하다.

 

어린이가 나날이 자라면서, 가장 나를 붙드는 고민이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같이 만든 약속이나 규칙을 잘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라는 요구’이다.

 

사실 이 어린이는 지금보다 더 어릴 때부터 엄마인 나에게 조건 없는 지지와 사랑을 거침없이 요구하고 있다. 생후 3개월부터 보육 기관에서 사회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전적으로 알차게 휴식에 집중하며 보내고 싶어 한다고 느낀 지는 오래되었다. 적어도 엄마와 지내는 시간만이라도 긴장 없이 보내고 싶은 어린이의 마음을 모르진 않는다. 오히려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는 어린이‧청소년 인권옹호자가 되고 싶은 ‘나’와 모성이 없어서 괴로운 ‘엄마로서의 나’ 사이에 있는 심각한 갈등이 문제라면 문제겠다.

 

“저는 당신이 만들어 내는 모범답안, 그 자체를 거부합니다.” – <체벌 거부 선언 – 폭력을 행하지도 당하지도 않겠다는 53인의 이야기>, 교육공동체 벗, 2019. 172쪽, 필부의 글

 

나도 모범답안을 거부하기 위해서 활동하고 있는데, 왜 어린이의 삶에 대해 나는 어떤 답안을 들이밀며 아침마다 싸우고 있을까. 왜 학교에 매일 가야 하는지, 숙제를 꼭 해야 하는지, 제시간에 맞춰 움직여야 하는지 어린이가 질문할 때마다 나는 멈칫하고 만다. ‘그러게. 학교를 안가고 숙제를 안 하고 지각할 수도 있지. 그러나 엄마인 나는 너를 ‘이기적이고 저만 아는 사람’으로 키웠다고 비난받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어나고 씻고 밥 먹고 세수와 양치하고 옷 입고 가방 챙겨서 학교 가라는 말에 재깍재깍 움직여주지 않는 그에 대한 분노를 꾹꾹 누르면서 ‘쟤는 왜 이렇게 친절하게 대하려(고 쥐어짜)는, 나의 노력을 몰라주는가.’ 하는 원망이 더 크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나도 그이에게 원하는 모범답안이 있었다는 것.

 

“언제 쳐들어올지(기어오를지) 모르는 상대를 죽이는(가르치는) 연습을 ‘방어(교육)’라는 우아한 이름으로 포장하는 곳들이 있다는 발견” – 앞의 책, 192쪽, 날맹의 글

 

‘들’이 여는 고개 넘기 워크숍을 참여하고 활동회원을 하기로 하면서 가장 먼저 결합한 모임이 학교폭력을 주제로 한 교사연수 기획팀이었다. 이때 세 살이던 어린이와 살며 확인한 ‘고함치는 엄마’로서의 ‘폭력성’을 알게 되었고, 내가 직면해온 수많은 폭력의 순간을 되새기기도 했다. 2018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가 체벌 거부 선언을 조직한다는 소식을 듣고, 꼭 참여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선뜻 참여하게 되지 않았다. 선언하고 나서. 그 뱉어놓은 말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선언에 참여하긴 했지만 이번 생에는 안 되는 문제라며 도망치지는 않을까. 체벌 거부 선언을 하고, 그걸 다듬은 글이 책으로 실려 나오자 사실 나는 두렵다. 나에게 어린이‧청소년인권은 내가 단지 나이를 먹고 엄마라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행사할 수 있는 힘을 매 순간 확인하기 위한 잣대라고 쉽게 고백하고 있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은 무게감이 다르긴 했다.

 

그러나 책은 나와 버렸다. 체벌이 폭력이다. 때리지 않더라도, 폭력적인 분위기와 언어로 너를 제압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 역시 폭력이다. 날맹이 써주었다시피 폭력의 언어는 전쟁을 떠오르게 한다. 내 몸을 통해 선택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되어버린 어린이를 ‘언제 기어오를지 모르는 상대’로 설정하고 가르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통제하고 휘두르고 막 대하고 싶어 하는 마음과 나는 언제까지 갈등하게 될까.

 

*작성: 림보(활동회원), 2019.5.31. 인권교육센터 들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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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7 23:37 2021/01/17 2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