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행동의 괴리

 

 

요즘 나는 상담을 받고 있다. 내가 청소년 노동인권교육을 하며 떠들고 다니는 말과 경험을 통해 얻은 확신이 내 일상에서는 도통 풀려 나오질 않았다. 집에서는 오직 만 보였고 내게 부과되는 사회적인 역할들은 그저 나를 숨막히게만 했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특히 엄마와 여동생 과의 사소한 다툼이 쌓였다. 어느 순간 두려움이 커지기도 했다. 나의 생각과 행동의 괴리에 대해 내 자신이 너그러 워지지가 않았다.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책도 있던데, 두 달 가까이 상담을 받으면서도 내 생각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은 아직 남아 있다. 며칠 전 읽은 정희진의 글1)에 따르면 나는 머리(이상 혹은 희망 사항)로는 이해가 되는데 몸이 안 움직이는, “머리가 없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내가 살아온 동안 감당하기만 하고 꾹꾹 눌러 담았던 것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올해를 시작하는 겨울이었다. 결혼하고 딸을 낳고 키우면서, 또 주말마다 만나는 조카와 부딪히면서 어린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지적받기도 하고 숱하게 반성하기도 했다. ‘훈육을 왜 하지 않느냐, 육아도 공부해야 한다는 타박, ‘아이를 완전한 존재로 대한다면서 어른에게는 쉽게 못 할 상처되는 말을 아이에게 퍼붓는 건 아니냐는 지적, ‘청소년인권을 위해 활동을 한다더니 너와 가까운 아이들과의 관계는 왜 이러냐는 비난을 들었지만 그 말들을 소화하는 것이 힘들어 나도 나 자신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청소년 활동가들이 공부하고 있는 adultism 관련 문서들을 발견해 읽다 보니 나의 징후는 영유아 혐오/아동 혐오일 가능성이 높은 것도 같았다. 저 단어들에 쓰인 혐오라는 단어는 공포를 포함하는 건 아닐까, 이리저리 합리화도 해 보고 고민을 해 보아도 딱히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말과 행동의 괴리로 괴로울 때마다 내가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회 활동을 하면서 집에서는 마초적인 가부장. 결혼 전에는 함께 활동하는 동료였지만 결혼 후에는 남편의 활동을 내조만 하게 되었다는 여성들의 넋두리 속에, 줏대 있는 사람이 되라며 책을 사 주던 아버지였지만 막상 청소년운동을 시작하자 그런 건 (명문)대학 가서 하라고 격하게 반대를 해서 결국 집을 나오게 되었다는 어느 청소년 활동가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그런 인물들. ‘운동하는 활동가라면, 진보 논객이라면 가정이나 개인적인 관계에서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젖어 있어도 괜찮다고, 그건 개인적인 문제니까 우리가 일일이 지적할 순 없다고, 어떻게 사람이 완벽하겠느냐며 함께 변명해 주는 사람도 많다.

세상을 향해 민주주의와 정의를 말하는 활동가, 진보 인사의 이미지가 사적인 공간에서의 위계, 권력, 폭력을 덮어 버리는 일이 나라고 다를까 하며 털썩 주저앉곤 했다. 솔직히 좋은 의도를 내세우는 여러 조직들이(시민사회단체건 회사건 협동조합이건) 그 좋은 의도를 내부에까지 구현하지 못하는 경우는 너무 많지 않은가. 그 조직에서 노동은 존중받지 못하고, 내부적인 문제를 지적하거나 고발한 사람들은 괘씸죄로 몰려 그 조직에서 밀려나는 일이 허다하다. 보리출판사를 비롯해 그린비출판사, 자음과모음, 함께일하는재단, 평화박물관, 마인드프리즘의 노동 문제들이, 10년 전에 활동했던 100인위의 존재 자체가, 지금도 많은 조직 안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나이차별, 성차별 사건이 그런 현실을 확인하게 해 준다.

그래서 질문을 하게 되었다. 왜 좋은 의도는 밖으로만 드러날까. 왜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는 걸까. 어쩌면 이 질문이 나의 상담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왜 내 옆의 존재들에게 그런 횡포를 부리는 건가 하는 질문. 그리고 이런 질문을 《오늘의 교육》이 구성하고자 하는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담론을 향해 던지고 싶었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이상이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지금 여기의 사소하고 지질해 보이는 문제들을 간과하게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교육이 대체 뭐길래

 

 

《오늘의 교육》 20155·6월호, 7·8월호 두 권의 특집을 읽으면서 우선 떠오른 질문은 왜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해 파고들지 않을까였다. 윤상혁이 <전환을 위한 사유>에서 인용한 사티쉬 쿠마르의 문장 만약 우리가 지구를 집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어떻게 다룰 수 있을 것인가?”(5·6월호, 40)를 이렇게 패러디해 보고 싶었다. “우리는 교육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한 토론은 미루고 어떻게 다룰 지 말하고 있는 건 아닌가?”

 

 

우리가 교육해야 할 생태학의 개관은 바로 그런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파도처럼 넘실대며 반복되는 파국적 상황에서 살아남고, 싸우고, 연대하는 삶과 기술에 대해 가르치는 것. 그런데 그 방법이 지금의 도시적 삶에서 탈출하고, 반기술적, 반과학적 사유를 통해 아름다웠던 과거로 회귀하자는 게 아니고, 내 삶이 도시에 기반하고 있다면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 실행할 수 있는사유의도구를 손에 쥐어 주는 거라 생각합니다.- 니짱, <우리는 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말하게 되었는가?>, 《오늘의 교육》 5·6월호, 20

 

 

학생들은 이런 파국적 상황에서조차 같이 토론하고 길을 모색하는 동료, 동시대인이 되지 못한 채, 그들의 손에 사유의 도구를 쥐어 주고연대하는 삶과 기술을 가르쳐야하는 교육의 대상이 될 뿐이다.

과연 교육은 무엇인가? 누군가는 앞에서 가르치고 어떤 여럿은 그것을 배우는 것인가? 가르치는 사람이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배우는 사람이 중요한가 아니면 가르치는 사람이 중요한가? ‘교육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뭐냐고 물으면 대개 칠판이 있고 뭔가 말하는 한 사람과 그 사람에게 집중하는 여러 사람의 모습이라 답한다. 필자들의 글에서 드러나는 교육이 여전히 필자인 우리(학교에서)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변화시키려는 것에 고정되어 있는 것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너는 가르치고 나는 배우는 게 아니라 너랑 나랑 같이 토론하고 공부하는 교육, 배우고 싶은 것을 내가 정하고’, ‘배우고 싶을 때에 어디서나 배울 수 있는 교육, 그래서 국가와 사회가 정한 교육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포함되면 좋겠다. 노동권에 일할 권리와 일하지 않을 권리를 함께 포함할 것을 고민하듯이 쉬고 싶을 때 쉴 권리와 즐겁고 알차게 놀 권리도 보장하는 교육, 배우는 동안 먹을 음식, 사용하는 모든 도구, 이동에 드는 비용도 제공하는 교육을 꿈꾸고 만들기 위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일은 아닌가 싶다.

교육이 무엇인지 파헤치고, 우리가 내면화한 교육에 대한 고정관념을 어떻게 넘어설지 먼저 얘기하지 않고 다른 얘기를 한다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 같다. 우리가 함께 손잡고 새 하늘 새 땅을 상상하기위해 먼저 합의할 것들도 많을 것이다. 마을, 골목, 공동체는 과연 어떤 모습인지 각자 그리는 그림을 맞추는 과정이 필요하다.

 

 

가령 박복선이 처음 글에서 제시한 건 후쿠시마 등 생태적 위기, 파국이 도래하는데 이러한 현실을 사유하고 고민하지 않는 교육에는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생태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논리였죠. 인류의 존속 자체가 불가능한데 그걸 외면하고 있다니, 이건 죽은 교육이다.’ 거칠게 요약하면 이러려나요? - 공현, <우리는 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말하게 되었는가?>, 《오늘의 교육》 5·6월호, 14

 

 

도래할파국은 어쨌거나 앞으로 올 시간에 대한 얘기다. 파국이 도래하기 전까지 살아야 하는 나날들은 그냥 버티면 되는 것일까? 솔직히 한 순간도 인간답게 지내기 힘든 학교생활은 어쩌자는 것인지 궁금하다. 경쟁적인 대입 시험으로 인한 압박은 초등학교, 유치원까지 내려가고 있으며,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되는 곳에서도 여전히 체벌이 자행되고 있다고 밝히는 학생이 10명 중 4명이나 되고, 나머지는 대체 체벌인 벌점제에 시달린다. 학교라는 공간 자체가 갖는 감시와 통제의 시선마저 억압이 되는 와중에 교육은 인간에 대해서도 아직 끈질기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물론 정용주의 글 <‘생태적 탈근대로서 교육의 생태적 전환>(5·6월호)은 꼼꼼하게 탈근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생태적이라는 말이 환경/생태주의의 범주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모든 부분을 다루게 될 것임을 생태적 교육학의 통합적인 세계 인식세계 내 모든 존재는 모두 연결되어 있는 상호의존의 관계 을 통해 강조한다. 하지만, 그 통합적인 세계 인식은 윤상혁의 <전환을 위한 사유>에서, “나와 지구는 분리되어 있지 않내가 바로 지구라는 인식으로 흐른다(같은 책, 42). 여기서 나는 생태적 전환이라는 말이 거대하고 거창하다 못해 위험스럽게 느껴진다. 지금 학교에서 개별적으로 맺고 있는 교사-학생의 관계 역시 사회적인 관계라고 볼 때, 교사인 내가 발생시키고 있는 지위 권력, ‘위계의 문제는 그 통합적인 세계 인식 앞에서 절대적이고 전능한 권위로 변질되기 쉽다. ― 내 말이 법/하느님의 뜻/진리가 되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 ‘지구와 통합된내가 가르치는 일이 도전받을 수도 있고 어떤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과연 용납할 수 있을까? 비약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권력 관계가 활약하는 공간은 그 어이없는 비약을 현실화하곤 한다는 걸 나는 여러 차례 경험했다.

물론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나의 고통과 당신의 고통이, 내가 겪은 차별의 어떤 측면과 당신이 겪는 차별이. 그래서 공감하고 연대도 할 수 있다. 밀양, 쌍용차, 용산, 강정, 세월호라는 서로 다른 사건들이 그렇게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해 왔으니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교육(혹은 국가, 종교)과 통합적 인식이 만나는 일은 좀 더 조심스러웠으면 좋겠다.

삶과 교육의 전환 국면 가운데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를 먼저 질문하고 싶었던 것도 그래서이다. 우리는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멋진 그림을 그리고 먼저 앞서 나가듯 도망치는 건 아닌가. ‘환경도 생각하고, 생명과 농업의 가치를 얘기하고 소비를 줄이고 풍부한 생태 감수성을 보여 주면 지금 당장은 아무도 우리를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우리를 욕할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덧붙여 사소해 보이지만 사소해서 너무 어려운 어떤 노력예를 들어 교사/부모를 위시한 어른들이 누리는 권위를 놓는다든가 나이 위계를 넘어서는 시도 같은 을 지금 좀 놓아도 괜찮을 것이다하는 생각들을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말이 알리바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알리바이는 범죄 현장과 다른 곳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본인의 무죄를 입증하는 것을 의미하는 법률 용어지만, 비난을 피하기 위해 그럴듯하게 둘러대는 핑계라는 뜻도 함께 갖고 있는 단어다. 학교가 더 인권적인 공간이 되도록 애쓰지 않고 뭐하고 있었냐는 책임 추궁을 피하기 위한 핑계가 아닌가를 자꾸 묻고 물어야 한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또 교사들은 얼마나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는지, 학교 안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관계는 얼마나 평등한지, 학생들의 의견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먼저 확인했으면 한다. 예컨대 나에게는 생태적으로 거듭나는 교육보다는 보다 평등하고 위계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교육이 더욱 매력적이다. 생태적 전환보다는 학교와 교사/가정과 부모가 일상적으로 휘두르는 권력을 어떻게 약화 시키거나 없앨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해 보인다.

 

 

정희진, ‘몸의 일기’, <한겨레> 2015.8.28.

 

 

 

오늘의 교육 [28호/2015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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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4 06:06 2016/05/24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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